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無常)한 삶에서 영원한 삶의 길(무상2)

2006. 5. 16. 00:29야단법석

 

 


무상(無常)한 삶에서 영원한 삶의 길(무상2)


사람이 태어난 것이 존재가 아니고, 죽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그 삶에는 목적지가 없는 것이 된다.

삶이 목적지가 없다면 삶은 어느 곳으로 가야할 곳도, 머물 곳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삶은 유희라 할 수 있다. 이는 단지 되어 가는 것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삶이란 변화일 뿐이며, 하나의 게임이며 장난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을 너무 철학적으로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약 삶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삶을 놓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생(生)을 생각하면 사(死)가 가로 막고, 사(死)를 생각하면 생(生)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럼으로 삶이란 심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다만 필요한 것은 진지함이다. 진지함과 심각함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심각해 질 때는 수단과 목적, 방법과 성취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때 목적지가 있고 그 목적지로 가는 길이 있다. 야망이 생기고 욕망이 생긴다. 심각함은 곧 야망이며, 하나의 질병이다. 관심을 이 세상으로부터 돌릴 수도 있다. 오욕으로 물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야망에 찬 마음은 또 다른 세상을 생각한다. 심각함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심각한 사람은 자동적으로 철학적인 사람이 된다. 그는 생각을 시작한다.

 

심각함은 곧 머리와 관계가 있다. 심각한 사람, 사상가가 항상 침울한 얼굴을 짓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은 웃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한다. 항상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는 삶 자체를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삶 그 자체가 곧 목적인 것이다.


진지한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 진지함은 가슴으로부터 나온다. 진지한 사람은 심각하지 않다. 진지한 사람은 추구하되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추구한다.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으로 역시 족하다. 아이는 개를 좇아 달려가다가도 도중에 나비를 발견하면 방향을 바꾸어 나비를 좇는다. 그렇게 나비를 따라가다가도 길가에 핀 꽃이 있으면 나비는 잊어버리고 온 관심을 꽃으로 돌린다. 아이는 심각하지 않다. 단지 진지할 뿐이다. 아이가 어떤 것을 마음에 두면 그는 전체적으로 그것과 함께 있게 된다. 그것이 진지함이다. 나비와 개를 잊어버리면 꽃이 모든 것이 된다.

 

관심을 하나에 집중할 때 그것이 진지함이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얻기 위해서 관심을 하나의 수단으로서 사용할 때 교활하게 된다. 그대는 단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단으로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그 길이 곧 목적지이다. 그리고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그 길이 곧 목적지이다. 내가 어디에 있든 그곳이 바로 목적지이다. 내가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바로 목표이다.

바로 <이 순간> 나의 삶 전체가 나에게로 수렴한다. 어디 다른 곳으로 갈 목적지가 없다. 그대는 이 순간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즐겨야 한다.


무상을 체득한 사람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어느 곳으로도 가지 않는다. 단지 아침 산책을 할 뿐이다. 그것이 다른 점이다. 그대는 직장에 갈 때 똑같은 길을 지나간다. 그리고 아침 산책을 한다. 길도 같고 집도 같고 모든 것이 같다. 그대 자신도 같고 건너는 다리도 같다. 그러나 아침 산책을 할 때 모든 것이 달라진다. 무상의 실체를 알지 못한 사람은 항상 어느 곳으로 가고 있다. 직장이나 가게 등등 항상 목적지가 있다. 그러나 무상을 아는 사람에게는 아침 산책과 같이 어떤 목적지가 없다.


세속적인 사랑은 목표 지향적이다. 세속적인 사랑이란 무엇인가? 오욕의 늪에 빠진 사람이다. 그 목표가 종교이든 무엇이든 심지어 신이더라도 목표 지향적이다. 그러나 비세속적인 사람은 목표 지향적이 아니다. 그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지금, 그리고 여기>로 수렴된다. 바로 이것이 무한이 된다. 모든 길을 통해서 그 무한으로 가려고 해도 그것은 언제나 도달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그것은 무한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곳에 도달할 때 모든 것은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면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스스로 싫증을 내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한한 것은 계속 진행되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무한은 하나의 무한에서부터 또 다른 무한으로 계속해서 진행되어 나간다. 무한은 정체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한이다. 정체되지 않는 것은 곧 무상이다. 무상은 변화이기 때문이다. 머물지 않는 것이 머무는 것이 무상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무상은 불생불멸이라고 한 것이다.

무상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서 살아나는 것이다.

 

 

진지함이란 무심(無心)과 상응하는 말이다.

『마음이 없이는 부처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또『중생이 부처요, 부처가 중생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부처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부처를 보기 원한다면 부처를 보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을 보아야 한다. 한 번 그대가 부처를 보았다면 그대는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린다. 그것이 무심이다. 그럼으로 조사들은 무심을 불성(佛性)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만약 그대가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 마음은 그대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중생심(衆生心)과 불성(佛性)은 물과 얼음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세 가지 독에 중독 되면 그것은 중생심이 되고 세 가지 독에서 벗어나서 순수해 질 때 그것은 불성이 된다.

 

세 가지 독이란 무엇이란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을 말한다.

