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민족의 영산 강화 마니산 참성단에서 정수사로

2022. 3. 11. 22:33국내 명산과 사찰

 

민족의 영산 마니산 참성단을 기점으로

이제 올라왔던 암릉을 다시 유턴하여 정수사(淨水寺)로 하산한다.

참성단은 천제단(天祭壇)으로, 천제단이라 함은

옛사람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설치한 제단으로

마니산 천제단뿐만 아니라

상고시대부터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으로 알려진 태백산 천제단도 있다.

이는 단군 조선 시대 구을(丘乙) 임금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천제단이다.

그 외에도 광주 무등산에도 천제단이 있고,

조선 후기 지역 수호신 마고 할미를 모시는 제당과

천신·지신·산신을 모셨다는 부산 장산 마고당천제단(萇山麻姑堂天祭壇).

포항 영일 일월지(迎日 日月池)의 천제단도 있지만,

역사적 의미도 불분명한 것도 있다.

이번 산행은 바위를 좋아하는 나에게 마니산의 암릉길은

힘들었지만 즐거운 산행이었다.

 

 

 

(뽀샵을 했더니 어느 영화에서 본 뜻한 형상이다)

 

마니산 정상 바로 아래, 삭막한 바위 위에

앙상한 가지로 뿌리를 내리고 엉키고 설킨 모습을 한

고목(古木)이 영고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어느 등산객이 하산길에 지나온 능선들을 바라보며 인증샷을 남긴다.

암릉길이 무척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정수사 주차장에서 우측 정수사로 향한다.

 

 

정수사 전경

정수사(淨水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산85번지에 있는

조계종 소속 사찰로 신라 선덕여왕 8년(639년) 화장 선사가 창건한 절이다.

처음 창건 시는 정수사(精修寺)라 하였는데

화장 선사가 이 자리가 불자(佛子)가 정히 수도할 만한 자리라 하여

정수사(精修寺)라고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정수사(淨水寺)라는 사명은

조선 세종 8년(1426년)에 함허대사가 다시 지어

정수사(淨水寺)라고 고쳤다고 한다.

또한, 이 이름은 함허대사가 절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지었다고도 전한다.

 

보유 문화재는 보물 제16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과

강화군 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된 함허대사 부도가 있다.

 

정수사 범종각이다. 누각이 아니라서 초라하게 보인다.

 

@대웅전

문화재지정: 보물 제161호

조성시대: 조선 시대

 

정수사 대웅전은 조선 초기의 목조건물로

1957년 해체·수리 때 종도리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1424년에 창건되고, 1588년(선조 21)에 중창,

1689년(숙종 15)에 6창했음이 확인되었다.

원래 앞면 3칸, 옆면 3칸이었으나 어느 때인가 앞퇴를 덧붙여

앞면 3칸, 옆면 4칸으로

정사각형에 가까운 보기 드문 평면구조를 가진

단층 맞배지붕 건물이다.

 

따라서 건물의 앞쪽과 뒤쪽 공포가 다른데

앞쪽은 2출목으로 외목도리를 받게 하여

1출목의 전형적인 주심포계 형식에서 벗어나 있지만, 뒤

쪽은 1출목으로 조선 초기의 주심포 양식을 보여준다.

측면

뒷면

앞면의 가운데 칸에는 꽃살무늬가 장식된 분합문이,

좌우협칸에는 넉살무늬의 4분합문이 달려 있다.

건물 내부의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고,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그 주위의 빗천장은

나중에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에 보이는 앞퇴는 안동 개목사 원통전(보물 제242호)과 같이

조선 초기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시대를 앞서 고려 시대 조성된

안동 봉정사 대웅전(국보 제311호)도 비슷한 구조이지만

다만 앞퇴에 난간을 두른 것이 다르다.

 

 

(좌로부터 지장보살,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관음보살)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문수와 보현보살을 협시로 봉안하고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더하여 봉안하였다.

