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수덕사 제3부 관음전 명부전 환희대
2021. 7. 4. 09:44ㆍ국내 명산과 사찰
예산 수덕사는 관음보살을 봉안한 전각이나 불상이 유난히 돋보인다.
산내 암자인 정혜사의 주 법당인 관음전만 보드라도 그렇고,
수덕사 경내에는 관음전이 있는 데 원통보전이 또 있다.
이는 아마도 수덕사 창건에 관련된 전설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된 전설은 여러 개가 회자하고 있는데 같은 주제에 같은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
그중 하나는 본방 정혜사에서 소개하였으니 덕산향토지에 나온 전설을 소개한다.
홍주 마을에 사는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다.
수덕도령은 훌륭한 가문의 도령이었는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넛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했으나
여러 번 거절을 당한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다시 목욕재계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 일어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다 지었다.
그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 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버선 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한다. 낭자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여,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다.
관음전 옆 암벽 앞에 조성된 관음불은 이 설화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설화에 나오는 <버선 한 짝> 이야기는
원효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낙산사를 찾아갔을 때 얽힌 이야기와도 비슷하여 함께 소개한다.
<원효대사와 짚세기>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동해의 관음굴(현 낙산사)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소식에 원효(元曉)대사도
관음진신을 친견하기 위해서 낙산사를 찾았는데,
도중에 벼를 베고 있는 흰옷 입은 여자를 만났다.
희롱 삼아 그 벼를 달라고 하였더니, 여인은 다 익은 벼를 두고도
벼가 열매 맺지 않았다고 희롱 섞인 대답을 했다.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렀는데, 속옷을 빨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먼 길을 온 터라 목이 말라 원효가 먹을 물을 청하자
여인은 물을 떠 주었는데 물을 보니 핏빛이었다.
이를 본 원효대사는 그 물을 버리고 냇물을 다시 떠 마셨는데,
그때 소나무에 앉았던 파랑새 한 마리가
“제호(醍醐)를 싫다고 하는 화상, 제호를 싫다고 하는 화상”이라 하면서
조롱 섞인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기이하다고 여기는 동안
어느새 여자와 새는 사라지고 짚신 한 짝만 여인이 머물던 자리에 남아 있었다.
별반 생각 없이 다시 길을 나서 낙산사의 관음상 도착하니
관음상 밑에 바로 전에 냇가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짚신 한 짝이 보였다.
불현듯 파랑새의 읊은 그 소리가 떠오라 생각해 보니
앞서 만났던 여자가 바로 관음의 진신임을 깨달았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고도 이를 알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후회하고
관음굴로 들어가서 진신을 친견하려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금산으로 내려와 각고의 수행으로 관음보살을 친견한 뒤
원효대사는 683년에 이곳에 절 하나를 지으니 그 절이 보광사다.
이 절이 바로 한국의 3대 관음도량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지금의 금산 보리암(菩提庵)이다. 보리암의 옛 이름이 바로 보광사인 것이다.
(본방 ‘덕지본유 실지본무’ 참조)
관음보살은 경전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천변만화하는 형태를 띠므로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며
33신(身)이 있다고 한다.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脇侍)로서 태장계(胎藏界) 만다라의 중대(中臺)
팔엽원(八葉院)의 서북방에 거처하면서 동시에
연화부원(蓮華部院)의 주존불이기도 하다.
관세음 또는 관음은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테슈와라(Avalokitesvara)의 한역이며,
아박로지저습벌라(阿縛盧枳低濕伐羅)로 음역(音譯) 되기도 한다.
밀호(密號)로는 정법금강(正法金剛) 또는 청정금강(淸淨金剛)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관음보살은 일반적으로 여성적인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관음은 초기 대승경전인 『법화경』·『대아미타경』 등에서도 남성명사로 나타나며,
그 이후의 그림과 조각에도 흔히 남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관음보살은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분간하기가 힘든 보살인데,
기원적으로 볼 때 여성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은 불교에서 발전한 ‘변성 남자’, 즉 여자가 성불할 때는
일단 남성으로 전환하여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정토 경전류의 사상과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변성 남자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나 아직까지 정설은 없다.
관음보살은 과거 전생에 정법명왕여래(正法明王如來) 부처님인데
대비원력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관음보살로 화현했다는 것이라든지,
또는 어원으로 보아서 「관세음」은 범어의 「아바로기데 스바라」인데,
이는 인도하반의 희랍식민지에서 숭배하던 해신 곧(아폴로)의 전화요,
(스바라)는 인도 브라만교의 주신인 스바이니,
이 두 말이 연결합성으로 된 말이라는 점에서 관음보살은 남성이라고 보인다.
