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파타루나무와 오욕락
2025. 5. 7. 11:47ㆍ경전과교리해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 절대 요소를 말한다면
의식주(衣食住)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속성이
이러한 필수적인 의식주에 만족하지 못하고
동물적 본능적인 욕구에 더하여
쾌락이라는 욕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 욕망을 불교는 다섯 가지로 대별하니
이를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한다.
오욕락은 불교 우주관에서 보면
3계(욕계, 색계, 무색계) 중 욕계(欲界)에 속하며.
재물욕(財物欲), 색욕(色欲), 식욕(食欲),
명예욕(名譽欲), 수면욕(睡眠欲)을 말한다.
욕(欲)이란 범어로 카메(kāma)라 하는데
이는 곧 욕계(欲界)의 욕(欲)이란 의미다.
욕계의 오욕(五欲)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식욕(食欲)과 성욕(性欲)이라고 할 수 있다.
식욕은 생존의 욕구와 긴밀히 관련된 것이고
성욕은 종족 보존의 욕구 즉 번식욕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쾌락이라는 관점에서는 식도락과 성적 쾌락이
욕계의 쾌락 중 가장 지배적인 쾌락이며,
또한 욕계에 속박된 중생(인간과 동물 등)이
가장 널리 추구하고 탐닉하는 쾌락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이 천지창조를 하시고 5일 동안
날짐승 들짐승 등 일체 만물을 짓고
이상향이라 할 수 있는 에덴동산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 에덴동산을 다스리라고
6일째 되던 날 주인을 두었으니, 그가 바로 아담이다.
그러나 아담은 모든 것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의 주인이지만 공허함과
무료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가 보다.
그래서 하느님이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어
배필로 삼게 해 주었으니, 그가 바로 이브다.
의식주(衣食住)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이 모든 것을 베풀어 주었지만
그것만으로 아담이 행복하지 못했기에
색(色)을 베푼 것이라 볼 수 있다.
오욕락으로 비추어 보면 에덴동산은 재물에 해당한다.
남자인 아담은 재물보다 더 절실한 그 무엇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바로 색욕인 것이다. 이브가 생긴 후 아담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브의 유혹에 지식의 열매라는 무화과를 따 먹게 되고,
지식이 생기자 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다고 한다.
재욕은 유혹을 낳고 유혹이 색욕을 잉태하고 색욕은
결국 재앙을 잉태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이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라고 한다.
재물욕과 색욕의 관계를 일상의 삶에서 한번 살펴보자.
형사범을 다루는 수사관들은 흔히
“ 범죄 뒤에 여자가 있다.”라는 말을 한다.
사람은 재물이 많으면 색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기 때문에
여인을 추적하면 범인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재물 뒤에 색욕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또 우리 속담에
“여자는 돈이 많으면 혼자 살 수 있지만
남자는 돈이 많아도 혼자 살 수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남자가 재물욕이 충족되면 그다음 갈망의 대상은
본능적으로 성적 욕망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욕망은 종족 보존이 아니라 오로지 쾌락을 위한 욕망인 것이다.
에덴동산의 주인인 아담이 무엇이 부족해서 다른 것을 찾았겠는가?
실없는 이야기 같지만 이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인도의 신화를 보면 깔파타루(kalpataru)라는 나무 이야기가 있다.
이 나무 아래에 앉아서 바라는 것을 생각만 하여도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신화를 지닌 나무다.
어느 나그네가 땡볕의 긴 들판을 지나
이 나무의 그늘 아래에 쉬고 있었다.
서면 앉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이 나그네도 긴 들판을 땡볕 속을 걸어왔기에
나무 그늘에 쉬면서 편안한 침대가 생각났던 모양이다.
그가 그 침대를 생각하자마자 홀연히 침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자 또 생각했다.
“이왕이면 아름다운 여자가 안마까지 해 주면 좋을 텐데” 하고.
그러자 정말 아름 여인이 나타났다.
나그네는 내친김에 “진수성찬”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정말 눈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이에 놀란 그는 걱정이 되었다.
“내가 아무리 편안하고 잘 먹고 여자가 있고 재물이 많더라고
혹 이 들판에 호랑이라도 나타나면 어쩌지?”
