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3. 29. 23:05ㆍ야단법석
까르마(karma)(2)
아함을 비롯하여 제 경전에서 이런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업(業)은 있지만 업인(業人)은 없다.”
이 말은 곧 “행위(行爲)는 있지만 행위자(行爲者)는 없다” 는 말이 됩니다. 이는 곧 까르마의 본질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또한 중생들의 윤회의 본질을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까르마는 행위일 뿐 행위자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있지만 자살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행은 있지만 선행을 한 자는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문하게 됩니다.
행위자가 없는 데 어떻게 악업이 있느냐고?
<나>라는 존재가 없는데 어떻게 윤회가 성립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더나아가 <나>라는 존재가 없는데 선행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악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선악에 대해서 반문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설명이 난해해 집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대한 답은 논리적인 문제, 이해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각의 문제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이고, 이해적인 문제는 말과 글로써 드러낼 수 있습니다. 경전을 보면 무아와 윤회를 말하면서 이를 밝히지 않는 것은 바로 이유에 기인합니다. 자각의 문제는 분명 언어 밖에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경전에서 회자하는 등잔의 비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의 등잔에서 수백 개 수천 개의 등잔으로 불은 이어지지만 그 최초의 등잔불은 마지막 등잔의 불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습니다. 불이란 본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없다는 말은 교학에서는 <자성(自性)>이 없다고 표현합니다.
본질을 일러 <자성>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등잔의 불은 자성이 없는 데도 등잔불은 있습니다.
한 등잔에서 수백 개 수천 개로 그 불은 이어져도 그 불의 자성은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여기 저기 많다면 그것은 <나>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등잔불이 자성을 지니고 있다면 다음 등잔에 점화되어 질 때 처음 등잔불은 꺼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등잔에 불이 옮겨가도 처음 등잔의 불은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라는 존재가 없는 데도 윤회하는 원리가 됩니다. 업은 있되 업인(業人)은 없다는 말이나, 행위는 남고 행위자는 없다는 말은 모두 다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등산을 하다가 산 중턱에서 담배를 피우다 미처 끄지 않은 담배공초를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담배공초의 불이 온 산을 태우고 마을까지 내려가 마을의 집까지 태워버렸습니다. 그 불로 사람이 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방화범(放火犯)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말했습니다.
“내가 버린 담배공초의 불과 사람을 태운 그 불과는 다릅니다.
그 불은 같은 불이 아닌데 어찌 내가 처벌을 받아야 합니까?”
맞는 말입니다. 담뱃불과 집을 태운 불은 연관관계는 있지만 같은 불은 아닙니다. 광부가 광산에서 캔 철로 어떤 사람은 쟁기를 만들고 어떤 사람은 칼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칼로 살인을 했을 경우 같은 철이라고 해서 그 광부를 처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치 계란에서 닭이 나왔다 해서 닭을 계란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그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그 말을 알고 계시지요. 이는 동일성의 문제가 아니라 연속성의 문제입니다. 다소 난해한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란 자성의 윤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은 선과를 낳지 악과를 낳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연속성이란 곧 윤회에 대한 까르마의 그 근본원리를 다른 각도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업을 무아와 윤회의 차원에서 잘못이해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오류 때문임을 다시 한번 이 비유를 통해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업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나>의 위치를 한번 고찰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나>라는 실체(자성)가 있는지 살펴봅시다.
<나>라는 존재는 저 하늘의, 저 무한의 우주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작은 존재입니다. 무한대에 비교하면 무한소의 극미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나>의 육체는 수천만 개의 세포로 구성되고, 그 세포를 구성하는 또 다른 수천만 개의 극미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생물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의 인체는 7000만개의 세포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7000만개의 세포란 곧 7000만개의 영혼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그 극미한 세포보다 더 작은 박테리아들이 그 속에 기생하고 있습니다. 찰나에 번식하는 그 박테리아는 하루 동안에도 수천 억 만개의 박테리아로 증가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극미한 <나>라는 존자가 무한대의 우주와 같습니다. 큰 것에 비하면 너무나 적고, 작은 것에 비하면 너무나 큰 존재, 그것이 바로 <나>라는 위치입니다. 무한대와 무한소에 자리한 영혼들이 까르마의 힘에 의하여 만들어 진 그것이 지금의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 세포, 그 극미세포, 그 박테리아와 연관되어 있고, 이 지구와 우주와 삼천대천세계, 그것들 모두가 까르마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영혼을 지닌 것들이 까르마의 업력에 의해 상호 작용하며,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연관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전생에 지은 업력, 그것은 공업(共業)이든 불공업(不共業)이든 간에 연관되어져 있습니다. 불교 인연담에는 그래서 부모를 고생시키고 학대시킨 자식을 일깨우기 위해 그 부모가 죽어서 자기 자식의 자식으로 태어나 다시 고통과 학대를 하는 이야기라든지, 효자인 아들에게 보은하기 위해 그 집의 자식이나 하인 내지 심지어 개로 태어나 그 자식을 돌보아주는 이야기나, 학대받은 백성들을 위해 현명한 재상으로 태어나 나라와 백성들에게 보은하는 등 이런 류(類)의 인연담이 많은 것도 이에 연유합니다. 그러나 그 연유가 어떻든 간에 이 모두가 까르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데 어찌하여 산 정산에서 옹달샘이 솟아나고, 사슴은 풀을 먹는데 왜 사자는 사슴을 잡아먹는지, 벽돌은 쌓은 대로 높아지는 데, 왜 검은 안개가 온 산을 덮었는데도 산은 왜 한 치도 높아지지 않았는지 그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왜 나라마다 말이 다르고, 남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태어나는지, 손발은 둘인데 어찌하여 입은 하나인지 아시겠습니까? 알 수 없는 인연, 그것이 까르마인 것입니다. 나의 까르마, 인간의 까르마, 지구의, 우주의, 저 삼천대천세계에서 불어오는 까르마의 바람을 어이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까르마는 행위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자가 아닙니다. 인도의 쉬바신도 아니고 브라흐마신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야훼의 신도 아니고 성경 속에 절대자로 나오는 하느님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중생은 까르마를 행위로 보지 않고 행위자로 인식하고 있기에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몰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굳어지면 운명이 되고, 그 운명이 쉬바가 되고, 야훼가 되어 우리를 주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봄비, 겨울비는 사람의 인식이지 비는 봄비, 겨울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춥고 더운 것은 중생의 인식이지 비의 인식이 아닙니다. 까르마가 단지 행위임을 안다면 그것에 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생과 사, 괴로움과 즐거움도 모두 이 마음으로 이루진 것입니다. 까르마의 업력에 갇히면 까르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까르마의 주인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각이요, 해탈인 것입니다. 선학(禪學)에서 회자하는 인연불매(因緣不昧)란 말도 이에 연유한 말입니다.
