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서운산 청룡사
2021. 7. 18. 12:37ㆍ국내 명산과 사찰
경기도와 충청남도의 경계 지역에 있는 서운산은
안성시에서 남쪽으로 약 12㎞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해발 547m로 아담하고 바위도 거의 없는 유순한 산세에 푹 안겨
가족들끼리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산행코스로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높은 산이다.
서운산 청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2교구 본사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1265년(고려 원종 6년)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년)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고 하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절 안에는 대웅전(보물 824호), 관음전, 봉향각, 지봉각, 명부전, 산신각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 석탑 등이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은 현재 보수 중이다.
법당 안에는 봉안되었던 1674년(조선 현종 15년)에 만든 5톤 청동 종과 괘불,
감로탱을 모두 따로 보관되어 있다.
청룡사 사적기에 의하면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원찰(願刹)이었으며,
1900년대부터 등장한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이들은 청룡사에서 겨울을 지낸 뒤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며 생활했다 전한다. 그래서 지금도 건너편에는
남사당 마을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남사당패의 발생지로서
조선 시대 최고의 예술가이자 최초의 연예인으로 평가되는
안성 “바우덕이”의 묘도 청룡사가 있는 서운산 기슭에 있다.
청룡사사적비 靑龍寺事蹟碑
시대: 조선 후기
문화재지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건립 시기:1720년(숙종 46)
성격: 금석각, 사적비
비좌의 높이 31㎝, 가로 134㎝, 세로 86㎝, 빗몸돌의 높이 189㎝,
너비 73㎝, 두께 30.7㎝, 옥개 높이 50㎝.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원제는 ‘조선국 경기도안성 서운산청룡사 중수사적비
(朝鮮國京畿道安城瑞雲山靑龍寺重修事蹟碑)’이다.
직사각형 비좌(碑座) 위에 세운 빗돌과 그 위에 덮은 옥개석으로 구성되었다.
빗돌은 화강암이어서 매우 단단하나 마멸되어
글씨를 판독할 수 없는 곳이 여러 군데이다.
비명과 서문은 동현거사(洞玄居士) 나준(羅浚)이 짓고,
전 직산현감 황하민(黃夏民)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사헌부 지평 김진상(金鎭商)이 썼다.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비양(碑陽 : 비의 앞면)은 서와 명(銘)으로 되어 있는데,
서문의 내용은 고려 말기 지정 연간(至正年間 : 1341∼1367)에
나옹(懶翁)이 중창한 사실과 1720년(숙종 46)에
도인(道人)이 중수한 내용 등 연혁을 차례로 서술하고,
덧붙여서 세조가 토지와 절의 기물(器物)을 하사한 일,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원당(願堂)으로 삼고 절을 보호한 일 등을 적었다.
비명의 내용은 서문과 대동소이하며 다만 맨 끝에
“서방정토에 들어가는 사람은 공(空)과 유(有)를 분별치 않으나,
오로지 비석을 공문(空門) 앞에 세워 후세에게 공렬(功烈)을 전하려는 것”이라고
비석을 세운 이유를 밝히고 있는 점이 다르다.
비명 끝에는 ‘英烈殿下卽位之四十七年庚子七月日立
(영렬전하 즉위지47년 경자7월일입)’이라고 건립 시기를 밝히고 있는데,
이는 1720년(숙종 46)을 가리킨다.
비음[碑陰 : 비의 뒷면]에는 서문을 쓰고 이어서 산중대덕(山中大德)과
시주의 방명록을 기록하였다. 서문에서는 청룡사의 연혁을 간략히 정리하였는데,
원나라 세조 지원연간[至元年間 : 1264∼1294]에
대장암(大藏庵)으로 창건되었고 지정 연간에 중창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방명록의 체재를 보면 노덕질(老德秩)·불량답시주질(佛粮畓施主秩)·
철물대시주(鐵物大施主)·연화질(緣化秩)로 되어 있다.
노덕질에는 산중대덕과 지전(持殿)·지사(持寺)·삼강(三綱)·
주지(住持)·화사(化士) 등의 직책을 가진 승려 13명이 기록되어 있고,
불량답시주질에는 승속(僧俗)을 합하여 64명,
철물대시주에는 승속을 합하여 17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끝으로 연화질에는 석수·편수·각공·각수·조역 등이 8명,
공양주가 4명 합하여 12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방명록은 1720년을 전후한 청룡사의 중수 불사에 참여하였던
승려와 일반 불자의 명단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18세기 초의 불교사원 건축공사의 성격을 살피는 데도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찰 안내서는 천왕문으로 되어 있으나 사천왕은 앞에서 보아도, 뒤에서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일주문으로 보는 것이 합당 것이다.
대웅전은 현재 보수 중이다. 옛전의 대웅전 모습을 대형 사진으로 조성해 놓았다.
불상과 각종 탱화 등은 가건물로 옮겨 놓았다.
범종각
대개 범종각이나 범종루에는 불전사물(佛殿四物)을 배치한다.
불전 사물은 법고(法鼓), 운판(雲板), 범종(梵鍾), 목어(木魚)를 말한다.
