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암산 석천암(石泉庵)

2022. 7. 14. 20:58국내 명산과 사찰

 

불암산의 유명 사찰로는 학도암, 불암사, 천보사가 있고

암자로는 석천암이 있다.

이들 불암산 사찰들의 특징은 산명(山名)에서 알 수 있듯

바위가 많아 사찰마다 마애불이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학도암의 거대한 마애관음불좌상, 불암사의 마애삼존불,

천보사의 눈썹바위의 마애여래상과 삼성보궁의 마애불상과 더불어

석천암에는 마애미륵불이 조성되어 있다.

 

석천암 가는 길은 불암산 정상 가는 길의 깔닥고개에서 내려가는 코스와

불암사나 천보사에서 정상 가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 길이 있다.

 

 

 

불암산 둘레길은 늘 다니는 길이라 눈에 너무 익은 탓에

교만한 마음이 생겨 정상 등산로를 따라가지 않고

천보사에서 숲길을 바로 접어 들었더니

길 없는 길이라 반 시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무려 2시간을 넘게 오르고 내리고 하면서

도착하니 석천암 위쪽이었다.

사서 고생한 셈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고 했는데....

 

 

석천암은 불암산(507m)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가람으로,

오르는 등로도 바위 너들길로 가파르다.

행정지역으로는 석정봉과 전망대가 있는 쪽은 노원구에 속하지만,

그 뒤편은 남양주시 별내면에 속한다.

석천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로 알려져 있으며,

또 불암사의 사내 암자로도 소개되어 있다.

 

창건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신라 흥덕왕 때 지증(智證)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지증(智證)대사는 824년(헌덕왕 16)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일으켰던 선사로

불암사 절 입구 제월루(霽月樓) 앞에 세워져 있는

천보산불암사사적비(天寶山佛巖寺事蹟碑)에 의하면

불암사의 창건주로도 알려진 선사이다.

 

@석천암(石泉庵)은 창건 이후 기록은 물론

고려 시대의 기록도 없고 다만 조선 시대

고종 19년(1882년)에 병역제도의 개편으로 오위제도가 해체되자,

오위장(五衛將) 이장군(李將軍)이

옛터에 암자를 짓고 수도하였다고 전한다.

또 2015년 독일 경매에서 환지본처(還至本處) 된

지장보살 시왕도 불화 1점이 있는데

그 화기(畵記)에 봉안처가 <양주 천보산 석천암'(揚州天寶山石泉庵)>이고

조성연대는 1848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석천암은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존속되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석천암 지장보살시왕도는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1899년에 거사(居士) 김한구(金漢九)가

낡은 건물을 수리하고 이곳에서 공부하였으며,

1956년에는 주지 창근(昶根)스님이 요사채를 중수하고,

1960년에는 법당을 세웠다.

당우로는 201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2013년에 재건한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가 있고, 마애약사전이 있으며

마애미륵불입상이 있다. 이 미륵불은 1966년

설봉스님이 조성하신 것으로 오늘날 석천암의 상징이 되고 있다.

 

 

 

 

마애미륵존불

일주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이 거대한 마애미륵불은

석천암의 마스코트로서 좌측은 대웅전,

우측에는 종무소가 있고

마애불 앞에 조성된 기도처는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같은 쌍혈자리로 풍수지리학상 명당에 속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마애미륵불은 1966년 설봉스님이 발원하여 조성했다고 하며

또 다른 이야기로 불교신문에 의하면

1960년 박광문이라는 거사가 이곳에서 신병을 치료 중

꿈에 미륵불을 현몽하고 바위에 미륵불을 조성하여

4년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거대한 자연암벽에 고부조로 조각된 마애불은 미륵불로서

둥근 얼굴에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이목구비(耳目口鼻)는 둥근 얼굴에 비하여 균형이 조화롭지 못하다.

법의는 통견으로 발까지 덮고 있으며,

수인은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가슴 위로 향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허리 아래로 내려져 있다.

근래에 조성된 마애불치고 빼어난 솜씨는 아니며,

가사는 투박한 고부조로 선각 처리되어 있다.

 

 

 

대웅전

전면 3칸, 측면 2칸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된 대웅전은

201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2013년에 재건한 것이다.

풍수지리로는 명당인 쌍혈자리라고 한다.

