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경대와 법의 여신 디케의 천칭의 소고(小考)
2025. 6. 7. 11:08ㆍ경전과교리해설
업경대와 법의 여신 디케의 천칭의 소고(小考)
사람은 살다 보면 고의적이든 과실이든
선(善)한 일도 짓고, 악한 일도 짓는다.
따라서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그 행위에 대한 과보(果報)가 따른다.
착한 일은 칭찬을 하지만, 악한 일은 그 죄를 묻게 된다.
그런데 그 죄의 경중(輕重)은 누가 판단하는가.
생자(生者)라면 법관(法官)이나 판사(判事)가 하고,
사자(死者)에 대해서는 불교나 민속 종교에서는
명부(冥府)의 판관인 시왕(十王)이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사후의 심판과 징벌을 관장했다는
지하 세계의 왕 하데스(hades)가 있지만
심판관으로는 참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기독교의 이스라엘 역사에도 판관이란 것이 있었다.
일종의 통치자로서 구원자로 알려진 사람들이다.
지금의 기독교는 어떤가?
교황과 대주교가 판관인가? 아니면 신의 섭리(攝理)인가?
법계사 극락전
실정법의 사회에서는 판사와 법관이 한다.
판사(判事)와 법관은 정해진 법률과
행위의 사실(事實)에 근거하여 판단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를 사실로 인정하느냐는
오로지 법관과 판사의 주관적인 판단에 달려 있다.
또한 판단의 기준이 법이므로 죄의 유무는
법에 규정된 바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도
죄가 성립되기도 하고 성립되지 않기도 한다.
대흥사 업경대
또한 죄가 인정되어도 그 결과에 대한 처벌도 문제가 된다.
죄는 있지만 공소시효가 만료되면 죄를 물을 수도 없다.
흥미로운 것은 서양의 무기징역에 대한 판결이다.
사람의 수명이 100년을 넘기기도 힘든데 가중 처벌되어
150년 200년을 내리는 나라도 있다.
판결은 내렸지만, 감옥에서 못다한 남은 형기를
죽어서 어디에 가서 받으라는 명시는 없다.
판단의 근거는 객관적인 사실보다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팔공산 은해사 업경대
법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말하는 법이란 신뢰하고 지켜져야 할
당연한 것이지만 입법부의 가결 한 번에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또한 법이다.
그렇게 보면 법이란 불완전한 인간들이 최대한의 노력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방편이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법으로는 인간의 보편적 상식과
사회의 정의에 대한 관념까지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자나 종교가들이 실정법상의 죄(crime)와
도덕에서 죄(sin)를 구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법에 따른 처벌도 또한 문제가 따른다.
재력과 권력을 이용하여 법망을 피해 가는 자는
법으로 처벌할 방법이 없다. 또한
생전(生前)에 짓고 그 행위자가 살아 있다면 문제가 없으나
생전에 지었지만, 사후에 드러나면 그 또한
그 행위자를 어떻게 처벌할 방법이 없다.
옛적에는 부관참시(剖棺斬屍)도 있었지만,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
그래서 선악의 처벌 문제는
종국에 종교적인 처벌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무등산 증심사 지장전
먼저 불교의 입장을 보자.
불교는 선악의 모든 행위를 업(業)으로 명명하지만,
어느 경전에도 처벌의 규정은 행위 별로 따로 명시된 것은 없다.
교리상 선악은 말하지만, 그 경계는 불분명하다.
심지어 대승의 교리하에서는 그 자체까지를 부정한다.
처벌의 규정 또한 극락과 지옥으로 명명할 뿐이다.
이는 종교적인 문제로 실정법상의 처벌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극락도 다양하고 지옥 또한 8대 지옥, 10대 지옥 등 다양하고
또 어떤 죄가 어떤 지옥에 가는지에 대한 뚜렷한 규정도 없다.
무등산 증심사 지장전
잠시 이를 차치하고 먼저 과보를 받는 시기를 보자.
업(業)을 짓고 받는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를 3가지로 분류한다.
1)순현수업(順現受業): 선악의 업을 짓고 태어나서 바로 받는 것
2)순선수업(順先受業): 1세(世)를 지나서 받는 것
3)순수수업(順受受業): 2세(世) 이상을 지나서 받는 것
그런데 문제는 생전에 지은 선악업을
사후에는 어떻게 판단하느냐 하는 문제다.
《시왕경(十王經)》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부터 49일 되는 날까지
7일째마다 차례로 7번 시왕(十王) 앞에 나아가
생전에 지은 죄업의 경중과 선행 ·악행을 심판받는다고 한다.
