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證道歌) 제44구 깨달음과 욕망

2025. 5. 1. 12:11증도가

단박에 깨쳐 남이 없음을 요달하고부터는

모든 영욕에 어찌 근심하고 기뻐하랴.

 

<原文>

自從頓悟了無生 (자종돈오료무생)

於諸榮辱何憂喜 (어제영욕하우희)

@깨달은 이는 모든 욕망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다.

그는 드디어 무한을 정복했다.

이 세상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그를

아, 아, 무엇으로 유혹할 수 있겠는가.

<법구경>

여기서 깨달은 이는 부처님을 가리킨다.

부처님이 깨달은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

무상(無相)ㆍ무위(無爲)라고 설하신다.

그러나 이를 중생들이 믿고

깨닫게 함은 지극히 희유하다고 한다.

생기지 않았다면, 멸할 것도 없고,

모양과 실체가 없으니

무슨 행동을 취할 그것도 없다는 말이다.

일체 법이 그렇다고 하면 있는 것도 아니고(有)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無) 그런 법을

중생이 어떻게 닦고

또 무엇을 얻는다는 말인가 하는 의심이 생긴다.

부처님의 10대제자 중

공의 제일인자로 불리는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누가 능히 법을 얻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부처님께서 다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얻을 것이 없느니라[無所得]. 그런 까닭에 얻게 되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얻을 것이 없는 법[無所得法]’은 말을

어린아이처럼 바보같이 배워서는 안 되느니라.

()란 문자는 얻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니라.

법을 배워 익혀서 법문에 들어가고자 한 사람은

적시에 두 가지 법[二法]을 모두 얻었을 뿐

역시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법이 만약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법은 존재함으로써 곧 색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법은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이 된다.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는 말을

어린아이처럼 어리석게 몸이란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를 해득하지 못하고 곧 이 말을 믿지 아니하게 되나니

해득하지 못하는 가운데 머물게 되는 까닭에

어린아이라고 말한 것이다.”<마하반야초경>

영가 스님이 육조 혜능스님을 뵙고 인가받은 것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했기 때문이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이란 생함이 없다는 것으로

이는 곧 유무를 관찰하고 깨달아 얻었다는 진리다.

중생들이 말하는 유()와 무()라는 것을 관찰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있고 없음을 관찰한다하는 것은

구름과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공중에 구름이 먼저는 없다가

뒤에 별안간 생겨나고 잠시 후엔 또다시 소멸하는 것처럼

유위(有爲)의 모든 법도 이와 같아서

실체와 자성도 본래 공()한 것이건만

허망한 인연을 따라 존재하다가 인연이 흩어지면

도로 무()로 돌아가고 만다.

이를 체득하는 것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무생법인(無生法忍) ‘생멸이 없는 법인이란

곧 마음의 법[心法]이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심법(心法)인 것이다.

얻는 이도 없고 얻을 것도 없음을 깨달아 얻었다라는 것은

법에는 성품도 없고 취득(取得)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깨달아 얻었다면

모든 희로(喜怒)애락(哀樂)을 벗어나게 된다는 의미다.

무위(無爲)요, 무작(無作), 무원(無願)인데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러므로 영가스님 또한 일체 영욕을 벗어났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남명천화상은 주석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돈오(頓悟)한 이후부터는 일체법(一切法)이

모두 무생(無生)임을 요달한다.

그렇다면 모든 영욕(榮辱)의 경계에

무슨 근심과 기쁨이 있겠는가.

진실로 지인(至人)은 생사의 세계 안에서

자재(自在)함을 얻는다.

이 때문에 한산시(寒山詩)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장생(莊生)은 죽어서 장례를 치를 때

천지를 관곽(棺槨)으로 삼겠다고 했네.

내 여기서 돌아갈 때

오직 거적때기 하나 필요할 뿐이니

 

죽어서는 쇠파리[靑蠅]의 밥이 되어서

조상(吊喪)함에 백학(白鶴)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리라.

굶주려도 수양산에 들어가면

살아서 청렴하고 죽어서도 즐겁다네.

 

만약 이 종지를 얻는다면 무생(無生)의 이치를

단박에 깨달아 요달할 것이다.

“모든 영욕에 대해서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기뻐하리오”라고 한 것을 말해보자.

이미 무생(無生)의 이치를 돈오했다면

생사(生死)에서 자재함을 얻은 것이다.

그렇다면 영욕의 경계를 벗어남을 알 수 있다.

영욕을 이미 잊었다면 근심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무엇을 의지해서 있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