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5. 12. 00:28ㆍ붓다의 향기
마음을 아는 길
마음의 본질에 접근하는 데에는 다음의 3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경험적인 접근이다.
경험적인 접근은
객관적인 세계에의 구체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일단 경험되지 않은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두 번째의 접근은 논리적인 접근이다.
논리적인 접근은 경험을 필요치 않는다.
다만 생각하고 토론하고 모순점과 일치점을 찾으면 그뿐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가설을 이끌어 내고 이 가설에 의하여
어떤 합리적인 이유를 내세워 결론지으면 되는 것이다.
세 번째의 접근은 은유적(隱喩的)인 접근이다.
이는 시적(詩的)인 접근이다.
종교적인 방법으로의 접근이다.
과학은 보이는 현상계를 넘어설 수 없다.
과학적인 접근 그 자체가 한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경험이란 보이는 현상계 안에서만 가능하며
또 철학과 논리는 주관계(主觀界)를 넘어설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사고(思考)의 작동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논리를 통해서는 사고(思考) 그 자체까지를
용해시켜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사고의 작동을 통해서 사고의 세계를 넘어서기란 불가능하다.
과학은 객관이다.
논리와 철학은 주관이다.
그러나 종교는 이 양자(주관과 객관)를 넘어 선다.
시(詩) 또한 이 양자를 넘어 선다.
시와 종교는 하나의 다리다.
객관과 주관 사이를 잇는 다리다.
그러나 이 다리가 주관과 객관 사이에 가로놓이는 그 순간
모든 것은 카오스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굽이치는 원초의 에너지(창조력)로 되돌아간다.
카오스의 상태가 없다면 창조 또한 불가능 할 것이다.
여기 원초의 생명력으로 굽이치는 이곳에 오면
이제 모든 차별은 무너진다.
모든 구별은 살아진다.
과학은 낮의 접근이다.
낮에는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산과 강의 경계며, 흰색과 붉은 색의 구분이 선명하다.
그대는 도처에서 구분과 차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논리는 밤의 접근이다.
그 어떤 경험의 뒷바침도 없이
짐작으로써(思考) 어둠 속을 더듬는 것이다.
시와 종교적인 접근은 황혼의 접근이다.
밤은 아직 오지 않았고,
낮은 아직 기울지 않은 그 중간(중도)의 접근이다.
중생의 마음은 밝은 대낮을 좋아하는 자도 있고
어떤 중생은 한밤을 좋아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여명을 즐기는 자는 드물다.
그래서 <신심명>에 이르기를
[주관(能)은 객관를 따라 없어지고
(능수경멸 能隨境滅)
객관(境)은 주관을 쫓아 가라 앉는다.
(경축능침 境逐能沈)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경유능경 境由能境)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다.
(능유경능 能由境能)
그 둘(양단)이 된 뜻을 알고자 하거든
(욕지양단 欲知兩段)
본래로 하나의 공임을 알아야 한다.
(원시일공 元是一空)]
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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