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심(下心)

2006. 3. 14. 23:52야단법석

 

 

하심(下心)


<육조단경> 「기연품」에 이른 이야기가 있다.

일곱 살에 출가하여 법화경을 줄줄 외우는 홍주(洪洲)사람 법달(法達)이라는 이가 있었다. 일곱 살에 출가하여 항상 법화경을 읽기 시작했으니 보통 신동이 아니었든 모양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최고의 지식인인 셈이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혜능조사에게 와서 절하는 데 건성으로 인사를 하자 조사가 꾸짖어 말했다.

『그렇게 머리 숙이기가 싫으면 무엇 때문에 절을 하느냐. 네 마음속에 필시 무엇이 하나 들어 있는 모양인데 무엇을 익혔느냐?』

법달이 대답했다.

『법화경을 외우기 이미 삼천 독에 이르렀습니다.』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공부할 만큼은 했다는 것이다. 이에 조사가 말하기를,

『네가 설사 만 독을 하여 경 뜻을 통달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면 도리어 허물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구나. 내 게송을 들어 보아라』


     『 절이란 본래 아만을 꺾는 것,

      어째서 머리가 땅에 닿지 않는가.

      <나>라는 게 있으면 허물이 생기고

      제 공덕이 있으면 복이 한량없는 것을.』

 

사찰에 와서도 부처님께 합장하고 절하는 것을 기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왜 절을 하지 않는가? <나>라는 아만(我慢)으로 꽉 차있기 때문이다. 아만이란 무엇인가? 에고다. 내 마음에 모신 손님이다. 그런데 그 손님이 내 주인 행사를 하는 것이다. 손님은 왔다가 언제가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손님이 주인행세를 하는 것은 마치 도둑이 집안에서 주인인척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주인이 하인을 두듯 에고는 지식을 하인으로 둔다. 그래서 에고는 자기에게 도전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지식을 통해서 배척한다. 하인이 많으면 주인은 저절로 높아진다. 함부로 주인을 상대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많은 하인들을 둔 주인은 괜히 거드름을 피우게 되고, 잔소리가 많아지고 얼굴에는 심각한 표정을 짓게 된다. 마찬가지로 에고가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면 아만이 커지고, 교만이 커진다. 그래서 주인이 하인을 시켜 손님이나 거지를 내쫓듯 에고는 지식을 이용하여 나 이외의 모든 것을 배척하게 만든다. 종교를 배척하고, 무지를 비난하고, 의례절차 등은 모두 미신(迷信)으로 몰아 부치거나 부정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하버드나 옥스퍼드 출신의 무슨 석학이라면 두 눈을 부릅뜨고 쫓아다닌다. 마치 도둑은 도둑끼리 단합이 잘 되듯 지식은 지식을 찾아 그렇게 뭉쳐간다.


도둑이 주인을 두려워하듯, 거짓이 진실을 두려워하듯, 지식은 지식 이외의 모든 것을 배척하고 또 두려워한다. 그래서 신앙이니, 문화니, 자각이니 하는 것들을 받아 드리지 않게 된다. 지식은 논리적이고 객관적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신앙이나 문화, 자각은 논리적인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지식은 이를 배척하고 거부하게 된다. 특히 종교적인 것에는 더 부정적이고 더 극렬하다. 그래서 그들은 신에 경배하는 의식이나, 참선과 같은 명상수련은 달갑지 않게 여기고 또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지식은 머리에서 나오고 자비와 겸손은 가슴에서 나온다. 머리에서 나오는 것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베지만 감쌀 줄은 모른다. 가슴에서 나오는 것은 날카롭지는 않지만 감싸고 거두어들인다. 그래서 머리는 배품에는 인색하고, 가슴은 관용과 자비에 강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인류의 영원한 진리를 밝히신 성인의 화상 앞에서도 경의를 표하는 데는 인색하게 된다. 그것이 지식의 본성이요, 에고의 실체다. 마음에 이런 손님이 없다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교만한 마음이 없다면 누구에게도 굽힐 수 있다. 부정하는 마음이 없으면 누구에게도 경의를 표할 수 있다. 진정한 주인은 겸손하고 자기를 낮춘다. 그래서 모든 이의 친구가 되고, 하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하심(下心)이 생긴다. 스스로 겸손해 해 지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바라듯, 에고는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많은 자식을 둔 어머니는 든든한 마음을 가지듯 많은 지식을 가진 에고는 더 강한 에고를 가지게 된다. 하루라도 지식을 쌓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이곳저곳에서 지식을 끌어 모은다. 그래서 아만(我慢)은 살찌고 더 큰 교만을 몰고 온다. 마치 산 위에서 눈 덩이가 굴러 내리듯.