시왕(十王)이란 사자(死者)에 대한 죄의 경중(輕重)을 다루는
명부(冥府)를 관리하는 10명의 대왕을 말한다.
이들이 사후 죽은 자들을 죄업을 판단하는 판관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염라대왕은 저승 자체의 군주와
시왕 직을 겸업하고 있으며, 10개의 지옥 중에서도
제5 지옥인 발설지옥(拔舌地獄)의 판관이다.
파주 검단사 업경대
시왕들은 생전(生前)에 지은 선악업을 판단하는 척도는
업경대(業鏡臺)의 영상에 의한다.
업경대는 저승의 입구에 있다는 거울로, 명부를 지나는 이의
生前의 착한 일, 나쁜 일을 여실히 비춘다고 하는 거울이다.
화엄에서는 명경대(明鏡臺)라 부른다.
예천 용문사 업경대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시왕이 내린 판결은
합의체에 의한 통일된 것이 아니고
그 처벌 또한 시왕 별로 다르다는 것이다.
죄인들은 한 죄목으로 지옥에 떨어지면
당분간 거기서 벌을 받은 뒤
다음 판관에게로 가서 다른 죄목을 심판받는다고 한다.
명부(冥府)의 판결은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도 없고
대법원의 판결과 같이 최종심도 없는 것이
명부를 다스리는 시왕들의 판결이라는 것이다.
보탑사 업경대
서양에서는 선악의 중요한 판단기준은 법 이전에
정의(正義: justice)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말하는 죄를 규정하는 선악의 기준과
서양에서는 말하는 정의의 개념은 차이가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구 문화의 기저에 깔린
기독교적 세계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교리는 신에게는
신의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는 인간들은 알기 어렵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신의 섭리(攝理)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완전한 인간들이 최대한의 노력으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만든 도구가 법이란 것이다.
정의를 의미하는 영어 <Justice>의 의미만 보드라도
법 집행, 재판이라는 의미는 있어도
'법'이 무엇이라는 의미가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정의(正義)의 한자를 보자. 정(正)은 바르다는 의미다.
正은 “一”과 “止”의 합자다. 하나로 끝난다는 의미다.
바르다는 것은 오로지 하나이지 둘이 될 수 없다는 의미다.
'의(義)'는 '양(羊)'과 나를 의미하는 '아(我)',
두 글자를 합쳐서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양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바치던 제물을 말한다.
그래서 이 글자는 하늘에 제를 올리는 의식을 치르면서
하늘과 내가 일치되는 경건한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의'는 하늘의 뜻과 일치하는 올바른 가치관을 의미한다.
“하늘의 뜻”이란 곧 동양의 관점에서 보면 “도(道)”가 되고
서양의 관점에서 보면 “신의 섭리(攝理)”라 할 수 있다.
법의 여신 디케
그리스 신화에서 법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조상(彫像)이 있다.
천칭(天秤)을 들고 있는 디케(Dike)의 조상(彫像)이다.
법의 여신이라 불리는 디케(Dik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법(法)과 정의(正義)를 상징하는 여신이다.
로마 신화에서는 '유스티티아(Justitia)'라 부른다.
동화사 나라연금강과 황수금강역사
여신 디케는 헝겊으로 눈을 가린 채 한 손에 칼이나 법전(法典),
다른 한 손에는 저울을 든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저울을 “천칭(天秤)”이라 하는데
양쪽에 동일한 접시를 올려놓고
그 접시 위에 똑같은 물체를 얹어 균형을 잡아
물체의 무게를 측정하는 기구이다.
동화사 백정사금강과 밀적금강
눈을 헝겊으로 가린 이유는
인간 세상에서 재판할 때 치우침 없이
객관적으로 판결을 내린다는 의미다.
칼이나 법전을 들고 있는 것은
법(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해석해
집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저울은 옳고 그름을 가르는데 편견을 버리고,
공평해야 함을 강조하는 법과 정의의 잣대를 상징한 것이다.
청양 정혜사 현왕도
명부(冥府)의 업경대와 법의 여신이 들고 있는
천칭(天秤)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를 살펴보자.
평등과 힘을 상징한 것은 동일하다.
그런데 법의 여신 디케는 헝겊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
눈을 가리면 볼 수가 없다.
편견이나 형평의 문제도 사실을 보아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편견 없이 보려면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는
“제3의 눈”이 필요하다.
그 제3의 눈은 인간의 눈이 아니라 신의 눈이다.
신은 하느님을 의미한다.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최고의 지혜를 가진 절대자가 하느님이라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판단의 근거는
신의 섭리에 따른다는 의미가 된다.