2층의 누각(樓閣)으로 되어 있을 때는 범종루라 하고,
불전사물 가운데 범종만을 봉안하는 경우에는 범종각이라고 한다.
청룡사 범종각에는 불전사물 중 이상하게도 목어만 보이지 않는다.
범종 아래 큰 구명을 파놓은 것은 울림을 위한 것인데
이를 명동(鳴洞)이라고 한다.
원당(願堂)은 조선 시대에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세상을 떠난
왕과 왕비의 명복을 빌던 사찰을 원당(願堂)이라고 하는데,
고려 시대에 창건된 청룡사 또한 원당이었는 듯 모양이다.
나옹선사가 중창한 이후 공민왕의 초상을 모신 사찰이었으며,
조선 후기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원찰이 되었다.
사적기에 의하면 효종의 동생이며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1622∼1658)이 특히 청룡사를 많이 후원했다고 전한다.
청룡사는 그의 초상화를 모신 원당으로 알려져 있다.
봉향각 안은 문이 닫혀 있어 안은 살피지 못했다.
관음전은 관음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법당 안에는 고려 후기에 조성된 금동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안성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 安城靑龍寺金銅觀音菩薩坐像
시대: 고려 후기
문화재지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0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0호. 1265년(원종 6)에
명본대사에 의해 대장암(大藏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던 것을
1364년(공민왕 13)에 나옹화상이 중창하면서 청룡사라고 개칭했다고 한다.
사찰에서 전하는 바로는 이 금동관음보살상도 중창 당시에 조성됐을 가능성이 있다.
달걀형의 갸름한 얼굴에 화려하게 장식된 높은 보관을 쓴
관음보살상으로 전형적인 14~15세기의 조각이다.
보관 속의 머리는 뭉툭한 상투처럼 높게 묶었고,
나머지 검은 머리카락이 굵은 가닥으로 양쪽 어깨 위에 흘러내렸다.
이러한 머리 모양은 중국 당대에 유행하기 시작해서
우리나라로 전해진 오랜 전통을 따른 것이지만 크고 호화로운 보관은
고려 후기에 더해진 요소이다.
달걀형의 얼굴 하단, 입과 턱 주위에 살집을 표현하여 후덕한 인상을 준다.
가늘게 내리뜬 눈과 아래로 처진 눈썹, 알맞은 높이의 코와 작은 입술은
고려 후기 불교 조각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어깨가 좁고 가파르게 내려갔으며,
가슴과 배에 약간의 양감이 있어서 여성의 신체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14세기 보살상의 특징이다.
가늘고 섬세하며 여성적인 손은 부드럽고 섬세하게 보인다.
두 손 모두 엄지와 중지 손가락을 맞댄 채,
오른손은 위로 들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했다.
이러한 수인은 원래 아미타불의 수인이지만 보살상에도 자주 적용되었다.
가슴에는 세 줄의 장식이 늘어진 목걸이를 했는데
영락이 옷 위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두 어깨에 걸친 옷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렸고,
무릎의 윤곽을 강조하는 것처럼
다리 위의 옷 주름은 옆으로 누운 8자처럼 처리되었다.
단정하고 아담한 신체 묘사, 얼굴과 다리, 신체의 곡선적인 양감 처리,
세부가 살아있는 이목구비, 복잡하고 화려한 보관과
귀 옆으로 늘어진 장식이 위로 솟구치듯이 과장된 점에서
14~15세기, 고려 말~조선 초의 보살상들과 친연성을 보인다.
보관은 후대에 다시 만들어 씌웠다고 하지만
고려의 보살상도 비슷한 형태의 보관을 쓰고 있어서
유사한 예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입체감 있는 안면 묘사, 작고 가는 눈과 둥글게 휘어있는 눈썹,
좁고 가파른 어깨를 가졌으면서도 인체의 양감이 보이는 점,
상대적으로 긴 허리와 두툼한 두 다리에서
고려 시대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274년의 발원문이 있는 개운사(開運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650호)과
1447년에 중수된 파계사(把溪寺)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이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 편년에 좋은 참고가 된다.
<자료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재 이 청룡사 삼층석탑은 청룡사 대웅전 앞에 있는 것을
대웅전 보수 관계로 옮겨 놓은 것이다.
1985년 6월 28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높이가 2.38m로 평면 사각형의 단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렸다.
이 탑은 부분적으로 파손된 지대석 위에 3단의 받침이 기단을 받치고 있다.
기단은 4장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각 면에 모서리 기둥과 버팀 기둥이 새겨져 있다.
탑신석과 옥개석의 지붕돌은 각각 다른 돌로 만들어졌으며
탑신석의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우주)이 조각되어 있다.
상대면석에는 탱주가 하나 보인다.
1층 탑신보다 2층과 3층 탑신의 높이가
급격하게 낮아져 비례가 흐트러져 보인다.
지붕돌은 경사가 급하다가 전각에 이르러
살짝 반전되었으며 합각선이 뚜렷하다.
상륜부는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옥개석은 많이 훼손되어 있다.
괘불대가 있다는 것은 이 사찰에 괘불이 있다는 의미다.
