죽어서 어디로 가는가?(진심직설)

2011. 11. 10. 22:30경전과교리해설

 

 

                                                                                   (제부도 일몰)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전철을 타면 「주,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천국에서 영생을 얻으리라.」라고 하는 광야의 소리(?)를 심심찮게 듣는다. 그러면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인가. 기독교신앙에 의하면 천당이나, 지옥이나, 죽은 다음에 영혼이 의탁하는 곳이 있는 모양이다. 악인(惡人)도 예수를 믿으면 천당 가는 건지, 선인(善人)도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 가는 건지... 그런 것은 잠시 제쳐놓고 기독교는 천국과 영생(永生)을 곧잘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면 예수를 믿어 천국에서 영생(永生)을 얻는다면 영혼은 곧 불멸(不滅)의 존재가 된다는 말이 되는데 없는 것이 새로 있는 것이 되니 영생이란 말이 어불성설이 되고, 또한 영혼이 처음부터 죽지 않는 그 어떤 존재라면 하나님도 불멸이요, 영혼도 불멸이 되니 하나님이란 믿음의 유무가 의미가 없게 된다.

 

 

왕생극락을 염하는 불교 또한 지은 업에 따라 착한 업을 지으면 천상의 좋은 곳에서 태어나고 악한 업을 지으면 축생이나 지옥과 같은 아비옥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이는 윤회를 인정하기 때문에 쉬이 이해는 가지만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은 보살은 죽어서 어디로 가서 그 영혼을 의탁하게 되는가. 사대(四大)가 주인이 없고 오온(五蘊)이 공(空)하다는 불교 공부를 하다가 보면 문득 문득 의심이 가는 것이 바로 깨달은 이는 어디로 가서 그 영혼을 의탁하는냐 하는 것이다. 호기심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 심령세계란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업설을 연장한 선상에서 죽은 영혼이 다음 생을 받기 전에 의탁하는 세계에 불과한데 이 말도 윤회라는 틀 속에서 영혼은 불멸의 존재라는 명제가 성립되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니 사후세계보다는 현실에 매달려 별 관심을 가져볼 수가 없겠지만 나이가 들면 현실이란 삶 그 자체보다 사후에 가는 길, 다시 말해 사후 영혼이 의탁하는 곳으로 관심이 깊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망상 교회나 절을 찾아가면 그저 선악을 기준으로 도덕적 훈계를 주는 천당과 지옥 이야기로 좌판을 벌리는 것이 상례라, 식상하여 홀로 공부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인데 나 또한 그런 부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나 화두처럼 떠오르는 사후세계, 깨달은 이,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의 가는 길에 의심을 털어내지 못했다가 보조국사의 <직심 직설> 제 마지막 품 <진심소왕(眞心所往)>을 읽고는 어둠이 가셨기에 여기 전문을 사경(寫經)하는 심경으로 옮겨 보았다. 번역은 이기영 박사의 번역본을 옮겨온 것임을 밝혀둔다.

 

 

 

 

 

(대연사 대불)

 

진심이 가는 곳(眞心所往)

 

問)진심(眞心)에 아직도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진심(眞心)을 모르고 방황하기 때문에 선악(善惡)의 인(因)을 짓습니다. 선(善)의 인(因)을 짓기 때문에 좋은 세계에 나가고, 악(惡)의 인(因)을 짓기 때문에 나쁜 세계에 들어가며, 업(業)을 따라 생(生)을 받는데, 그 이치는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심에 도달한 사람은 망녕 된 생각이 모두 없어지고 진심에 계합하여 선악의 인(因)이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죽은 뒤에 그 영혼은 어느 곳에 의탁합니끼?

 

或 曰 未達眞心人 由達眞心故 作善惡因 由作善因故 生善道中 由作惡因故 入惡道中 逐業受生 其理不疑 若達眞心人 妄情 歇盡 契證眞心 無善惡因 一靈身後 何所依託

 

 

答)의탁할 곳이 있는 것이 의탁할 곳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또 의탁할 곳이 없는 것을, 사람들 사이에 떠돌아 다니는 방탕한 사람이나, 귀신 세계의 임자 없는 고혼(孤魂)과 같다하여 특히 이렇게 물어서 의탁할 곳이 있기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問)그렇습니다.

 

曰 莫謂有依託者 勝無依託耶 又莫將無依託者 同人間飄零之蕩子 似鬼趣無主之孤魂 特爲此問 求有依託耶

或 曰 然 

 

                                                                            (홍법사 사천왕)

 

答)불성(佛性)에 달(達)하면 그렇지 않다. 일체중생이 각(覺)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에 허망한 정(情)과 애착하는 집착으로 업을 짓고 인(因)을 삼아 육취(六趣)에 나서 선악의 과보를 받는다. 가령 천상의 없을 지어서는 다만 천상의 과보를 받아 제가 마땅히 날 곳을 제외하고는 그 외의 과보는 받지 못한다. 다른 세계도 다 그와 같아서 이미 그 업을 따르기 때문에 제가 마땅히 날 곳을 낙(樂)으로 삼고, 마땅히 나지 않을 곳은 낙(樂)이 아니라 하며, 마땅히 날 곳을 자기의 의탁할 곳이라 하고, 마땅히 나지 않을 곳을 남이 의탁할 곳이라 한다.

 

曰 達性則不然也 一切衆生 未覺性故 妄情愛念 結業爲因 生六趣中 受善惡報 假如天業爲因 只得天果 除合生處 餘竝不得受用 諸趣皆爾 旣從其業故 合生處 爲樂 不生處 爲非樂 以合生處 爲自己依託 不生處 爲他人依託

 

그럼으로 허망한 정(情)이 있으면 허망한 인(因)이 있고, 허망한 인(因)이 있으면 허망한 과(果)가 있으며, 허망한 과(果)가 있으면 의탁할 곳이 있고, 의탁할 곳이 있으면 피차(彼此)를 나누며, 피차가 나누이면 가(可), 불가(不可)가 있게 된다.