여래와 보살의 배우자는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유일하게 경전에서 밝혀진 것은 석가모니불이다.
옛 고타마싯달타가 깨달음을 얻기 전 배우자가 바로 야소다라이다.
경전에 따르면 부처의 10대 제자 중 밀행제일(密行第一)로 꼽히는 라훌라는
고타마싯달타와 야소다라 사이에 태어난 친자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불교 경전에 따르면 석가모니 이전에 이미 천불(千佛)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드러난 7분의 여래를 과거칠불이라고 불리는 데
비바시불(毘婆尸佛), 시기불(尸棄佛), 비사부불(毘舍浮佛), 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불(拘那含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가리킨다.
「불설칠불경」 이나 「장아함」 <대본경>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을 포함한 7불이 모두 한 명의 자식을 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보살의 경우는 유일하게 배우자를 둔 것은 관음보살 한 분이다.
그 배우자가 타라(tara, 多羅)이다. 타라는 우리나라 불교권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주로 라마불교의 영향을 받은 동남아국가나 티베트, 몽골 등에서
관음보살의 배우자로 관음보살보다 더 많이 숭배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종합해 보면 관음보살은 남성임이 분명한데
설화나 전설에서는 여성으로 나타나 있다.
(본방 ‘관음보살의 배우자 타라이야기’ 참조)
그러나 남자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이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진나라 때 의회 11년의 일이다. 태원에 사는 곽선과
촉군에 사는 문처우 두 사람은 양주자사 양수경과 서로 교의가 두터운 친우였다.
자사 양수경은 죄를 지어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관선과 문처우도 양수경의 죄목에 연루되어 같이 붙들려서 옥에 갇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뜻을 합쳐 10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성껏 관음보살을 염송하였다. 그런데 꿈에 비구스님 한 분이 와서
별일이 없으니 안심하라는 몽사가 있고 난 뒤 곧 무사히 방면되었다고 한다.
또는 송장흥의 허가 옥에 갇혀서 10일간을 주야로 계속하여 염송을 외웠더니
꿈 가운데 한 비구가 나타나서 몸을 잡아 흔들면서
(애달프기도 하다. 어서 일어나거라.)하고 사라졌는데
꿈에서 깨어 보니 목에 결박한 오랏줄이 저절로 풀려서 무사히 탈출했다는 것이다.
또 진나라 흥녕 연간에 법의대사가 병이 들어
심한 고통 중에도 관세음을 부르며 외우기를 일심으로 계속하였는데
어느 날 꿈에 도인 한 분이 와서 병을 여러 가지의 진단으로 관찰하더니
도인은 환자의 배를 째고 위장을 꺼내어 물에 흔들어 씻은 다음
다시 뱃속에 넣고 꿰맨 뒤에 사라졌다.
꿈을 깨고 보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하였다.
관음전
관음보살의 보관에 아미타불이 묘각 되어 있고,
좌측에 동자상(선재동자)을 우측에 용왕이 묘사되어 있다.
관음보살의 지물인 보병(寶甁) 동자상 위의 절벽에 묘사되어 있다.
대나무 숲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지(楊枝)관음인가?
명부전
지하(地下)의 세계인 유명계(幽冥界) 또는 명토(冥土)라 하며
염마왕(閻魔王)이 다스리는데, 그 다스리는 곳 모두를 통틀어
또는 그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궁궐을 명부(冥府)라 하고
염라부(閻羅府), 지부(地府)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그 명부에 떨어진 육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보살이다.
흔히 대원본존지장보살(大願本尊地藏菩薩)이라 하는바
지장(地藏)은 '지지(持地), 묘당(妙幢), 무변심(無變心)'이라 번역하는데,
'도리천'에서 석존의 부촉(咐囑)을 받고 매일 아침 선정(禪定)에 들어
중생의 근기(根基)를 관찰하며, 석가세존이 입멸한 뒤부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몸을 6도(六道,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에
나타내어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한 보살로 알려져 있고, 그 밀호(密號)를
'비원금강(悲願金剛), 여원금강(與願金剛)'이라 하며,
그 형상은 천관(天冠)을 쓰고, 가사를 입고, 왼손에 연꽃을 들었으며,
오른손에는 보주(寶珠)를 들었는데, 그 모습이 정식이지만
후대에 이루어진 형상으로 왼손에 석장(錫杖),
오른손에 보주를 든 모습도 보인다. 보주를 흔히 마니보주라 한다.
