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3. 29. 23:23ㆍ야단법석
까르마(karma: 업)
불교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알듯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까르마karma>에 대한 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까르마의 교리는 쉬우면서도 지극히 난해한 교리 중에 하나입니다. 그럼으로 까르마를 이해한다면 불교공부를 다했다고 말해도 절대 지나치지 않습니다. 사실 이를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은 다름 아닌 고타마 싯달타 곧 부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챤이나 유일신관을 따르는 사람들의 역사관과 비교해 보면 불교인의 역사관은 전적으로 유동적이며 모든 가능성에 개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붓다의 가르침에서 기인된,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없는 가장 독특한 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유동성과 모든 가능성에 개방되어 있다는 말을 법화에서는 <교철원융(交轍圓融)>이라고 합니다. 인드라망처럼 두루 원만하게 상호 연관지어져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연관 지여짐이란 서로가 주고 받아드림이 두루 하다는 의미입니다. 간단히 현대적으로 표현한다면 <포용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포용력의 원동력을 대변하는 말이 바로 <까르마>에 대한 교설이 됩니다. 까르마란 우리들이 소위 말하는 <업(業)>이라고 말하는 그것입니다.
이 까르마의 교설에서부터 <공(空)>, <보리심(菩提心)> 그리고 화엄경에서 말하는 <법계(法界)>의 가르침까지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까르마>는 말 그대로 행위를 의미하지만, 그것은 또한 비밀스럽게 작용하는 <영향력> 즉 <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한 행위는 늘 어떤 영향력을 낳고, 그 영향력은 그 이상의 행위를 낳기 때문에 까르마는 본질적으로 윤회의 수레바퀴 속으로 밀어 넣는 영향력과 행위 사이에서 얽히고설킨 상호작용의 원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까르마>를 우주적인 척도에서 표현한다면 이 영향력과 행위라는 혼합체가 세계와 인생을 만들어 내는 엄청난 힘이 됩니다. 이를 중생의 윤리적 측면에서 표현한다면 그것은 자연적 보상과 보답을 분배하고, 도덕적 질서를 낳는 원동력이 되는 끊임없고 비인격적인 법칙이 됩니다. 익히 알고 있는 <삼세윤회>와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교설이 이를 대변합니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시간과 공간의 측면에서, 후자는 원인과 결과의 측면에서 고찰된 당연한 귀결에 불과합니다.
<까르마>를 또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특정집단의 집합적 행위에 의해 생겨나는 창조적 에너지이며, 그것은 이들 집단이 살고 있는 특정세계의 질서와 작용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교학에서 말하는 <공업(共業)>의 교설이 바로 이것입니다. 공업이란 말은 전쟁이나 재해와 같은 타의적으로 짓는 업이란 뜻입니다. 그 반대는 <불공업(不共業)>이 됩니다. 도둑질이나 살생 등과 같은 자의적으로 짓는 업을 말합니다.
그럼으로 불교교리를 총체적으로 본다면 아비달마에서 화엄에 이르기까지 결국 까르마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카르마는 인간의 이해를 벗어나는 신비이며 경이롭기 짝이 없는 심오한 교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까르마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죄의식입니다.
그런데 <천수경>의 십악참회에 나오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의 자성(본질)은 본래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난 것이요,
그 마음이 사라지면 죄업 또한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아함경을 비롯하여 중론 등에서 강조하는
“업(행위)은 있지만 업인(행위자)은 없다.” 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죄라는 것은 본래 본질이 없는 데 사람들이 사람들의 어리석은 마음으로 이것을 죄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죄라는 것이 있게 됩니다.
그럼으로 그 죄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을 놓아버리면 죄라는 것은 본래 본질이 없는 것이어서 아침 햇살에 이슬이 녹듯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무명으로 인하여 일어난 마음은 깨달음으로서 벗어나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중생의 존재를 설명하는 12연기법에서 생(生)노사(老死)의 시작이 무명(無明)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바로 이를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명을 깨치면 생노사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바로 12연기법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다는 것은 곧 까르마를 짓는 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어떠한 까르마도 그 자성은 없는 것이기에 그 마음을 놓으면 까르마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놓는다는 말은 어리석음의 집착을 놓는다는 의미가 되며, 집착을 놓아버린 마음은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그것이 곧 해탈이요, 자각이 됩니다.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으로 쌓인 육식(六識)의 모든 것을 놓는 것, 그것이 바로 자각이요, 해탈이라는 말입니다. 조사님들의 말을 빌리자면 <방하착(放下着)>이 됩니다. 모든 경계를 놓아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자라면 모두들 익히 알고 있는 말이 무명(無明)과 열반(涅槃)입니다.
그런데 그 무명은 시작을 알 수 없지만 그 끝은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으면 무명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반은 그 시작을 알 수 있지만 그 끝은 없습니다.