지장과 관음보살을 더한 것은

본존불 후불탱이 아미타탱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예적금강(穢跡金剛)을 중앙에 둔 신중탱이다.

예적금강은 오추사마(烏樞沙摩)로도 불린다.

여래의 화현이며 일체의 더러움과 악을 제거하는

위력을 가진 명왕(明王)이다. 신중탱에서 예적금강의 모습은

19세기 초에는 붉은 머리카락을 곤두세운 험상궂은 얼굴에

손에는 금강저를 들거나 공수인(拱手印)을 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예적금강은 얼굴 3개에 눈도 3개이며

이를 드러내며 분노한 표정을 짓고 있다.

8개의 팔을 갖고 있으며 손은 합장을 하거나

금강령, 뱀, 부적, 칼, 밧줄, 창 등의 지물을 들고 있다.

또한 온몸을 불에 휩싸이게 그려

보다 극적으로 분노존(忿怒尊)을 표현하기도 한다.

 

칠성탱

 

지장탱

 

현왕도

@현왕도는 조선 시대 불교 의식집에 근거하여 조성되기 시작한

불화의 한 장르로, 화면의 구성은 같은 시기 시왕도(十王圖)와 흡사하다.

인간 사후 3일이 되는 날 사자(死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설행하는 현왕재를 위해 조성되었으며,

사찰의 중심 전각의 영단(靈壇)에 봉안되지만,

정수사는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현왕도의 연원 및 변천을 살펴보면 현왕도의 주존(主尊) 현왕은

중국 당나라 말기 찬술된 불교 경전

『불설예수시왕생칠경(佛說預修十王生七經)』에서

내세에 성불할 것을 수기 받은 염라대왕(閻羅大王)의 미래불(未來佛)인

보현왕여래(普賢王如來)를 지칭한다.

조선 시대에 보현왕여래가 개설하는 여러 의식을 모아 편찬한

의식집의 현왕재 항목에서 예배대상으로 모셔지고,

이를 표현한 불화를 현왕탱(現王幀)이라 기록함에 따라

보현왕여래는 현왕이라 지칭되었다.

 

현왕도의 일반적인 화면구성은 중앙에 현왕이 의자에 앉고,

좌우에 대륜성왕(大輪聖王)과 전륜성왕(轉輪聖王),

판관(判官), 녹사(錄事), 사자(使者)가,

상단에는 천인(天人)과 동자(童子)가 현왕을 감싸듯이 배치되는 형식이다.

현왕도(現王圖)의 도상은 보통 일월관(日月冠)

또는 금강경(金剛經) 등 경책(經冊)이 얹힌 관을 쓴 현왕(現王)이

판관, 사자, 동자 등에 둘러싸여 심판하는 모습을 간략하게 그렸는데,

언뜻 보면 시왕도(十王圖)와 유사하지만

시왕도와 달리 지옥 장면이 묘사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현지 안내문

강화 정수사 법당(江華 淨水寺 法堂)

보물 제161호

강화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화장 선사가 지었다고 전하며

조선 시대 세종 8년(1426)에 함허대사가 다시 지었다.

본래는 정수사(精修寺)였으나 다시 지을 때 건물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이름을 정수사(淨水寺)로 고쳤다고 한다.

 

강화 정수사 법당은 석가모니불 상을 모신 대웅보전이다.

1957년 보수 공사 때 발견한 숙종 15년(1689)에 수리하면서

적은 기록을 보면 세종 5년(1423)에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규모는 앞면 세 칸, 옆면 네 칸이지만 원래는 툇마루가 없이

앞면과 옆면이 3칸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인(人) 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지붕 처마 무게를 받치는 구조인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의 앞뒷면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앞면의 공포 장식이 다른데,

이는 앞면 툇마루가 후대에 다시 설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앞면 중앙 출입문의 꽃 창살은 특이하게 통판에 조각되었으며,

꽃병에 연꽃과 모란이 담겨 있는 화려한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건물 앞면에 툇마루가 있는 특이한 법당 구조가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관음전에는 중앙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좌협시로 관음보살, 우협시로 지장보살을 봉안했다.

