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비밀

2006. 6. 23. 01:37붓다의 향기

 

 

 

삶의 비밀


법구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죄악에서 벗어났으므로

우리는 그를 일컬어 성직자라 한다.

마음의 평온 속에서 살아감으로

우리를 그를 일컬어 수행자라 한다.

그 영혼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렸으므로

우리는 그를 일컬어 순례자라 한다.』


우리의 삶은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속적인 인연만을 따라 사는 삶이고

둘은 세속의 인연을 벗어난 종교적인 삶입니다.


세속의 인연을 따르면 이기적인 사람이 됩니다.

출세간의 법을 따르면 이타적인 사람이 됩니다.

세속의 인연을 지키는 자는 도덕적인 사람입니다.

출세간의 법을 지키는 자는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도덕적인 사람은 표면에서만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중심에서 조화를 이룹니다.

종교적인 사람은 모순적(矛盾的)이지만

도덕적인 사람은 항상 일관적(一貫的)입니다.


사람들은 도덕적인 사람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을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도덕적인 사람은 예측이 가능하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 고 하고서는

채찍을 들고 사원에 들어선 환전상들을 쫓아냈습니다.

열매를 맺고 있지 않은 무화과나무에게도

예수님은 저주를 내렸습니다.


도덕주의자는 종교가가 되지 못합니다.

각각의 주장이 서로 일관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에 일관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대의 과거의 주장과 현재의 주장이

서로 일관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야 합니까?

우리의 삶은

흐르는 강과 같이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은 항상 어려움이 따릅니다.

끊임없는 어려움과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화와 약동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일관적인 것을 요구하고

또 그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참 조화는 세속의 인연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성질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숙각선사는 말합니다.

『지지범중장보리(只知犯重障菩提)

불견여래개비결(不見如來開秘訣)』


『중죄를 범하면 보리를 막는 줄만 알뿐

여래께서 비결 열어 두심은 보지 못하는구나.』

하는 뜻입니다.


사회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서

모든 것을 고정적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것인 냥

도덕과 규범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도덕이 수세기 동안 계속해서 지속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하여도 고정된 규칙은 그대로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도덕가는 이를 위하여 항상 새로운 예언자가 나올 수 있는

문을 닫아걸어 놓는 것입니다.


이슬람 인들은 마호메트를 마지막 예언자로 부르고,

기독교는 예수를 독생자로 불렀습니다.

이제 외아들이 죽었으니 대가 끊어진 것입니다.

마지막 예언자 사라졌으니 더 이상 예언은 없습니다.


도덕주의자들은 표면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규칙이 그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규칙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경전이 그들이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경전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들은 규칙을 따를 뿐 전혀 자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말합니다.

『자각하라. 그리고 지켜보라.

그러면 <참된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그때는 더 이상 대립되는 것에 방해받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밀의 열쇠입니다.

세속의 이 삶에서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비밀의 열쇠입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수행자가 되어야 하고

영혼의 먼지를 털어내는

순례의 길을 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