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불의 전생담을 보면서 / 확증편향과 지식에 대하여

2023. 1. 14. 18:32생각하며

 

 

현대 문명의 바로미터(barometer)는 지식 수준에 비례한다고 한다.

오늘날 급속도로 발전하는 디지털 문명시대를 보면

새로운 지식이 요구 되고 이를 갖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부와 입신출세를 열망하는

치열한 현대의 경쟁사회에서 남들보다 다양한 지식을 가지지 않으면

도태되기 쉽고, 승자가 되지 못하면 출세도, 돈도,

명예도 모두 잃어버린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보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에 대한 갈망은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승자(勝者)가 되면 패자(敗者)에 대한 우월감이나

자만심, 자기 성취감에 취해 이를 행복의 위안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인 관점은 이와 반대로 지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은 물질적 풍요로 얻는 승자(勝子)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참된 행복은 그 본성을 깨닫고

세속적인 욕망에서 생로병사 등 고통에서 벗어남으로

삶의 궁극적인 참된 행복을 성취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뱀의 사주를 받은 이브가 아담을 유혹하여

하나님이 금지한 에덴동산의 과일을 따 먹게 하였다고 한다.

그 과일은 선악과(善惡果)라는 과일로 이는 다름 아닌 지식을 말한다.

성경에서 원죄(原罪)는 이로써 비롯된다고 한다.

지식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원죄가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불교의 교리 또한 마찬가지다.

불교에서 지식은 곧 분별심을 말하고, 알음알이가 된다.

경전에서 말하는 육식(六識)이 바로 알음알이다.

이는 교종이나 선종에서 다 배척하고 있다.

해탈과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식을 버려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선가(禪家)에서 회자하는 <방하착(放下著)>이란 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브를 유혹한 뱀은 냉혈동물이며 독을 지니고 있다.

지식 또한 그렇다. 감성과는 달리 얼음처럼 차갑고

또한 칼과 같아서 쓰임에 따라 보도(寶刀)도 되고 흉기(凶器)도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회인으로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지식은 물질적인 풍요와 편리함을 창출하는 대신

그 반대로 인성의 폐단은 지식과 반비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한 면을 일례로 보드라도 자부심과 오만과 아집은

가방끈이 긴 사람일수록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많고,

형제간의 우애도 부자나 성공한 사람들보다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 형제간이나 가족 간의 우애가

더 깊다는 것에서 주변에서 볼 수가 있다.

이는 곧 아집(我執)과 아만(我慢)의 모태는

바로 지식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 시대에는 10명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다.

그 10대 제자 중 최고의 지혜 즉 지식을 가진 자는 사리불이었다.

 

<대지도론>에 의하면 사리불의 전생은 뱀이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독사(毒蛇)에게 물렸다고 한다.

그 뱀은 뱀 중에서 무서운 독(毒)을 지닌 독사라 해독약이 없었다.

백방으로 이름난 의사, 땅꾼의 힘을 빌려 뱀의 독을 치료하였지만 허사였다.

독이 퍼져 병석에 누워서 임종만 기다리고 있던 왕에게

어느 날 한 주술사가 왕을 찾아와 이렇게 일러주었다.

“이 뱀은 독사 중의 독사라 그 어떤 약으로도 해독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한 가지 방법은 있기는 한데, 그것은 임금님을 문 그 독사를 잡아다가

그 독사로 하여금 자기가 뱉은 독을 다시 빨아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왕은 반신반의하면서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전국의 땅꾼들을 소집하여 그 뱀을 잡게 한바 간신히 그 뱀을 잡게 되었다.

왕은 뜰 앞에 산더미처럼 장작을 모아 불을 피우고는

주술사로 하여금 그 뱀에게 명령하였다.

“내 몸속에 든 너의 독을 빨아내지 않으면 저 장작불에 태워죽이겠다.”라고.

그러자 그 뱀이 답하기를

“내가 뱉은 독을 내가 다시 마시느니 차라리 저 장작불 속으로 들어가겠다.” 하고는

그대로 활활 타는 장작 불더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고 한다.