 

所以 有妄情則有妄因 有妄因則有妄果 有妄果則有依託 分彼此則有可不可也

 

 

(홍법사 사천왕)

 

지금 진심(眞心)에 도달해서 생멸이 없는 각(覺)의 본성에 계합(契合)하여 생멸이 없는 묘한 작용을 일으키니 묘한 체(體)는 진실하고 한결같아 본래 생멸이 없으나, 묘한 용(用)은 인연을 따르므로 생멸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체(體)에서 용(用)이 생기는지라, 용(用)이 곧 체(體)이니 거기에 무슨 생멸이 있을 수 있겠는가? 깨달은 사람은 진실한 체(體)를 증득(證得)하였으니, 그 생멸이 무슨 간섭을 하겠는가. 그것은 물과 같다. 즉 물은 습(濕)한 성질을 체(體)로하고 물결을 용(用)으로 하니 습한 성(性)에는 원래 생멸이 없는 까닭에 물결 속에 있는 그 습한 성인(性因)인들 어찌 생멸이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물결이 습한 성(性)을 떠나서 따로 없기 때문에 물결에도 생멸이 없는 것이다.

 

今達眞心 契無生滅之覺性 起無生滅之妙用 妙軆眞常 本無生滅 妙用隨緣 似有生滅 然 從軆生用 用則是體 何生滅之可有 達人卽證眞軆 其生滅 何干涉耶 如水以濕性爲軆 波浪爲用 濕性元無生滅故 波中濕性 何生滅耶 然 波離濕性別無故 波亦無生滅

 

그럼으로 옛 사람이 말하기를 <온 대지가 사문의 한 쌍의 바른 눈(일척정안:진리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리킴. 선가(禪家)에서는 때로는 어리석은 자의 안목에 대한 깨달음의 비유, 화두(話頭)로 쓰이기도 한다.) 이며, 온 대지가 이 하나의 가람이다. 이것이 이치를 깨친 사람의 안심입명할 곳이다>라고 하였다.

 

所以 古人 云 盡大地 是沙門一隻正眼 盡大地是箇伽藍 是悟理人 安心立命 

 

(고흥 능가사)

이미 진심에 도달하고 나면 사생(四生: 존재하는 사물을 생성과 인과에 따라 넷으로 분류한 것. 습생(濕生), 난생(卵生), 태생(胎生), 화생(化生) )과 육도가 모두 한꺼번에 사라지고, 산하(山河) 대지가 모두 진심이라, 이 진심을 떠나 밖에 따로 의탁할 곳이 없다. 이미 삼계의 허망한 인(因)이 없어졌으므로 반드시 육도의 허망한 과보가 없을 것이다. 허망한 과보(果報)가 없어졌으니 무슨 의탁을 말하겠는가? 또 따로 피차(彼此)가 없으니 이미 피차가 없다면 무슨 옳고 옳지 않음이 있겠는가? 즉 시방세계가 다만 하나의 진심이라, 온 몸으로 수용하므로 따로 의지할 곳이 없고, 또 시현문(示現門: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갖가지로 몸을 나타내는 법에 관한 교리) 가운데서 마음대로 가서 태어나더라도 아무 장애가 없다.

 

若達眞心 四生六道 一時消殞 山河大地 悉是眞心 不可離此眞心之外 別有依託處也 旣無三果妄因 必無六趣妄果 妄果旣無 說甚依託 別無彼此 旣無彼此則何可不可耶 則十方世界 唯一眞心 全身受用 別無依託 又於示現門中 隨意往生 而無障碍 

 

(설악산 흘림골)

                                                                       

그럼으로 전등록(傳燈錄)에서 온조상서(溫操尙書)가 규봉(窺峰) 스님에게 묻기를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수명이 다하면 어디에 의탁합니까?> 하니, 규봉스님은 <일체중생이 모두 신령스러운 밝은 각(覺)의 본성을 갖추어 부처와 다름이 없으므로 만약에 이 성(性)이 곧 법신(法身)임을 깨달으면 본래 생함이 없거늘 의탁할 곳이 있겠는가. 신령스럽게 밝아 어둡지 않고 항상 분명히 알며, 어디서 온 곳도 없고 어디로 갈 곳도 없다. 다만 비고 고요함을 자기 체(體)로 삼되, 육신이 그것이라고 인정하지 말며, 신령스런 지혜를 자기 마음(自心)인 줄 알되, 망념을 그것이라고 인정하지 말라. 만약 망념이 일어나더라도 도무지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목숨을 마칠 때에 저절로 업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요, 비록 중음(中陰)이 있다 할지라도 그 향하는 곳이 자유로워 천상(天上)이나 인간, 어디에나 마음대로 기탁(寄託)한다.> 하시니 이것이 곧 진심의 신후(身後)의 가는 곳이다.

 

故 傳燈 云 溫操尙書 問圭峯曰 悟理之人 一期壽終 何所依託 圭峯曰 一切衆生 無不具有靈明覺性 與佛無殊 若能悟此性卽是法身 本自無生 何有依託 靈明不昧 了了常知 無所從來 亦無所去 但以空寂 爲自體 勿認色身 以靈知 爲自心 勿認妄念 妄念若起 都不隨之則臨命終時 自然業不能繫 雖有中陰 所向自由 天上人間 隨意寄託 此則眞心 身後所往者也

 

 

                                           (내장산)

 

 

 

♬ 귀소/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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