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4. 6. 00:11ㆍ야단법석
주인공을 찾아가는 길(2)
마음의 뿌리를 끊는다는 것은 <지켜보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욕망이 요동하는 사념의 덩어리가 일어나고 멸하는 것을 주시(注視)하는 것이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자가 되어 이를 보는 것이다.
만약 여기 움직이는 사념에 동화(同化)된다면 이는 다시 미혹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안에서 일어나는 갈애의 욕구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양 <보는 자> 가 되는 그것이 바로 <주시자>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욕망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 잎을 따내려 하지 말라.
분노, 시기, 질투, 성 이들을 괴롭히지 말라.
이것들을 귀찮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뿌리를 발견하라. 뿌리를 자르면 된다.
뿌리를 잘라 버리면 잎과 가지들은 저절로 말라 버린다.
무엇이 뿌리인가?
동일화(同一化)가 뿌리다. 이 밖의 모든 것들은 잎에 해당한다.
시기, 질투와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 분노와 성(性)과 하나가 되는 것이 뿌리다. 기억하라. 탐욕, 성, 명상조차도 거기 동화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뿌리가 된다. 사랑, 해탈, 신(神)과 동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동일화라는 점에서는 분노, 시기, 탐욕, 성과 다를 바 없다.
동화한다는 것은 가치부여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뿌리인 것이다.
나머지 모든 것들은 잎에 해당한다.
잎을 잘라 내지 말라. 잎들은 그대로 두라. 잎 그 자체는 아무 잘못이 없다. <심신명>에서도
『지극한 도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다.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두지 않으면 된다.』
고 했다.
미움도 사랑도 동전의 앞뒤와 같고, 선(善)과 악(惡)이란 것도 동전의 앞뒤와 같기 때문이다. 이는 뿌리가 아니라 단지 잎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탐욕이 일어나면 탐욕을 주시하라.
애욕이 일면 애욕을, 분노가 일면 그 분노를, 미움이 일면 시기하는 마음을, 남의 것을 탐하는 마음이 일면 그 소유욕을 주시하라.
그러나 여기 한 가지만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그들을 주시하되 결코 동화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는 관객처럼 그대 마음의 관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드라마도 거기에는 악인이 나오고 선한 자도 나온다.
그대 마음에도 드라마와 같이 때로는 악한 생각도, 때로는 선한 생각도 일어난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배우가 아니다. 단지 구경하는 관객일 뿐이다. 그저 주시만 하라. 처음에는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수행하게 되면 점점 <지켜보는 것>은 성장한다.
그대는 마침내 탐욕의 모든 뉘앙스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미묘하다.
에고의 기능이 얼마나 미묘한 가를 이제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에고의 기능은 매우 미묘하고 깊게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마음의 눈은 더 밝아지게 된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게 되면 더욱 깊이 투시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행위 하는 자>와 <지켜보는 자> 사이의 거리가 생길 것이다.
이 거리가 내 마음의 주인공을 찾는 길이다.
거리가 없으면 식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물과 맞붙어 버리면 사물을 볼 수 없다.
거울과 맞붙어 서 버리면 거울에 비췬 그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눈이 거울에 붙어 있다면 어떻게 보는 것이 가능한가?
거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 <지켜보는 자>를 제외하고는 거리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마음에 거리를 두고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주인공을 찾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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