마니보주(摩尼寶珠)는 주(珠)ㆍ보(寶)ㆍ무구(無垢)ㆍ여의(如意)ㆍ보주(寶珠)
혹은 여의주(如意珠)라 하는데, 이 구슬은 용왕의 뇌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사람이 이 구슬을 가지면 독이 해칠 수 없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혹은 제석천왕이 가진 금강저로 아수라와 싸울 때
부서져서 남섬부주에 떨어진 것이 변하여 이 구슬이 되었다고도 한다.
또는 지나간 세상의 모든 부처님의 사리가 불법이 멸할 때
모두 변하여 이 구슬이 되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범마니(梵摩尼)ㆍ일정마니(日精摩尼)ㆍ월정마니(月精摩尼) 등의 종류가 있다.
지장보살은 흔히 삭발한 승려의 모습으로, 머리 뒤에는 서광이 빛나고
두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또한 한 손에는 지옥의 문이 열리도록 하는 힘을 지닌
육환장(六環杖: 錫杖을, 다른 한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장상명주(掌上明珠)를 들고 있다.
지장보살은 고통받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날 수 있으므로
윤회의 여섯 세계, 즉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에 상응하는
6가지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수덕사의 지장보살상은 왼손에 보주를 든 지장보살상 뒤에 지장탱을 봉안했다.
지장탱은 오른손에 보주를 왼손에 육환장을 들고 있고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더불어 시왕들 권속이 둘러쌓고 있다.
@이니보탑과 환희대
이니(二尼)보탑은 비구니(여승)들이 수도하는 암자로 원통보전 입구에 있는 탑이다.
이 탑의 조성 경위는 월송, 정진 두 스님을 기리고자
1926년에 건립한 한 탑으로 환희대는 비구니스님들의 도량인 셈이다.
환희대는 『청춘을 불사르고』를 지은 김일엽(金一葉)이 주석 열반한 곳이다.
환희대의 본당은 원통보전이다.
<김일엽스님>
김일엽(金一葉, 1896년 4월 28일 ~ 1971년 2월 1일)은
일제 강점기의 여성 운동가, 언론인, 시인이자,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며 시인 겸 수필가이다.
일본 유학 중에 만난 친구 춘원 이광수가
일본의 여성 작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의 이름에서 따와
지어준 필명을 따서 일엽이라는 필명을 썼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배려로 삼성 보통고등학교를 마쳤다.
그 뒤 1913년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18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일본 닛신여학교(日新女學敎)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 시기부터 화가 나혜석 등과 함께 자유 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다.
일본 유학 중 문인으로 데뷔하여 시와 소설, 칼럼 등을 발표하였으며,
귀국 후 1920년에는 폐허 지의 동인으로 참여하고,
1920년에는 신여자지를 직접 창간하였다.
언론 활동으로는 1921년과 1931년 매일신보의 기자로 있었고,
동아일보의 기자로도 있었으며,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 문단,
매일신보 등에 칼럼과 논설을 기고하였고,
1925년부터 3년간 아현보통학교의 교사로도 근무하였다.
나혜석, 김명순 등과 함께 여성 해방론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고,
여성의 의식 계몽을 주장하는 글과 강연, 자유연애 활동을 하였다.
이화학당 시절부터 종교에 대한 회의를 해오다,
1927년 불교 잡지 불교의 문예란에 기고하면서
불교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끌게 된다. 1930년대 초 서울의 선학원 등에서
참선을 하였으며, 1933년 만공 선사를 뵙고 출가,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1971년 입적한다.
출가 시 만공 선사가 선수행을 위해 읽고 쓰는 것을 중단하라는 말을 따라,
20여 년 집필 활동을 중단하다 1950년대 후반에 다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1960년에 <어느 수도인의 회상>을 발표하고,
1962년 <청춘을 불사르고>를 발표하며,
1964년에 마지막 저서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를 발표한다.
불명(佛名)은 하엽(荷葉), 도호(道號)는 백련도엽(白蓮道葉),
하엽당(荷葉堂), 본명은 김원주(金元周), 다른 이름은 원주(源珠)이다.
