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것

2006. 4. 22. 01:01야단법석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것


세상사의 일은 모두가 처음과 중간과 끝이 다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는 처음과 중간과 끝이 하나 같이 다르지 않습니다.

조사님들이, 그리고 선지식들은 항상 참선을 말합니다.

그 참선의 본 뜻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선의 목적은 하늘같은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며,

참된 자기가 있는 곳, 삶과 죽음 넘어 변화하지 않는 순수한 깨달음으로

우리를 이끄는 데에 있습니다.


요즘은 일반 재가자들 사이에도 명상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절에서는 선방(禪房)을 열어 신도들에게 참선을 널리 권장하고 있습니다.

왜 명상이 필요하고, 왜 선(禪)을 합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단지 일시적인 평안과 축복만을 야기하는 명상과, 자신과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기 위한 유력한 동인(動因)이 되는 명상 간의 차이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길을 가기 위해 참선, 명상 등을 행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좋은 것>은 우리와 모든 중생들이 근본적으로 가장 내적인 정수인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경전에서 “중생이 부처다” “세간이 여래요, 여래가 세간이다.” 라는 말도 곧 이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를 깨닫게 되면 무지로부터 벗어나고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참선 수행을 통해서 이러한 의미를 깨닫게 되면 삶의 참 의미를 알게 되고, 삶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면 그것이 더욱 수행에 헌신하는 계기도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삶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의 삶을 위해 깨달음을 향한 우리들 자신의 마음이 더욱 고양되게 됩니다. 그 고양된 마음은 남에게 공덕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조사나 선사들의 선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보살행은 바로 <처음에 좋은 것> ― 이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인 어떤 것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우리들의 참 마음인 불성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원(願)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러한 수행의 힘과 진리에 의해,

모든 중생이 행복해지고, 행복의 씨앗이 심어지게 하옵소서.

모든 중생이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고 슬픔의 씨앗이 심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모든 중생이 슬픔 없는 신성한 행복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게 하옵소서.

모든 중생이 지나치게 집착함이 없이 지나치게 혐오함도 없이 평온하게 살게 하옵소서.

모든 중생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평등함을 믿게 하옵소서.』

 

 


 

<중간에 좋은 것>은 우리가 수행의 핵심에 들어가게 하는 마음의 틀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본성을 실현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이 마음의 틀에서 어떤 개념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르시듯 모든 것은 본래적으로 <공(空)>하고 환상이고 꿈과 같습니다. 이를 알면 집착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만약 마음에 <나>라는 아만과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나의 것>에 대한 욕망이 일면 <유마경>의 방편품에 이 말을 깊이 새겨 보도록 하십시오.


1. 是身如聚沫 不可撮摩(시신여취말 불가촬마)

   이 몸은 취말 같아서 만져 잡을 수 없고,

2. 是身如泡 不得久立(시신여포 부득구립)

    이 몸은 물거품 같아서 오래 있을 수 없고,

3, 是身如炎 從渴愛生 (시신여염 종갈애생)

   이 몸은 아지랑이 같아서 갈애로 좇아 생긴 것이며,

4. 是身如芭蕉 中無有堅( 시신여파초 중무유견)

    이 몸은 파초와 같아서 그 속이 견고하지 못하며,

5. 是身如幻 從顚倒起 (시신여환 종전도기)

    이 몸은 환과 같아서 전도로부터 일어 난 것이며,

6. 是身如夢 爲虛妄見 (시신여몽 위허망견)

   이 몸은 꿈과 같아서 허망하게 보이게 된 것이며,

7. 是身如影 從業緣見 (시신여영 종업연견)

   이 몸은 그림자와 같아서 업연으로 좇아 나타난 것이며,

8. 是身如響 屬諸因緣 (시신여향 속제인연)

   이 몸은 메아리 같아서 여러 인연에 속한 것이며,

9. 是身如浮雲 須臾變滅 (시신여부운 수유변멸)

   이 몸은 뜬구름 같아서 잠깐사이에 변하여 없어지는 것이며,

10. 是身如電 念念不住 (시신여전 념념불주)

    이 몸은 번개와 같아서 찰나에도 머물지 않는다.


<마지막에 좋은 것>은 명상에 헌신하고 참으로 열렬하게 기도함으로써 명상과 수행을 통해 얻게 되는 공덕을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에 회향시키는 것입니다.


