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無常)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무상3)

2006. 5. 15. 23:58야단법석

 

 

무상(無常)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

 

무상을 깨닫고 진지한 마음으로 사는 길은 무엇인가?


첫째는 모든 살아 있는 것에 자비심을 가지는 것이다.

일체 현상세계는 생멸하는 세계다. 존재하는 것은 언제간은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나도 죽을 것이고 너도 죽고 모두가 죽을 것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러 긴 시간이 아니다. 인생살이란 살다보면 아침 이슬과 같고, 날으는 화살과도 같은 것이다. 인생살이는 그렇게 짧은 것이다. 그럼으로 이 짧은 인생살이에 자비와 사랑으로 살아도 짧은데,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갈등과 투쟁으로 보낸다는 것은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럼으로 생멸하는 모든 존재에 대하여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 비록 하루를 살다 가는 하루살이라 할지라도 나의 생명이 중요하다면 그 생명 또한 중요한 것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생명의 본질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나와 같은 인간에 대하여 그 생명을 존중함에 있어서야. ‘나’ 이외의 다른 생멸을 무시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다. 그럼으로 이기적인 욕심을 버린다면 모든 생명은 한결같이 숭고한 것이며, 신성한 것이다. 숭고하고 신성한 것이라면 어찌 경이로움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자비심과 사랑이란 물질적으로 베푸는 것만이 자비심이나 사랑이 아니다. 자비심과 사랑의 중요한 메시지는 내 주위의 모든 사람과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관심 없이는 어떤 자비심도 사랑도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생명을 존중한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적게는 내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내 이웃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여라. 크게는 살아 있는 모든 것뿐만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것에도 사랑과 자비심을 가져라. 동포애, 인류애, 자연사랑이란 바로 이런 관심을 둘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생명을 지닌 것이라면 어떠한 것도 그 생명을 소유하려고 하거나 지배하려고 하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이외의 어떠한 인간이나 사물도 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고 철저한 독립성과 사물에 집착을 버리고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사랑과 동정을 나누어 갖는 적극적인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인생에서 3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태어남과 사랑과 죽음이 아니겠는가? 이 3가지는 진실로 인간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그런데 태어남과 죽음은 이미 시작되었다. 당신이 태어났다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시작일 뿐이다. 그럼으로 여기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자비와 사랑>이다. 그러나 그대 영혼 속에서 자비를, 사랑을 잠깨게 하느냐 못하느냐는 전적으로 그대 자신에게 달렸다.

 

둘째는 무상을 깨달고자 한다면 <나>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무상한 것은 영원한 실체 즉 “나”라는 것이 없다. 그럼으로 완전하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모든 소유의 형태를 자진하여 포기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소유의식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나”라는 실체에 집착하여 일어나는 욕망이 아니겠는가? 그럼으로 소유욕망을 버리지 않으면 무상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럼으로 부처님께서도 8만 4천 가지 번뇌도 그 뿌리는 삼독(三毒)에 있고, 삼독의 근원은 “나”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뿐만 아니라 무상한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다.

변화란 머물지 않는 것이다. 머물지 않고 변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고통이다. 말하자면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는 것도 고통이요, 없어야 할 것이 있는 것도 고통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요, 미운사람과 함께 있는 것도 고통이다.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요, 애지중지 하든 물건이 파괴되고 못쓰게 되는 것도 고통이다. 변하는 것은 모두 종국에 고통일 뿐이다.

 

그런데 일체가 무상한 것이라면 그 고통의 주체자는 없다. 주체자가 없으면 “나의 것”이 존재하는 의미도 없게 된다. 그럼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고 모든 것은 나누어 갖는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부처님께서 “무아(無我)”와 “무아소(無我所)”를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셋째는 일체가 무상함으로

생명의 모든 현상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물건같이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그 성장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신성하다는 경이로움을 느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탐욕, 미움, 환상 등을 가능한 줄이도록 노력하고, 또한 자기도취(나르시즘)를 버리고 인간생존에 내재하는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은 비극적 한계를 무조건 받아 드려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성스러운 것이다. 그럼으로 숲을 알고 싶으면 나무부터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부처를 보고 싶으면 사람부터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넷째는 남을 속이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속지도 않아야 한다.

남을 속이거나 남에게 기만당하는 것은 욕망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럼으로 무상을 알고자 하는 자는 먼저 욕망을 거두어 모든 일에 진지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럼으로 이런 사람은 천진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단순한 사람은 아니다.


다섯째는 무상의 실체는 불생불멸임으로

자신은 모든 생명체와 하나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로서도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착취하고, 약탈하고, 파괴한다는 목표를 포기하고, 대신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과 협력하도록 애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여섯째는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도달하고자 하는 야심을 버려야 한다.

목표에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항상 성장하는 삶의 과정에서 진지하게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완전하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달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그 일에 만족감을 느끼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나비를 쫓는 천진한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이 삶을 영위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목표달성에 안달하는 것은 고통이며,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노예로 태어나서

그의 전 생애 동안 줄곧 노예상태로 살다가 간다.』고.


그 노예상태란 무엇인가? 욕망과 번뇌의 노예이며, 육신의 노예이며, 사념(思念)의 노예다. 이들의 양상은 다르지만 갇혀있는 노예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다. 분노가 오면 분노가 되고, 섹스가 오면 섹스가 된다. 그대는 개개의 모든 욕망등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모든 노예상태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무상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면 무상은 그대에게 자유를 준다. 모든 노예상태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준다. 그것을 해탈이라고 해도 좋다. 그것을 열반이라고 해도 좋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지, 무상을 체득한 자는 그 마음에 번뇌가 사라질 것이다. 번뇌가 사라진 그 마음에는 모든 것이 경이롭게 보일 것이며, 따라서 오로지 축복만이 일어날 것이다.


그럼으로 목표달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또한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그대가 무엇을 행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대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그대의 존재가 횡재수를 바라는 도둑의 기도와 같이 병들어 있다면

그대의 목표 또한 병들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