이렇게 생각하자 정말 호랑이가 나타나 그 나그네를 먹어 치워버렸다.
이 이야기는 암시하는 바가 많다.
구약의 창세기 이야기와 깔파타루나무 이야기를
기술된 순서대로 생각해 보면 상통하는 점이 많다.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창세기는 에덴동산은 재물을 상징하고
이브는 색을 상징한다.
재욕(財欲)이 충족되면 색욕(色欲)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느껴 자신을 돌아보았다는 의미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자를 우리가 철면피라 부르는 것은
자기 잘못을 뒤돌아볼 줄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깔파타루나무의 이야기는 침대로 시작한다.
이는 육신의 평안을 상징한다.
남자는 몸이 평안해지면 여자(색욕)가 생각나고,
식욕(食欲) 이 일어남을 암시하고 있다.
호랑이는 죽음을 상징한다.
욕망의 끝은 재앙을 불러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욕락을 일으키는 근본은 이 몸이 있기 때문이다.
무상한 이 몸을 영원한 실체인 양 생각하기 때문에
이로써 탐욕이 일어나는 것이다.
탐욕이 일어나는 것은
허망한 분별과 전도(顚倒)된 망상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고 생각하는 이 몸은 지수화풍의 사대가 모여
오온(五蘊)을 이룬 것이다. 실체가 없는 메아리 같은 것이다.
창세기에 하느님이 창조하신 아담은 무엇으로 지었는가? 흙이다.
그 흙으로 빚은 인간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상한 존재이다.
이브 또한 그 무상한 존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무상이다.
오욕락이란 메아리와 같다.
메아리는 실체가 없다. 빈 공간의 울림일 뿐이다.
인연을 따라 생겼다가 인연 따라 살아지는
구름과 같은 것이 오욕락의 실체다.
오욕락은 무엇인가?
마음의 유혹이다. 그 마음이란 다름 아닌 식(識)의 유혹이다.
분별하는 마음이다. 그 식(識)의 유혹은
어두운 마음에서 일어난다. 어두운 마음이란 곧 무명(無明) 이다.
이 허망한 육체가 무명(無明)에 가려
허망한 분별과 전도 망상을 빚어내는 그것이 바로 오욕락인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무명에 가린 마음도 내 마음이요,
허망한 분별과 전도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도 내 마음이다.
이 마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면
오욕락의 바람을 재울 수 없는 것이다.
본래 마음이란 공적한 것이다.
고요하고 비었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바로 분별이다.
<나>가 있으니 <너>가 있고, 남자가 있으니, 여자가 있고,
선이 있으니, 악이 있고, 사랑이 있으니 미움이 있는 것이다.
그림자가 물체를 따라 움직이듯 하나가 움직이면
상대인 다른 하나가 일어난다. 이것이 분별이다.
하나가 들어 나면 다른 하나는 숨어 버린다.
선(善)이 드러나면 악(惡)은 그 안에 숨어 버린다.
인간의 생각과 말이란 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분별 망상은 한계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허공의 달은 하나지만 천 개의 강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래서 선사(禪師)들은 이 마음을 <심원(心猿)> 같다고 한다.
제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에게
욕망은 마치 넝쿨처럼 자란다.
그는 과일을 찾는 원숭이처럼
이 나무에서 저 나뭇가지로 옮겨 다닌다.
~법구경~
움직이는 마음을 잡아두는 것을 정(定)이라 한다.
정(定)에서 혜(慧)가 나온다.
오욕락은 무명에서 비롯된다. 무명은 어둠이다.
영혼의 어둠이다.
어둠은 빛이 있으면 사라진다.
어둠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단지 빛이 없으면 어둠은 사라질 뿐이다.
어둠과 빛은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오욕락은 삶에 있어서 빛과 어둠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삶에서 문제는 오욕락이 아니다.
절제한다고 해서 오욕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오욕락을 일으키는 그 뿌리다.
분별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이다.
오욕락은 가지에 불과하다.
그 뿌리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그 뿌리를 잘라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신다.
가지를 잘라도 그 뿌리가 상하지 않으면
저 보리수나무는 자꾸자꾸 되살아나듯
욕망의 뿌리째 뽑아버리지 않는 한
욕망으로 하여 야기되는 삶의 이 고통은
자꾸자꾸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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