 

정수사 삼성각이다. 돌계단 위에 조성되어 있는데

법당 안에 참배객이 있어 참배는 밖에서 하고 사진만 담았다. 

 

법당 안에는 목조탱으로 산신, 독성, 칠성을 모셨다.

칠성은 보관을 쓰고 있고 용의 그림이 있어 용왕인줄 알었는데

이 전각이 삼성각임으로 칠성으로 보아야 할 것같다.

 

 

 

수각

 

오백나한전

 

@함허대사부도

 

함허대사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승려로 그가 머물던 정수사 뒷산 중턱에 봉안한 부도이다.

부도는 승탑을 말한다.

 

부도(승탑)의 구성은 기단 위에 탑신이 놓이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어 정상에 상륜을 장식하고

그 기본형은 팔각 원당형을 따르면서

사각의 단순한 변형을 가미하였다.

 

기단부는 상, 하대로 형성되었으며 각 면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다.

부재는 화강암이며 전체 높이는 164cm이다.

함허대사부도(㴠虛大師浮屠)는

1986년 4월 1일 강화군의 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함허(涵虛·1376~1433) 화상은

조선전기의 승려로 법명은 기화(己和)이며,

속명은 유수이(劉守伊), 호는 득통(得通) 또는 무준(無準)이며,

함허는 그가 머물던 당호가 함허당(涵虛堂)이므로

함허득통이라 칭한 것이다.

속성은 유(劉) 씨며 남원에서 출생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청(聽)이며 벼슬은 전객시사(典客侍事)를 지냈고,

어머니는 방(方) 씨였다.

 

길상산 서쪽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469m) 동쪽

신라 선덕왕 8년(639)에 창건된 정수사를

1426년 함허가 중건할 때 법당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남을 보고

‘정수사(精修寺)’를 ‘정수사(淨水寺)’라 고쳤다.

함허득통의 부도는 이 절 북쪽 등성이에 있다.

그리고 등성이 너머 계곡을 ‘함허동천’이라 부르며

바위에 글자가 석각 되어 있다.

이후 함허는 공덕산(孔德山 大乘寺), 운악산(雲岳山 縣燈寺) 등의

여러 산을 편력한 뒤 1431년(56세) 가을,

영남의 희양산 봉암사(鳳岩寺)에 돌아가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고

들어앉아 조용히 지내다가 세종 15년(1338) 4월 1일에,

 

湛然空寂本無一物(담연공적본무물)

靈光爀爀洞徹十方(영광혁혁통철시방)

更無身心受彼生死(개무신심수피생사)

去來往復也無罜碍(거래왕복야무가애)

 

 

맑고 부드러우며 비고 조용하여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영혼의 빛은 밝게 빛나 시방세계를 꿰뚫는다

몸과 마음 저 생과 사 받을 일 다시없으니

가고 옴 되풀이해도 걸릴 것이 없어라

 

라는 임종게(臨終偈)을 마치고 입적하시니

세수는 58세요, 법랍은 38세였다.

1431년(세종 13) 겨울 노구를 이끌고 봉암사에 들어가

쇠락한 절을 수리하고 선풍을 진작시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년 후 4월 어느 봄날 입적하신 것이다.

다비 후 그의 덕화를 기리기 위해 사리를 모아

그가 오랫동안 주석했던 사찰 4곳에 부도를 세웠는데

정수사의 부도도 그중 하나다.

나머지 3곳은 황해도 평산 연봉사(烟峰寺), 가평 운악산 현등사,

문경 희양산 봉암사로 그의 부도(승탑)가 있다.

저서로는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

《현정론(顯正論)》, 《원각경소(圓覺經疏)》,

《금강경오가 설의(說誼)》, 《함허당어록(涵虛堂語錄)》,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금강경오가해설의》

(金剛經五家解設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