 

자기 신념에 차 외곬으로 치닫는 뱀의 오기(傲氣)처럼 이런 정신을 조선 시대에는 옹골찬 <선비의 정신>이라고 찬양받기도 했지만, 그 속성은 자기 신념에 대한 자부심과 오만에서 나오는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디지털 문명의 소산인 소셜 미디어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은

방대한 이질적인 정보의 물결 속에 <확증편향(確證偏向)>에 빠지기 쉽고, 또한 같은 이념을 지닌 사람들을 규합하여 세(勢)를 불리고 <진영(陣營)논리(論理)>에 쉽게 물들어 가고 있는 것도 지식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확증(確證) 편향(偏向)이란 쉽게 말하면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간절히 바랄 때,

또는 어떤 사건을 접하고 감정이 앞설 때,

그리고 저마다의 뿌리 깊은 신념을 지키고자 할 때

이러한 확증편향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확증편향은 원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모으거나,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주장할 때 편향된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실례로 기부금과 뇌물 사건 하나를 예로 보자.

기업가들의 후원을 받아 시민의 숙원사업인 경기장 하나를 만들고

대신 기업이 바라는 것을 인허가 등 행정적으로 처리해 주었다고 가정해 보자.

경기장 건설을 위해 소요되는 시민의 세금을 줄였다는 점에서는

정당한 기부금이 되지만 반대로 인허가 조건을 해결함으로써

기부금을 받았다면 이는 뇌물이 된다.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범죄가 되기도 하고 아니 되기도 한다.

여기에 동조자의 세력이 가미하면 일반인들에게는

법과 불법(不法)의 한계가 모호해져 버린다.

진영논리로 가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말에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이 있다.

확증편향에 의한 아전인수식 사고는 스스로가

이러한 판단을 진실이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거짓임을 뻔히 알지만 남을 속이고자 하는 견강부회(牽强附會)와는 다르다.

 

@우리 정치권에서의 진영논리는 이슈로 떠오른 사안을

자신의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하는 것을 뜻한다.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려는 사람들은

사안의 여러 정보 가운데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만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시하거나 심지어 조작(造作)이라고 여긴다.

진영논리라는 용어는 상대가 확증편향에 빠져

사실을 보지 못한다고 비난할 때 사용되는 부정적 용어이다.

스스로가 진영논리에 따라 발언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논쟁하는 쌍방은 자신은 객관적 논리를 펼치고 있고

상대는 진영논리에 빠져 있다고 공격한다.

 

또한 정보의 편향적 수용은 이른바 가짜 뉴스의 경우에 두드러진다.

별다른 근거가 없더라도 자신의 지향과 맞으면

그것을 사실로써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널리 확산할수록

그 자체가 뉴스의 사실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널리 알려졌으니 사실일 것이라는 주장은 오류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평소 신념에 들어맞으면 당연히 사실이라고 여기게 된다.

사람들은 일반적인 뉴스에 더 높은 신뢰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경우 언론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개인 유튜브라 할지라도 같은 그들이 발송하는 사실과는 다른

일방적인 뉴스에도 상당한 신뢰를 보이고 있음은

작금의 현실 정치에서 이미 확인되고 있지 않은가.

위와 같이 사람들은 지식을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말하지만

받아드리는 자의 주관에 좌우된다.

 

지식은 언제나 정()이 있으면 반()이 있고,

()가 있으면 비()가 있다. 선악, 애증이 있기 마련이다.

지식은 언제나 이분법적인 사고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오만과 아집과 독선과 분열을 낳기 마련이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불교 용어로 말하면 분별이다.

분별심으로는 참된 본성에 나아갈 수 없다.

원죄를 초월할 수도 없고, 불성을 성취할 수도 없다.

그래서 선가의 으뜸서라는 <신심명(信心銘)>에서 첫 귀를

至道無難(지도무난) 唯嫌揀擇(유혐간택)

이라 한 말이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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