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의미(2)
2025. 5. 16. 15:07ㆍ경전과교리해설
“나 자신을 알라”라는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누구도 이 질문에 답을 낸 사람은 없다.
이 말은 신분이나 직업 학벌을 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헤겔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민간 철학자이며.
염세주의 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1788~1860)가
어느 날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며
길을 걷다가 마주 오는 사람과 부딪쳤다.
그 사람은 화가 나서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생각에서 깨어난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나도 지금 그것을 몰라 생각하는 중이요.”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크라테스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의미다.
위대한 철학자도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을
세속인들은 말은 쉽게 하자만 어떻게 자신을 알 수 있을까?
자신을 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자기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고
이것이 “나”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눈을 거울에 바짝 붙이면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보려면
거울과 거리를 두어야 내 얼굴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보이는 것”과 “보는 이”가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객체와 주체가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은
이렇게 객체와 주체가 분리 되어져 있기에 성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보이는 나>와 <보는 나>로 분리되어 있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떠나서 나를 볼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 어떠한 사람도 스스로 자신을 볼 수 없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바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보이는 것“이 있다면 “보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보이는 것도 보는 주체도 실체가 있어야 한다.
허깨비를 보고 안다고 말할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실체가 없는 인형이 다른 인형을 보고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는 주체 둘 다 실체(自性)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경(經)에서는 이를 이렇게 말한다.
「이른바 일체의 성품[性]은 비존재[無性]에서 발생하거나
또한 비존재가 아닌 것에서 발생한다.
일체의 성품에 발생이 있다면 그 존재는 영원하겠으나,
이 성품은 실체[實]가 없으니,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
모든 법이 허공 등과 같듯이 모든 법의 발생 또한
허공의 (꽃과) 같고, 모든 연기의 법도
다 허공의 (꽃과) 같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 실체가 없는데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는데
누가 무엇을 알 수 있다는 말인가?
행위 인식의 주체로 여겨는 이 육신을
철학에서는 <에고 ego>라고 하며
불교는 <아(我)>라고 하며 그 집착을 <아집(我執)>이라 한다.
그런데 이 아집은 어디에 머무는 것일까?
『대승파유론(大乘破有論)』에 이르기를
「아집(我執)은 다른 데 머무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기의 식(識)에 머무는 것이거늘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와 뜻과 근(根)과 경계(境界)가 화합하는 뜻 등과 화합해서
식이 생긴다’라고 말하지만 본래 ‘나’라는 그것이 없으니,
옷이 꽃과 더불어 화합해야 향기가 있는 그것과 같다.
아직 화합하지 않았을 때는 옷에 향기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오직 식심(識心)과 심법(心法)이 있을 뿐
별도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보이는 대상“도 ”보는 주체“도 모두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중생이 머무는 세간은 실체 없이 분별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분별 때문에 분별의 마음이 발생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 마음이 원인이 되어 곧 몸의 태어남이 있는 것이다.
이 까닭으로 몸(나)이란 말은
세간의 말이지 실체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다.
나라고 여기는 것은 오온(五蘊)에 대해 다시 살펴보자.
경전은 5온(蘊)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몸이라 한다.
모든 5온은 다 공(空)하여 자성(自性)이 있지 않다.
5온은 자성(自性)이 없으며 마음 역시 없다.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이 까닭으로 몸도 없다.
자성이 분별을 떠나 만일 그 마음이 없다면
법(法) 역시 있지 않고 그 몸이 없으면
역시 세계도 있지 않는 것이다.
또한 시간상으로 보면 무엇을 안다고 할 때
이미 그 지식은 과거의 산물이다.
만약 우리가 자신을 본다면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를 보는 것이 된다.
<나>가 영원한 존재라면
과거의 나도, 현재의 나도 영원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는 곧 마음이 무상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실체라면
2개의 영원한 실체가 <나> 안에 있다는 것이 된다.
영원한 존재라면
과거, 현재, 미래에 따로 영원한 것이 존재할 수 없다.