선지식들은 말합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현상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우리들의 집착이다.” 라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집착이란 곧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들이 겪는 고통이란 깊은 불만족의 상태로서, 육체적인 고통을 뜻할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정신적 체험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건 하나의 동일한 상황 앞에서 중생들마다 느끼는 방식이 서도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는 <자아>가 위협을 받거나 그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일어납니다. 가장 강렬한 육체적 고통도 우리의 정신 자세에 따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체험될 수 있습니다.
불치(不治)의 병으로 신음하는 자식을 보다 못해 살인하는 부모의 살인에는 동정을 느끼면서도 보험금을 노려 남편과 자식을 청부살인한 행위에 대해서는 분노를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익히 알고 있듯이 일상적인 삶의 목적인 권력, 부, 쾌락, 명예 따위는 일시적인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으나 결코 지속적인 만족의 원천이 될 수는 없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불만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는 곧 일시적인 만족은 지속적 충만함이나 외적인 상황에 손상되지 않는 내면의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는 사는 동안 문제의 핵심을 잊어버리고 줄곧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에 물이 마른 강에 그물을 던지는 어부만큼이나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가족이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의 욕망이 탐욕으로 이어진 고리라면 가족이란 육체적 고리로 연결되어 있고, 혈연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긴 시간 동안 쌓인 것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이 긴 만큼 고통도 길고, 사랑이 긴 만큼 미움도 길어집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지내왔기 때문에 죽음과 같은 그런 헤어짐에 대한 고통도 크고, 부모 자식간에 대한 서로의 바램이 무너지고, 좌절되었을 때 그 고통과 미움도 무엇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느껴집니다. 특히 유교적 <효>사상에 베어있는 우리사회에서 느끼는 그런 감정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의 헤어짐은 우리에게 무상한 감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희망과 기대가 무너졌을 때보다 더 큰 무상과 허무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이 더 심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업의 문제가 우리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무아(無我)를 말씀하시고, 업(業)을 말씀하시고, 연기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무상을 체득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 어느 절대자나 존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것을 일깨워 주시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여 영원한 것이 없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가르침과 제법무아(諸法無我), 그 가르침의 궁극적인 메시지가 바로 업(業)을 이해하되 업인(業人)에 매달리지 말라는 의미도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가족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부터 문제가 정말 존재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관찰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점이 부처가 우리에게 주는 업의 매시지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 말을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놓고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가는 그것이 아니라는 그 문제가 진실로 규명되어야 할 것인지를 되 새겨보라는 의미입니다.
까르마의 탐구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육조단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복만 닦고 도를 닦지 않으면서 복닦는 것을 도(道)라 하네.
보시 공양 복은 많으나 마음 가운데 삼악을 짓는 것을.
복 닦아 죄 없애려 하나 복은 받아도 죄는 도리어 있네.
마음에 죄의 인연 없애려면 성품 가운데 참으로 참회하라.
대승의 참회 깨달아서 바른 것을 행하면 곧 죄 없으리
도 배우며 자성을 관조하면 부처와 하나일세.
우리조사 도법 전하니 견성하여 함께 되길 원함일세.
법신을 찾으려면 모습을 떠나서 마음을 씻으며
게으르지 말고 스스로 힘쓰라.
뒷생각 끊어지면 온 세상 쉬리라.
대승을 깨달아 견성하려면
공경합장하여 지심으로 구하라.』
또 법구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 평생이 다하도록
어진 사람을 가까이 섬기어도
숟가락이 국 맛을 모르듯이
참다운 진리를 알지 못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잠깐만이라도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면
마치 혀가 국 맛을 알듯이
곧 참된 진리를 바로 알게 된다.』
오신 법우님들,
좋은 인연 많이 쌓아서,
좋은 선지식을 두루 만나 모두 성불하시길 합장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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