무명의 끝이 곧 열반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2연기에서 이르듯 무명에서 시작된 중생은 그 시작을 알 수 없습니다. 중생은 업을 짓고, 윤회하면서 또 다른 업을 짓지만 중생도, 중생이 짓은 업도, 그 처음 시작은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업과 업인의 문제, 이는 시작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창조자이신 <신(神)>이란 말 대신에 <무시이래(無始以來)>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 시작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창조자가 있다면 그 시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을 알 수 있으면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바이블>의 창세기에서 보듯 중생의 시작은 아담과 이브로 분명해 집니다. 이브에게 무화과 나무열매를 따먹으라고 유혹하는 뱀의 소리와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처럼 선악의 문제가 분명해 집니다.
그러나 창조자가 없으면 그 시작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시작을 알 수 없기에 논리적으로 그 어떤 해답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중생의 시작도 알 수 없고, 선악을 구분할 수 도 없고, 생(牲)과 사(死)를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 시작을 접어두고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현재에 태어난 인간을 중심으로 막연한 과거와 막연한 미래를 정하여 전개한 것이 <삼세양중인과설>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윤회에 대한 업의 탐구가 된 것입니다. 쉽게 풀이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의 업으로 윤회하는 인과의 도리를 밝히는 것이 바로 <삼세양중인과설>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12연기법에서 보듯 연기법을 통하여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이고, 둘째는 무아인 <나>의 삶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종교적 배려가 깔려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행을 강조하고, 악행을 멀리하라는 교훈 즉 불교윤리라 할 수 있는 <범행(梵行)>의 이론적 배경이 성립하게 된 이유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윤리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서 어리석은 중생들의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을 막기 위한 종교적 의무로서 그 기능을 여기에 깔고 있습니다. 왜 이런 결론을 내리느냐 하면 무명의 그 시작은 알 수 없지만 그 끝은 알 수 있기에 이러한 논리적 배경을 윤리도덕으로 승화시켜 놓은 것입니다. 열반의 시작이 무명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무명의 끝이란 곧 자각을 의미합니다. 깨달음이란 곧 자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선행을 통하여 이기심을 버리게 하고, 보시하는 마음을 통하여 탐욕을 없애고, 자비심으로 하여금 생명의 가치 즉 존재의 가치를 느끼게 함으로써 마음의 인식체계를 바꾸는 것 그것이 곧 자각인 것입니다. 좀더 깊이 말하자면 육경과 육근을 통하여 쌓인 바깥경계로 얻은 지식(knowledge)과 시간을 통하여 쌓여진 모든 지혜(wisdom)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 벗어남이 곧 집착을 벗어나는 것이요, 그 길이 반야(prajina)요, 그 답이 해탈이 됩니다. 그것은 시공간을 벗어나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이름을 반야(般若)라 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각이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악업이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행위와 행위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탐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행위>와 <행위자>의 문제는 곧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를 둘로 쪼개어 본 것이 <명색(名色)>이요, 5개로 쪼개어 본 것이 <오음(五陰)>이 됩니다. 양파의 껍질을 벗겨 보는 것은 그 씨앗이 무엇인지 찾고자 함이듯이, 인간 존재를 그렇게 쪼개어 보는 근본 이유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자 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파의 씨앗이 없듯이 쪼개고 또 쪼개어 100가지(유식의 5위100법)로 쪼개어 보았지만 그 존재는 드러난 것이 없습니다. 육체는 지수화풍의 4대가 모인 것이니 공한 것이요, 마음이란 오음이 모인 것이라 또한 공한 것입니다. 오온의 주인이 없으니 나그네와 같은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란 그 존재의 본질을 찾을 수 없기에 그 행위인 악업의 본질도 마찬가지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악업은 본질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업이란 것은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가 만들어 낸 명목상의 행위규정 내지 규범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행이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행의 본질은 없습니다.
그것도 단지 사회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윤리도덕이란 이름으로 그 가치관을 세워 사람들을 그 틀 안으로 묶기 위한 사회적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이 말은 궁극적으로 그 본질에 대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행위와 행위자의 가치관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본질적인, 궁극적인 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의 본질을 말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부언하자면 사회는 인격을 주장하고 있지만 불교의 교리는,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되는 그 자각이란 오로지 인격(人格)이 아니라 자각(自覺)임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간과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 자각이란 것은 바로 까르마에 대한 자각인 것입니다.
다소 뉘앙스는 다르지만 이를 화엄에서 말하는 법계의 원리로 비추어 보아도 같습니다. 다소 의아하게 들리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현실 자체를 정확히 살펴보면 사물의 궁극적 본성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물은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합니다.
만유의 그 처음의 순수성을, 그 완벽성을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고 해도 타락하지 않고, 그것을 인식한다고 해서 개선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지식들은 말합니다.
[모든 것은 진실이지만 단지 중생들의 마음만이 거짓이다.] 이라고.
단적으로 말한다면 이는 곧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지식 내지 알음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 미추, 생멸 등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들이 잘못된 인식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까르마의 원리를 우리의 인식으로, 중생이란 존재의 가치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있는 것이고, 고통이 있기에 그 고통이 한(恨)을 남기고, 한이 윤회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존재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로 다시 넘어간 것이 바로 <불성(佛性)>이란 것에 탐구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함경에서는 말하는 <무아(無我)>가 <불성>으로 바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인간 존재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로 그 시야가 넘어간 것이 바로 법계(法界)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바탕도 까르마의 연장선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까르마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교 교리를 전부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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