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1. 19. 08:33ㆍ경전과교리해설
<도봉산의 바위들>
사리불의 이름 유래
염부제에서 제일 안락한 곳에 마가타국이 있고,
그 안에 왕사성이라는 큰 성과 빈비사라라는 왕이 있으며,
마타라(摩陀羅)라는 바라문출신의 논사가 있었다.
왕은 그 사람이 토론에 능하다하여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 읍을 주었는데
마타라는 거기에 가정을 차려 딸을 낳으니
눈이 사리(舍利: 새매라는 뜻)와 같았으므로
그 딸을 <사리>라 이름 하였고,
다음에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골격이 크므로 <구치라(무릎이 크다는 뜻)>라 하였다.
마타라 바라문은 이미 생활이 안정되어
집과 아들과 가족들이 풍요하므로
배우던 경전은 모두 폐지하여 잊고 더 새로운 것을 익히지도 않았다.
이때 남천축에 한 바라문 출신의 큰 논사가 있었으니
이름이 <제사(提舍)>이었다.
그는 일찍이 열 여덟 가지 큰 경을 모두 통달 했는데
왕사성에 들어갈 때는 머리에 불을 이고 구리(銅)로 배를 감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거침없이 대답하기를
『내가 배운 경서가 너무 많아서 배가 찢어질까 걱정이다.
그럼으로 구리로서 배를 싼다.』라고 하고,
머리에는 어찌 불을 이고 가는가 하면 대답하기를
『매우 어둡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묻기를 『해가 뜯는 데 어찌하여 어둡다 하는가?』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다.
『어둠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햇빛이 비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어리석음의 어두움이 덮인 것이니,
지금은 비록 해의 광명이 있으나 어리석음 때문에 오히려 어둡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대가 아직 바라문인 마타라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니
그를 만나면 배는 쭈그러지고 광명은 어두워지리라』 하니
그 바라문은 북 있는 곳으로 가서 논의를 청하는 북을 쳤다.
왕이 북소리를 듣고 그 사유를 듣고
마타라 논사와 논쟁을 시켜본 바 마타라 논사가 졌다.
왕은 마타라에게 하사한 읍을 빼앗아 <제사>에게 주었다.
패한 마타라는 제사에게
『그대는 총명한 사람이니 내 딸을 그대에게 주리라.
사나이로서 누를 끼쳤으니
이제 멀리 딴 나라로 가서 본래의 뜻을 구하라.』하니,
제사는 그 말을 따라 그의 딸 사리를 아내로 삼았다.
그의 아내가 태몽을 꾸니
어떤 사람이 몸에는 갑옷을 입고 손에는 금강방망이를 들고
모든 산을 두드려 부순 뒤에는 큰 산 옆에 서있는 것을 보았다.
꿈을 꾸고 나서 남편 제사에게 말하니,
『그대가 아들을 낳으면 모든 논사들을 모두 굴복시키되
오직 한 사람만은 굴복시키지 못해 그의 제자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사리부인이 잉태한 뒤로는
그 아기 때문에 엄마까지도 매우 총명하여 토론에 매우 능숙하였다.
그의 동생인 구치라가 누이와 토론하면서 지므로 생각하기를
『잉태한 아기는 반드시 크게 지혜로울 것이다.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이렇거늘 하물며 태어난 뒤이겠는가.』 하고는
곧장 집을 버리고 떠나 학문을 닦아 남천축까지 가서
손톱도 깍지 않고 열 여덟 가지 경서를 읽어 모두를 환하게 통달하니
사람들이 그를 장조범지(長爪梵志: 손톱이 긴 바라문)라 했다.
그의 누이가 아이를 낳은 지 7일 뒤에 흰 요에 싸서
그의 아버지에게 보이니 아버지가 이르시길
『내 이름이 제사이니 내 이름을 따서
우바제사(우바는 따른다는 뜻이고 제사는 별의 이름)라 하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사리부인이 낳았다 하여 <사리불>이라 하니
<사리>는 어미의 이름이요, <불>은 자식이라는 의미다.
사리불은 지혜롭고 많이 알아 큰 공덕을 지으니
나이 여덟 살이 되자 18부의 경을 다 외워
모든 경서의 뜻과 이치를 통달하였다.
~ <대 지도론>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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