삼독은 무상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겨울이 되면 물은 얼음이 되고 여름이 되면 얼음은 물이 된다. 얼음을 없애고 나면 더 이상 거기에 물이 남아 있지 않다. 중생심을 제거하면 거기에 불성은 없다. 얼음의 본성이 바로 물의 본성이다.

무상을 아는 자 불생불멸을 알게 되고 불생불멸을 깨달은 자가 부처가 되기 때문이다. 부처란 무엇인가?

불성을 자각한 자가 바로 부처가 아닌가?

그럼으로 부처는 무상을 깨달아 해탈을 얻고 중생은 무상에 마음을 일어 켜 육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불성인 마음은 부처도 중생도 다르지 않다. 그럼으로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키고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 나누어 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깨어 있음을 만들어 내기에 중생은 부처를 낳는다.

그리고 깨어 있음은 고통을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고통이 없다면 깨어 있음을 만들어 낼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깨어 있음이 없다면 고통을 부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킨다.

부처는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중생에 의해서 해탈된다.

그래서 모든 부처들은 미혹을 아버지로 삼고 탐욕을 어머니로 삼는다.

미혹과 탐욕은 중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생을 아는 자 사(死)를 피하지 않고,

사(死)를 아는 자 생(生)을 피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생사가 일여(一如)이니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그대는 이쪽 언덕에 있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저쪽 언덕에 있다.

그러나 한 번만이라도 진정으로 무상을 깨닫게 된다면 그대 자신의 마음은 텅 비게 될 것이고, 그대가 “나”라고 주장하는 어떤 형체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진실로 미혹과 깨어 있음의 양쪽을 모두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무상을 체득했을 때 불생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한 번 미혹과 깨어있음을 초월할 때 저쪽 언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에게 허무한 감성적인 느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래에게는 이쪽 언덕도 저쪽언덕도 없다.

그는 강물의 중간에도 없다. 지식과 깨달음을 구하는 아라한은 강물의 흐름 중간에 있다. 중생은 이쪽 언덕에 있다. 그리고 저쪽 언덕에는 불성이 있다.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아라한은 누구인가? 그는 구도자이다. 그는 보았지만 부처와 같이 무상을 진실로 체증(體證)한 자는 아니다.

중생은 누구인가?

무상을 체득치 못한 자이다. 그럼으로 중생에게는 허무가 일어나고, 부처에게는 해탈과 열반의 꽃이 피는 것이다. 그럼으로 기억하라. 허무한 무상은 중생에게 일어나고, 불생불멸의 무상은 깨달은 자만이 체득할 수 있음을.


 

우리가 삶에서 지나간 시간을 생각할 때 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 그럴까? 왜 부질없이 한(恨)이 서리고, 후회가 일어날까?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일까?

과거, 현재 미래 즉 신간의 모든 개념이 우리의 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 존재, 즉 제한된 인생,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하는 육체적 요구,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서 이용해야만 하는 자연계의 본질 때문이다.

 

확실히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다. 죽어야 할 몸이기에 우리는 시간을 무시할 수도,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밤과 낮, 잠과 깨어남, 성장과 노화의 리듬, 노동으로써 세계를 세울 필요성과 자신을 지켜야 할 필요성이, 이 모든 요인들은 우리가 살기를 바란다면 시간을 ‘존중하도록’ 강요하는 것들이다. 육체는 또한 우리에게 살기를 원하도록 바란다.

 

그러나 시간을 “존중하는 것”과 시간에 ‘굴복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진지한 마음에서는 시간을 존중하지만 시간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의 관념에 매일 때 우리는 ‘존중이 아니라 굴복하게 된다.’

시간에 집착하는 자는 물건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물건이 될 수밖에 없다. 시간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시간은 우리의 지배자가 된다. 진지한 마음이라면 시간은 그때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는 지배자나 우상이 되지 못한다. 오늘날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자신을 둘러보라. 시간은 우리의 최고 지배자가 되고 있다. 상품을 만들어 내는 공장에 가 보라.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는 정확하게 ‘시간대로’ 진행되기를 요구한다. 게다가 시간은 시간일 뿐만 아니라, “시간은 돈”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럼으로 인간은 시간의 노예가 되고 또 돈의 노예로 전락되어 그저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굴러가도록 되어가고 있다. 단지 기계는 최대한으로 이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기계는 노동자에게 진정한 삶을 생각할 시간과 노력을 앗아가고 있다. 과학이 지배하는 첨단산업사회는 기계를 통하여 시간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가 시간에 굴복할 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시간에 매이고, 시간에 쫓겨 다니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인생은 불생불멸의 삶이 아니라 공허하고 허무한 생멸의 세계로, 윤회의 삶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이 가져다주는 욕망의 충족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에서 진지한 자라면 그는 시간 속에 있지만 시간에 매이지 않고 진지한 마음으로 불생불멸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마치 예술가나 작가가 시간 속에 창작을 하지만 그 창작된 작품은 시간을 벗어나 있듯이.


불생불멸의 가치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귀신의 세계도 아니요, 신선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생이면서 부처의 세계요,

고통이 사라진 해탈과 열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솔천도 아미타불의 세계도 아닌 이 사바의 세계가 될 때 불생불멸이란 참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