에고란 자아의식이다. 나에 집착하는 마음이다. 자식이 없는 어머니는 외롭고 처량하다. 에고도 지식 없으면 자신을 외롭게 생각하고 위축이 된다. 그러나 많은 자식들이 있으면 그 어머니가 행복을 느끼듯, 많은 지식은 에고에게 교만과 아만의 날개를 더 많이 달아 준다. 그래서 지식은 에고의 자식이라고 한다.

 

지식이란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분리하고, 쪼개고, 모든 것을 소유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소유의 대상은 물건이다. 그것은 생명이 없는 죽은 것이다. 그럼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은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지식이다. 그럼으로 지식이 더하면 더 할수록 전체는 분리되고 쪼개어지고 살아 있는 것은 죽은 물건으로 바뀌어 진다. 지식인들이 종교와는 거리를 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연유한다. 철학자들이 냉엄한 것도 그래서 그렇다.


죽은 것은 향기가 없다. 죽은 꽃은 향기가 없듯, 죽은 지식은 향기를 낼 수 없다. 그래서 지식인들의 머리는 칼날처럼 예리하지만 사람의 향기를 낼 수가 없다. 

 

그럼으로 지식이란 어름 덩어리와 같다고 한다. 차면 찰수록 더 엉겨 붙어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것이 어름이다. 지식은 그래서 어름과 같다.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간다. 냉동실에 간직한 꽃 모양 모든 아름다움도, 향기도 얼어 붙어버린다. 그런 지식은 대리석과도 같아서 매끄럽고 보기는 좋지만 차갑고, 생명이 없다.

 

 

그 얼음을 만드는 주인이 바로 <에고>다. 얼음 보다 더 차가운 것이 에고다. 그럼으로 이를 녹일 수 있는 열기가 필요하다. 강한 열이 아니라 부드러운 열기가 필요하다. 에고는 항상 강한 것에 반발하기 때문이다. 그 열기가 바로 하심이다. 교만심에 대한 겸손이요, 부정에 대한 긍정이요, 주인에 대한 충실한 하인의 마음이다. 겸손은 강한 것에 대한 부드러움이다. 긍정은 내세우지 않는 부드러움이다. 하인은 절대로 거부하지 않는다. 그것이 에고를 녹이는 열기가 된다. 강하지 않으면서 강한 것을 녹이는 열기다.

 

그 하심은 강렬한 열기는 아니지만 봄날 어름을 녹이듯 부드럽게 에고를 녹인다. 에고는 강한 것에 대해서는 반발하기 때문에 부드러운 것으로 녹여야 한다. 그래서 하심은 항상 부드럽게 에고에 접근할 수 있다. 한 부분, 한 부분을 녹여 가는 것이 하심이다. 그래서 차가운 지식을 지혜로 변모시킨다. 무거운 지식을 지닌 머리에서 따뜻한 가슴으로 내려오게 만든다. 그래서 조화롭게 만든다. 불신과 미움, 그리고 의혹을 믿음과 사랑과 헌신으로 접근하여 얼음에 갇힌 에고를 녹인다. 그래서 진리의 길로 인도한다. 그래서 하심은 귀명(歸命)의 길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하심이 곧 부처의 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겸손함이요, 믿음이요, 신뢰요,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고를 녹여 참된 나를 발견하게 만든다.

 

부처가 말한 무아(無我)의 도리도, 무아소(無我所)의 도리도 곧 하심으로 가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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