명상의 진가는 긍정의 힘과 이익, 수행에서 뿜어져 나오는 평화와 행복에 있습니다. 불제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참선을 하는 것도 종국에는 모든 중생에게 궁극적인 이익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 그들이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 한층 더 명상에 헌신하는 일입니다. 좀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 사바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모든 사람이 결핍과 질병에서 해방되고 절대적인 안녕과 끊임없는 행복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참선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현실이란 내 마음이 그려낸 환각이며, 꿈같음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사바세계에 대한 의식도 전환되게 됩니다. 구하지 않더라도 구해지고, 찾지 않더라도 찾아지는 것 그것이 바로 인연의 법이요, 불법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바로 명상이나 참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이로 인하여 얻어진 명상이나 참선의 순수한 힘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부처님도, 역대 선지식들도 당신이 닦은 수행의 공적 또한 영원히 닳아 없어지지 않는다고 불교 가르침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성한 세 가지 원리, 그러니까 이치에 맞는 동기, 수행을 확고하게 하는 집착하지 않는 태도, 수행에 깃들인 헌신은 우리의 명상을 진정한 깨달음으로 이끌며 삶을 맑고 밝게, 그리고 생명력을 부어넣어 힘 있게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핵심이요, 정수(精髓)입니다.


대승경전이나 조사님들의 말을 빌리자면 『유․무를 떠난 근본이념인 본각(本覺)의 세계에 대해 올바른 이해가 완전하게 밝아 결정적인 확신으로 깨달아 들어가면 비록 생사의 세계에 있다 해도 그 자리에서 항상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며 항상 육진(六塵) 번뇌의 수고로운 세계에 거처한다 해도 길이 청정한 깨달음이 세계에 거처하게 된다』고 합니다. 또『눈앞의 한 치의 장애물도 투시하지 못하는 육안(肉眼)을 갖춘 상태이지만 실제의 이치를 관조하는 혜안(慧眼)을 얻으면, 범부의 마음을 변역하지 않는 상태에서 불심의 지견(知見)과 동일하게 된다』고 합니다.

 

어떤 젊은이가 어떤 유명한 선사를 찾아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스님은 왜 법복을 입고 목에 염주를 두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사는 말했습니다.

“젊은이여, 아무 이유도 없다. 그저 어리석은 짓에 지나지 않는다.”

이 대답을 들은 젊은이는 너무나 황황했습니다. 그대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 것이 그렇게 어리석은 짓이라면 스님은 왜 출가를 권장하고 그런 것을 두르고 다니십니까?”

선사는 다시 부드러운 얼굴로 이렇게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내가 합리적으로 그 이유를 말하게 되면 그대는 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합리적인 이유를 따를 것이다. 그렇기에 동서고금의 모든 스승들은 몇 가지 어리석은 것들을 일부러 만들어 놓았든 것이다. 외형적인 그것들은 하나의 상징이다.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스승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의심 없이 진리의 수행에 헌신하겠습니다’ 라는 표시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깨달음은 어떤 직업이나 어떤 옷을 입든지 그 옷에 관계없이 일어납니다. 꼭 법복을 입음으로써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그것은 단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은 스승 쪽이 아니라 질문하는 제자 쪽에서의 제스처인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전혀 의미가 없는 어리석은 짓이라 해도 나는 스승을, 진리에 대한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그대 자신의 개인적인 모든 이유를 넘어설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시입니다. 이것이 바로 법복을 입고 염주를 목에 거는 그 행위에 대한 대답입니다. 조건 없이 진리의 소리를 따르는 수행자의 마음인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 진리라는 것, 삶이란 어떤 합리적인 이유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인 이유를 생각하면 그대 자신의 마음만 혼란스럽게 되고 때로는 분노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럼으로 매사에 합리적인 이유를 찾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십시다. 그리고 생각합시다. 남에게 나쁜 짓을 하지 말고, 남을 도울 수 있으면 내 힘껏 도와주도록 합시다. “선행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을 믿고 선행을 베푼다면 이는 ‘선행’이 조건이 됩니다. 행하지만 보답을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남을 도왔는데 보답이 없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해 집니다. 그것은 선행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을 바꿔 생각하면 내가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행복이 됩니다. 선행이란 또 물질적 베풂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은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자신의 허물을 참회하는 것도 선행이 됩니다. 그것이 곧 내 마음을 항상 바르게 돌보는 것이 됩니다. 불제자로서 이 삶 속에서 평범한 진리의 소리를 체현하고 실천해 가는데 맑은 마음이 물들지 않게 삼가 돌아보면서 살아갑시다. 남을 원망하고, 남의 잘못을 탓하기 이전에 스스로를 돌보는 불제자의 마음을 가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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