천칭(天秤)은 공정과 공평을 상징하지만
현실에서 중생의 삶은 “만인(萬人)대 만인의 투쟁”이라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난해한 문제는 재판에서 합의체를 통하듯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천 용문사 업경대
그런데 업경대는 전생의 행위를 보여 줄뿐
모든 판단은 명부의 판관에게 맡기고 있다.
신의 섭리와 같은 그런 의미는 전혀 볼 수가 없다.
법은 여신 디케가 들고 있는 것은 법전과 칼이다.
모든 죄의 유무는 오로지 법전에 따른다는 것이다.
뒤집어 보면 법전에 없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영국 속담에 “법이 있으니 빠져나간다.”라는 말이
이를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칼은 힘의 상징이다. 힘이 없는 법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천칭은 좌우 접시의 수평을 기준으로 양과 무게를 판단하는 도구다.
천칭은 단지 무게만 알 수 있고
물건의 유형과 그 부피와 색상 맛 등은 알 수 없다.
또 저울의 좌우 중심점 설정도 문제다,
편견 없는 공정과 공평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그 기준이 모호하다. 모양과 색깔, 맛과 기호를 무시하고
100g의 사과와 100g의 배가 무게가 같다고 해서
동일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공정하고 공평한 것은 아니다.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것은
마치 막대기 자로 둥근 사과의 크기를 재는 것과 같고,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판단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파주 보광사 지장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법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법(法) 자의 자원(字源)에서 알 수 있듯
법의 원래 글자는 '灋' 다. 여기서 물을 뜻하는 수(氵)변과
갈 거(去)만을 두고 해태 치(廌)자를 생략해 버려 “法”자가 되었다.
해태는 시비(是非)선악을 판별하는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자원(字源)으로 보면 수(氵=水)는 평등과 자유를 의미하고,
거(去)는 힘을 상징한다. 원래의 '법' 자에서 치(廌)자를
생략해 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법은 지혜가 빠진
평등과 자유, 힘에만 의존하고 있는 꼴이 된 것이다.
디케의 조상에서 보이는 칼과 법전, 천칭만 강조된 것이다.
옛 철학자의 견해를 보자.
플라톤은 정의의 본질을 '조화(Harmony)'로 파악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평등(Equivalence)'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여기에 지혜가 빠져버리면
조화도 평등도 모두 허망한 것이 된다.
선악의 문제는 조화와 평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도 “도덕적 기운은 상대적”이라고 한 것이다.
법도 마찬가지다. 법전에 명시된 법규가 있지만
해석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 적용의 평등, 법의 집행,
법의 절차가 아무리 공정하다고 해도
여기에 지혜가 빠져버리면 권력자(판사)의 힘에 의한
주관적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左之右之)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식이 아무리 정의로워도 그 결과는
상대적인 소리에 불과한 공염불이 되는 것이다.
'법'(法) 자의 자원으로만 보면 법의 여신 디케가 들고 있는
법전과 칼이 상징하는 의미와 대등(對等) 소이(小異) 한 것이다.
법의 여신 디케가 눈을 가리고 본다는 “제3의 눈”을 신의 섭리라 했다.
이 신의 섭리가 바로 곧 지혜를 의미한다.
신의 섭리란 불교적으로 말하면 무위법(無爲法)의 지혜이고,
초세간적(超世間的)인 법의 지혜이다.
중생들의 세계를 관장하는 법을
불교에서는 유위법(有爲法)이라 한다.
이를 벗어난 법이 초세간법이고 무위법(無爲法)이다.
유위법은 말의 세계다.
이름은 있고 실체가 없으면 우리는 이를 허구라고 한다.
형평과 공정이란 이름만 있을 뿐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형평과 공정이란 단지 말의 유희에 불과한 것이다.
유위법에서는 선악이 있고, 천당과 지옥이 있지만
무위법에서는 선악도 없고 천당과 지옥도 없다.
명부의 업경대와 법의 여신 디케가 들고 있는
천칭이 주는 공통적인 의미는 지혜다.
칼과 법전을 따르고 천징으로 판단하기에 앞서 그 근저에
신의 섭리 지혜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업경대는 죄의 응보가 무거움을 나열하면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 일차적인 암시고
그다음에는 지혜로서 선악으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거울은 선(善)한 자도 악(惡)한 자도 구별하지 않고,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가리지 않고 비춘다.
그래서 업경대란 거울을 방편으로 이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업경대와 법의 여신 디케의 조상(彫像)도 지도일 뿐이다.
그대의 영토는 말길이 끊어진 신의 섭리요, 반야(般若)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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