 

수미단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관음보살을 좌협시로,

지장보살을 우협시로 봉안하고 있다.

 

 

석가모니불

 

관음보살

 

지장보살

탱화로는 신중탱과 아미타내영도가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내영도

신중탱

 

 

석천암 지장보살시왕도

@불암산 석천암 지장시왕도

대한불교조계종과 문화재청은 19세기 중반 제작된

불화 불암산 석천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한 점이

독일 경매에서 낙찰받아 환수했다고 2016.7. 14일 밝혔다.

이 불화는 현재는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죄업을 심판하는 시왕(十王)을

한 곳에 그린 불화를 말한다. 조계종이 밝힌 이번에 환수된 지장시왕도는

비단에 채색된 그림으로 가로 154.8㎝, 세로 148㎝다.

이 불화의 화기(畵記)에는 봉안처가

'양주 천보산 석천암'(揚州天寶山石泉庵)으로 기록돼 있고,

또 '도광 28년 무신 4월 초파일 완성,

14일에 점안해 봉안'(道光二十八年戊申四月初八日神供十四日點眼奉安于)이라고

적혀있다. 이로써 1848년 제작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도광은 청나라 도광제의 연호다. 제작자는 화기에 따르면

법총(法聰), 희원(凞圓), 혜호(慧皓) 스님 등이 제작했고

후불탱화·산신탱화도 함께 그렸다고 화기에 기록됐다.

이 불화가 언제, 어떤 경로로 반출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독일인 소장자가 40년 이상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 점으로 미뤄

1970년대 이전 반출된 것으로 보인다고 조계종은 설명했다.

(출처: 연합뉴스 2016.07.14.)

 

대웅전 뒤편 암벽에는 작은 규모의 마애불이 조성되어 있다.

 

 

항마촉지인을 한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정병을 든 관음보살을 좌협시,

대세지보살을 우협시로 조각해 놓았다. 

 

 

 

삼성각

전면3칸 측면1칸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된 삼성각은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병풍 같은 바위 아래 조성해 놓았다.

수미단에 석조 산신상과 석조 독성상을 조성해 놓았다.

칠성은 탱화로 대신하고 있다.

 

 

산신

 

독성

칠성탱

 

삼성각에서 내려다 본 석천암 전경

 

약사전에서 바라 본 삼성각

약사전

병풍바위에 고부조로 조성한 마애 약사불이다.

손에는 약사여래의 상징인 약합(藥盒)을 들고 있고,

거신광은 화염무뉘로 조성해 놓았다.

 

 

* 석천암을 전하는 이야기 하나*

 

조선 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주군 불우(佛宇)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하고 있다.

“천불산(千佛山) 높푸르러 겹쳐졌는데, 발자국 미끄러워 칡을 잡는다.

구름이 노목을 덮어 매 집이 높고, 물이 샘에 흘러와 용이 숨었다.

손님은 시를 쓰려 석탑(石塔)을 쓸고, 스님은 예불(禮佛)하며 종을 울린다.

올라가 임해 보니 동남쪽이 모두 보인다.

건곤(乾坤)을 굽어보니 가슴 시원하네.”

이 시는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석천암의 경치가 잘 담겨있다.

 

 

 

 

 

 

 

 

*석천암에 전하는 이야기 둘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일이다.

나의 가계를 찾는 고객분 중 한씨라는 성을 가진 분이 계셨는데

내게 불암산의 석천암을 소개하면서 함께

석천암에 얽힌 증조부의 옛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한씨라는 이분의 증조부가 이 절(석천암)에 계실 때 금부처를 조성해 놓았다고 한다.

그 당시가 일제 강점기라 혹 일본인들이 이 금불상을 알고 찾아올까 봐

두려워 어느 날 밤 아무도 모르게 석천암 어디엔가 묻어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몇 년 후 불행히도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금부처로 인하여 자식들이 혹시 후환을 당할까 봐 걱정하여

그의 아들에게도 금부처를 묻어놓은 장소는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한 씨의 부친이 그 증조부가 묻어 두었다는

금부처가 생각나 몇 해 동안을 경내를 두루 찾아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가시면서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선업(善業)을 많이 쌓아 그 인연이 익으면

어느 날인가 반드시 그 금부처와 인연이 닿을 것이라.」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