@과거란 소실(消失)이라 이름하고, 다하였음이라 이름하고,
소멸이라 이름하며, 자체가 없음이라 이름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항상(恒常) 하겠는가.
만약 그것이 자체(自體)가 없다면 어떻게 과거이며,
만약 사물의 자체가 있다면 어떻게 과거이겠는가.
만약 그것이 있다면,
돌여인(石女)의 자식도 응당 항상할 것이다.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또 과거가 항상 한다는 의미가 성립하지 않으면,
미래가 항상 한다는 의미도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또 현재라는 것은
현재의 법이 유전하기 때문에 현재라고 이름하는데,
그 현재의 법은 한 생각 동안이라도 머무르지 않는다.
만약 한 생각 동안 머무른다면,
한 겁(劫) 동안도 또한 머무를 것이다.
그러나 이 머무르는 양상은 실로 얻을 수 없다.
머무름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도 또한 없다.
만약 생각이 유전한다면, 어떻게 항상 하겠는가.
만약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현재ㆍ미래ㆍ과거라는
시절(時節)이 있어 성취되겠는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절에는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자체(自體)가 있다면,
과거ㆍ미래ㆍ현재라는 시절이 존재하지 못한다.
만약 그 시절이 존재한다면,
과거ㆍ미래ㆍ현재는 그 자체가 아니다.
시절이 혹은 자체와 더불어 한 가지거나 다르거나,
그 의미는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또 시절과 자체는 있는 것도 오히려 성립하지 않거니와,
하물며 과거ㆍ미래ㆍ현재가 다시 향상함이겠는가.
만약 자체가 항상 한다면, 자체는 스스로 성립하지 않는다.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어떻게 향상함을 이루겠는가.
그러므로 향상함은 없다.
모든 법에는 원인이 없다면 결과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업(業)의 자성(自性) 또한 얻을 수 없다.
여기의 모든 것들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세간(世間)이 없으므로 출세간(出世間)도 없다.
모든 것에는 발생이 없고 성품도 있지 않는데
어떻게 모든 법에 발생하는 바가 있겠는가?
세간의 친애(親愛)하는 부자(父子)와 권속(眷屬)에는
비록 태어나는 바가 있으나 그 실체는 없다.
전생에서 태어난 일도 없으므로
현생에도 그 현상이 있을 수 없다.
이 세간에서 무의미하게 전변하는 것이다.
마치 달 속에 그림자들을 보는 것과 같다.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으면 허구요,
실체가 있는데 이름이 없으면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자신을 안다는 것은
말만 있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자신을 알 수 있겠는가?
경전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모든 법은 단지 명자(名字)만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만 존재의 형상[有想]에 머물며
눈앞에서 나타나며[現前] 실체 없으나
발생하는 것에 차별을 두는 것이니
발생의 법을 차별해도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 모든 법은 본래 이름이 있지 않다.
다만 이름을 빌려 표현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모든 법은 실체가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은 다 분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별이 없다면 허공처럼 모든 분별을 여윌 것이니
마치 눈을 가진 이가 형체를 보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말하는 자는 진실한 말을 한 것이다.
세간의 삿된 집착의 마음을 가진 자는
여실하게 말씀하신 것에 집착하여 (말을) 바꿔버린다.
그러므로 이것의 의미는 눈으로 형체를 볼 수 없고
내지 생각으로 법을 볼 수 없다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이 도리로 지혜를 삼는다면
곧 제일의제(第一義諦)에 잘 통달할 것이고
이처럼 마침내 최상의 진실에 도달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최상의 진실에 도달한다고 함은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나>를 벗어나 <나>를 보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원각(圓覺), 반야 바라밀, 일체지 등
경전에 따라 많은 이름이 있지만
세속인들에 전하는 이 말은
미망에 젖어 <나>라고 여기고 살고 있는
그대 자신의 실체가 무엇인지 관조(觀照)해 보라는
경구(警句)임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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