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2006. 3. 23. 23:29야단법석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선어(禪語)에 이른 말이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선을 공부하기 전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선을 공부하는 중에는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니다. 그러나 선에 대한 공부가 완성 될 때에는 산은 다시 산이고, 물은 다시 물이다.


어떤 제자가 선사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선사가 말했다.

『첫번째 상태와 마지막 상태는 서로 같다는 뜻이다. 오직 그 중간에서만 혼란이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산은 산이었고 물은 물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도 산은 다시 산이 된다.

그러나 그 중간에서는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모든 것이 안개에 가린 듯이 혼란스러워 진다. 혼란과 카오스는 오직 중간에서만 존재한다. 잠자는 의식의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있어야 하는 그대로 있으며, 삼매에서도 또다시 모든 것이 있어야 하는 그대로 있다. 문제는 그 둘 사이에 있는 혼란된 상태다. 그것이 세상이며, 마음이며, 에고이며, 모든 슬픔과 고통과 갈등의 혼란상태가 된다.』


선사가 이렇게 설명하자 제자는 만면의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평범한 사람과 깨달은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겠군요.』

선사가 대답했다.

『옳은 말이다. 그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단지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깨달은 사람은 땅으로부터 여섯 치(寸)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여섯 치가 모든 차이점을 만든다. 그것은 부처를 돌에다 새긴 의미와 같다. 돌은 무심(無心)하다. 깨달은 자도 무심하고 깨닫지 못한 자도 무심하다. 본래 성품이 같다. 그리고 둘다 마음이 없다는 점에서는 같다. 깨달은 자는 마음 저편(초월)에 있고 깨닫지 못한 자는 마음을 아래 있기 때문이다.

부처는 beyond mind이고, 중생은 below mind이기 때문이다.


왜 깨달은 사람은 땅으로부터 여섯 치 떨어져 있는가?

그는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또한 세상 속에 살고 있지 않다. 그는 먹지만 먹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행위자가 아니라 단지 행동할 뿐이다. 그는 관조자로서 남는다. 주인공으로 남는다. 육신이 아플 때에도 그 아픔을 알고 있지만 아픔 속에 있지 않다. 죽을 때에도 죽음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죽지 않고 있다. 자고 있을 때에도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다. 바로 그것이 차이점이다. 깨달은 자는 이 육신에도, 이 마음에 머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완전한 지혜를 <반야(般若)>라 한다.

반야는 완전한 자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환희이며, 끝도 없고, 시간관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다.

반야라는 것은 전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전체>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또한 단절(斷絶)된 것도 아니다.

지식은 불리와 단절을 가져온다.

그러나 <전체>는 통합과 조화를 가져온다.

<전체>는 어떤 인격을 가지지 않는다.

그럼으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산은 산의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산이요,

물은 물의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물인 것이다.

그러나 지식이 들어 올 때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니다.


<금강경>의 법신 비상분에 이런 말이 있다.

『만약 형상(색)으로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邪道)를 행하는 자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


한번 생각해 보라.

만약 부처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고속버스 터미날에 앉아 있다면,

그대가 그 부처를 알아보겠는가?


 

 

'야단법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리자의 전생이야기  (0) 2006.03.26
진지함과 심각함  (0) 2006.03.25
마음의 여유  (0) 2006.03.22
하심(下心)  (0) 2006.03.14
공의 의미  (0) 2006.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