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證道歌) 제47구 공덕(功德)
2025. 5. 18. 00:42ㆍ증도가
깨친 즉 그만이요. 공덕 베풀지 않나니
모든 유위법과 같지 않도다.
~原文~
覺卽了不施功(각즉료불시공)
一切有爲法不同(일체유위법부동)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의 세 번째 왕조
양(梁)의 초대 황제인 양무제(梁武帝)는
인도에서 '선(禪)'을 전파하러 온 고승 달마대사를 만나
자신을 중국의 아육왕이라 칭하면서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얼마만큼의 공덕이 되겠느냐고
달마대사에게 질문하였으나
달마는 한마디로 "무(無)"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공덕(功德)이란 유위적이고 외적인 공덕이 아니라,
실제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도달하는 무위적이고
내적인 공덕에 비할 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를 본문에서는 일체제법(一切諸法)을 깨달아 알면
유위(有爲)의 공행(功行)을 베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유위(有爲)의 공덕(功德)은 구경(究竟)이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풀이하자면 양무제의 질문에 대한 달마대사의 답은
공덕(功德)은 법을 닦는 데 있는 것이고
복을 닦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보면
공덕(功德)의 공(功)은 복리의 공능으로서
선행의 덕이 됨으로 공덕이라 한다.
덕(德)은 득(得)의 뜻으로
功을 닦아 얻는 바가 있으므로 공덕이라 한다.
이는 유위법에서 보는 공덕의 의미다.
양무제가 생각한 공덕은 이러한 공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위법에서 행하는 이러한 공덕은
선가(禪家)나 대승 경전에서 말하는
구경(究竟)의 깨달음에서 행하는 공덕의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공덕(功德)을 이렇게 설명한다.
「성품을 보는 것이 이 功이요,
평등이 이 德이니 생각 생각에 막힘이 없어서
항상 본성의 진실한 묘용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공덕이라 하느니라
안으로 마음을 겸손히 하고 낮추는 것이 功이요,
밖으로 이 례(禮)를 행함이 德이다.
자성이 만법을 세움이 이 공(功)이요,
마음 자체가 생각을 떠난 것이 이 덕(德)이다.
자성을 떠나지 않음이 이 공(功)이요,
쓰지만 물들지 않는 것이 이 덕(德)이니라.
만약 공덕 법신을 찾으려 한다면
다만 이렇게 하는 것이
참 공덕이 되는 것이니 그에 의지해야 한다.
만약 공덕을 닦는 사람이라면 마음으로 경멸함이 없고,
공경함을 항상 널리 행하여야 할 것이나.
마음으로 늘 남을 업신여기고
<나> <너> 생각이 끊어지지 않으면,
곧 스스로 공(功)이 없는 것이며,
자성이 허망하여 진실하지 못하면
곧 그것이 덕(德)이 없는 것이다.」
깨달은 이가 만약 공덕의 유무(有無)를 생각하면
이는 깨달은 이가 아니다.
대승에서 말하는 구경의 깨달음에서 행하는 공덕은
자타(自他)는 물론 대상까지
모든 초월한 무위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다.
구경의 깨달음인 원각(圓覺)의 의미에서 보자.
경은 이렇게 말한다.
「선남자야, 지난밤의 꿈과 같으므로
생사와 열반이 일어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느니라.
증득한 것을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으며,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느니라.
또 증득하는 이에게도 지을 것[作]도 없고
그칠 것[止]도 없으며, 맡길 것[任]도 없고
멸할 것[滅]도 없느니라.
이와 같은 증득에는 주체[能]도 없고
대상[所]도 없어서 끝내 증득할 것도 없고
증득한 이도 없어서 일체 법의 성품이 평등하여
무너지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느니라.」
~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원각경(圓覺經)>에서 말하는 의미를 보면
유위법에서 말하는 공덕의 의미는 사라지고
오로지 무위(無爲)의 행(行)만을 말하는 것이다.
베푸는 자도 없고, 대상도 없는 무작(無作),
무소득(無所得)을 말하는 것이다.
유마(維摩)의 불이법문(不二法門)에서 말하는
적멸(寂滅)의 자비행(慈悲行)일 뿐이다.
그러므로 용아순(龍牙遁)선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인연을 따르면서 바람과 같이 되려면,
모래를 불고 돌을 일으켜도
공(功)을 들여 애쓰지 말라.
다만 일하면서 일 없음을 통달하고,
성색(聲色)을 보고 들음에 귀머거리처럼 굴지 말라.”
공덕(功德)은 법을 닦는 데 있는 것이고
복을 닦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그러나 닦아야 할 법이 이렇게 무소득(無所得)이라면
수행하는 자는 어떤 법을 닦아 공덕을 베풀어야 하는 것인가?
원시불교에서 말하는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과
대승불교의 수행이 목표로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이념에
근거하여 팔정도(八正道)를 비롯한 모든 수행법을
대승불교의 차원에서 체계화한 최고의 수행이 6바라밀의 수행이다.
6바라밀은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로 이루어져 있다.
부처님이 이르기를
「“도덕(道德)을 지닌 사람은 알지어다.
과거와 미래와 지금 현존하는 법은 취하는 것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으며 아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그 법이란 생겨나는 것이 없는 법이며
소멸하는 것도 없는 법이고, 어디서 생겨나는 것도 없는 법이며
무엇을 따라 멸하는 것도 없는 법이다.
이 법 가운데는 아무것도 생겨나는 것이 없고,
존재하는 것을 따라 멸하는 일도 없다.
이것이 법이 법으로 삼는 근본이며
내가 대신 이를 권조(勸助) 한다.
이것이 권조가 되는 것이며 이 보시를 짓는 사람은
빠른 시간 안에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보살마하살에게는
권조의 공덕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다.」라고 했다.
(마하반야초경)
여기서 말하는 ”도덕(道德)“이란
윤리적인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공덕(功德)을 말하는 것이다.
아뇩다라삼야삼보라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말한다.
6바라밀의 반야바라밀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어서 반야바라밀은 6바라밀(波羅蜜) 가운데
가장 존귀한 바라밀이 반야 바라밀이라고 했다.
여기서 부처님이 권조 한다는 것은
반야바라밀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삼천대천세계의 국토와 항하의 모래알처럼 많은
불찰토(佛刹土)의 사람들에 베푸는 그 어떤 공덕보다
반야바라밀을 간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
이를 베껴 쓰게 하고 배우게 하여 이들을 위하여
이를 해설하고,
아유월치(불퇴전 위에 오른 보살) 의 지위에 있는
보살들에게 경(經)을 전수해 주는 일만 같지 못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경을 따라
반야바라밀을 배우게 하면
깊이 반야바라밀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고,
반야바라밀을 배워 알게 된 사람은 더욱더 많은 법을 지켜
그 알음알이가 극한이 없게 되고
이로 인하여 도를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 복덕이 매우 많고 갑절이나 많게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권조 하신 최대의 공덕은
반야바라밀 즉 살운야(일체지)를 닦아
이를 스스로 배우고 익혀
이를 다른 이에게 전수하는 것이 최고의 공덕이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깨닫고 나서 공덕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은
유위의 공덕을 말한 것이지 무위의 공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경에 따르면 그 무위의 공덕 가운데
최고의 공덕은 반야바라밀의 보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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