@원통보전
편액은 원담 스님의 글씨이며,
닫집은 圓通宮(원통궁), 慈悲宮(자비궁). 普光宮(보광궁)이란 편액이 붙어 있다.
본존은 관음보살이다. 이 닫집은 관음보살의 주처인
연화부원(連華部院)을 상징한 모양이다.
이 건물은 1985년 제11회 대한불교 미술대전에서 입상한 수작으로 알려져 있다.
3단의 돌로 축대를 쌓고 면석과 탱주가 조성된 기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연화부원(連華部院)은 태장만다라 12대원의 하나로서
중대 팔엽원 북쪽에 위치하며 성관자재보살(聖觀自在菩薩)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보살21존과 16 사자(使者)를 합해 총 37 존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일경소에 따르면 여래가 대비(大悲)의 삼매(三昧)에 안주(安住)하여
중생의 온갖 선근을 성취하게 하는 덕을 나타낸 것이 본원의 의미인 것이다.
본원은 관자재보살 대비의 덕으로 중생을 번뇌(煩惱)의 때(垢)에 더럽혀지지 않고
본래 갖추고 있는 정보리심(淨菩提心)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 흙탕물에 오염되지 않고 청정무구한 꽃을 피우는 연꽃과 같음을 말한다.
본래 갖추고 있는 정보리심을 제(諦)라 하는데 실담범자로 사따(諦)라 한다.
또한 무집착(無執着)을 아사끄따(asakta)라고 하는데
사(sa)를 진리(諦)라 하며, 본원에서는 선근(善根)의 종자(種子)로 사용한다.
수행으로는 대비삼매(大悲,三昧)에 들어 무분별 수행인
사마따(止)수행으로써 모든 망념을 그치고,
정(靜)에 들어 정보리심을 사유관찰(思惟觀察)하는
구별의식의 수행을 동시에 하여야 한다.
이를 정혜쌍수(定慧雙修) 혹은 지관쌍수(止觀雙修)라 한다.
#관음보살은 여러 가지 몸으로 보문시현을 하신다. 그중 33 관음의 한 분인
어람관세음보살(魚籃觀世音菩薩)에 얽힌 보문시현 전설 하나를 소개한다.
이 어람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염하면 나찰(羅刹), 독룡(毒龍),
악귀(惡鬼)의 해(害)를 제거해 준다는 보살이다.
손에 어람을 가지고 있거나 물 위에서 큰 물고기를 탄 형상을 하고 있다.
어람(魚籃)은 물고기를 담는 바구니를 의미한다.
어람관음상찬서(讚序)에 이르시기를,
「당나라 원화(元和 서기 817) 12년에 섬우(陝右)의 금사탄(金沙灘) 위에
한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람(籃)을 들고 고기를 팔았다.
사람들이 다투어가며 이 아름다운 여자를 자신의 소실을 삼으려 하자
여인이 말하기를 내가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품을 한 권씩 줄 터이니
하룻밤에 이 보문품을 외우는 사람이 있으면 남편을 섬기겠다고 하였다.
날이 밝아지자 능히 외우는 자가 20명이나 되었다.
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한 사람인데 여러분을 다 섬길 수가 없으니
바라건대 하룻밤에 사이에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외울 수 있다면
나는 그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 새벽에 ‘금강경’을 외우는 자가 10명이나 되었다.
미녀가 또다시 말하기를 ‘묘법연화경’을 삼일 동아 외우는 자를
나는 진정 남편으로 받들며 살겠다 하였다.
삼 일이 지나자 오직 마 씨의 아들만이 외울 수 있었다.
그 미녀가 약속한 대로 예를 갖추어 성혼하여 문에 들어가자마자
그 미녀는 죽어서 그 자리에서 타버렸다.
그 시신의 재를 가져다 묻었더니 어느 날 한 스님이 찾아와서
마 씨와 같이 무덤을 파보니 오직 황금 부스러기 골만 남았으므로
그 스님이 말하기를 이는 관세음보살님의 시현이고
마씨 당신을 교화제도 하기 위함이었다고 말을 마치자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이처럼 어람관세음보살이 시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8월 19일 불국사 대웅전 불상 뒷기둥에서 발견되었는데
전문가들의 감식결과 1769년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가
불국사 대불사 때 조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원통보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위에 석등과 사자상이 조성되어 있다.
사자상 옆에 핀 붉은 장미가 마치 사자가 입에 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주문은 나서는 참배객을 전송이나 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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