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3. 23. 23:06ㆍ생각하며
<고흥 팔영산 제일 유영봉에서>
죽음의 명상(3)
부스러진 몽돌이던 바위돌이든
강물에 떨어지면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죽음이란 것도 그렇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죽음이란 그 강물 속에 가라앉는 것은 다르지 않다.
하늘이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주었다면
아마도 죽음이상 평등하게 베푼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이라도 죽음이란 강물 앞에서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끼고 허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무상(無常)이란 무엇인가?
허무(虛無)란 무엇인가?
덧없음이요, 공허함이 아니겠는가.
그 덧없음과 공허함 때문에
사람들은 염세주의자도 되고
쾌락주의자도 되지만
그래도 맑은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그 덧없음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는 글을 짓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음악가는 음악을 작곡한다.
불후(不朽)의 명작을 기대하면서.
무상한 이 육신과 영혼을
공허한 이 육식과 영혼을
불후의 명작으로 대체해 보려는.
이는 바로
<나>는 사라지지만
<나>의 분신(分身)이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찰나적(刹那的)>인 것에서 <영원(永遠)>을 찾지만
그 <영원>이란 것이 도대체 있던가?
<영원한 것>이 있다면 어찌 찰나에 사라질 수 있으며
사라진 것이 어찌 다시 영원한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조금만 마음을 반추해보면 이는 분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부처는 <무아(無我)>란 화두를 두었나 보다.
영원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찾는 <나>를 버리라고.
인연의 법을 들쳐보아도
반야의 모든 경을 들쳐보아도
성경을 들쳐보아도
그 어디에 영원한 <나>라는 것은 없지 않던가.
그럼으로 <영생불멸>이란 말도 <극락왕생>이란 말도
모두가 부질없는 <나>라는 병의 증후군일 뿐.
태어나 사라지는 것은 퀴즈문제가 아니요,
그저 하나의 해프닝일 뿐인데,
우리는 오늘도 그것을 화두로 삼고 살려하니
밀려가고 밀려오는 그 물결에 희비애락이 이는 것.
생(生)이 영원이라면 사(死)가 있을 수 없고
생한 것이 없다면 죽음이란 있을 수 없는 것
그래서 생사(生死)일여(一如)라 했던가.
바람에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흔들리기에 깃발이 흔들린다는
옛 선사들의 선어(禪語)
생사(生死)의 바람이 내 마음의 바람 이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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