청룡사는 보물로 지정된 영산회탱이 있다.
명부전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우측에 시왕 들이 나열되어 있다.
명부전에서 유독 범종 하나가 눈에 띄어 살펴보았더니
이 종이 사인 비구가 제작한 보물 제11-4호 범종이었다.
대웅전 보수 관계로 임시 이곳에 옮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사인비구 제작 동종 - 안성 청룡사 동종
(思印比丘 製作 銅鍾 - 安城 靑龍寺 銅鍾)
문화재지정: 보물 제11-4호
크기: 전체 높이 132㎝, 입지름 90㎝
재질: 청동
제작 시기 : 1674년(현종 15) 4월
보물 제11-4호. 현재 청룡사 명부전에 봉안된 청룡사 동종은
종신에 “강희 13년 갑인 4월 일 경기 안성군지
남면 서운산 청룡사 대종 800근 …
연화질 화원 사인 지준 태행 도겸 담연 청윤
(康熙十三年 甲寅四月日 京畿安城郡地 南面 瑞雲山
靑龍寺大鍾八百斤 … 緣化秩 畵員 思印 智俊 太行 道兼 淡衍 淸允)”이라는
내용의 주종기(鑄鍾記)가 남아 있어, 1674년 4월
경기도 안성시 남면(현재 서운면) 서운산에 위치한 청룡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사인을 비롯하여 지준·태행·도겸(道謙)·담연(淡衍)·청윤(淸允) 등
총 6명의 주종장이 제작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룡사 동종은 전체 높이가 132㎝이고, 입지름이 90㎝로,
17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동종 가운데 규모가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있어 크기에 걸맞은 육중한 무게감을 보여준다.
종의 형태는 천판(天板)에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다
중앙에서 종구까지 거의 직선으로 떨어지고 있어,
종구가 좁아지는 모양을 보인다.
둥글고 높게 솟은 천판 위에는 한 마리 용이 음통(音筒)을
꼬리로 감싸는 전통형의 종뉴(鍾鈕: 용뉴)가 부착되어 있고,
천판 바로 밑에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과
파지옥진언(破地獄眞言)을 쓴 원권(圓圈)의 범자(梵字)를 2줄로 둘렀다.
그 아래에는 굵은 덩굴무늬 띠에 9개의 만개한 연꽃을 표현한
사각형 연곽(蓮廓) 4개를 배치하였으며,
연곽 사이사이에는 구름 위에서 연꽃 가지를 든 아름다운 보살 입상과
왕실의 안녕과 불법의 전파를 기원하는
“종도반석 왕도미륭 혜일장명 법주사계
(宗啚磐石 王道彌隆 惠日長明 法周沙界)”라고 쓴
장방형의 불패(佛牌)를 부조하였다.
그리고 종구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연화당초문(蓮花唐草文)을 전체적으로 둘렀다.
청룡사 동종은 천판과 종구의 형태를 비롯하여 천판 위에 부착된 종뉴(용뉴)와
종신 상부와 하부에 부조된 원권의 범자, 정사각형의 연곽,
구름 위에서 연꽃을 쥔 보살 입상,
왕실의 안녕과 불법의 전파를 기원하는 불패, 연화당초문 등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사인과 태행이 공동으로 제작한
포항 보경사 서운암 동종(1677년), 문경 김룡사 동종(1670년 2월),
홍천 수타사 동종(1670년 5월) 등에서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청룡사 동종의 주종기에는 “연화질 화원 사인·지준·태행·도겸·담연·청윤” 등
제작에 참여한 주종장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순서가 사인, 지준, 태행 순으로 되어 있지만,
태행은 1667년 포항 보경사 서운암 동종, 1670년 2월 문경 김룡사 동종,
1670년 5월 홍천 수타사 동종을 사인과 공동 제작하면서
수장(首匠) 역할을 한 인물이며, 지준은 1669년
서산 부석사 동종을 원응(元應)과 함께 제작한 인물이자
사인과 태행의 선배 장인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안성 청룡사동종 제작에 참여한 사인, 지준, 태행 3명이
모두 우두머리 장인으로서 공동 작업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우두머리 장인들이 공동 작업으로
동종을 제작하였음을 증명해주는 대표적 자료이며,
주종장 체계와 분업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도 평가된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인비구제작 동종은 모두 8구로 보물 제11호 지정되어 있다.
강화 동종은 1963년 1월 21일에,
나머지 7구는 2000년 2월 15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사인은 18세기에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더하여 종을 제작했다.
포항 보경사 서운암 동종(보물 제11-1호),
문경 김룡사 동종(보물 제11-2호),
홍천 수타사 동종(보물 제11-3호),
안성 청룡사 동종(보물 제11-4호),
서울 화계사 동종(보물 제11-5호),
양산 통도사 동종(보물 제11-6호),
의왕 청계사 동종(보물 제11-7호),
강화 동종(보물 제11-8호) 등 8구이다.
안성 청룡사 대웅전 (安城 靑龍寺 大雄殿)
문화재지정: 보물 제824호
시대: 고려 원종 6년(1265)
청룡사는 원래 고려 원종 6년(1265) 명본국사가 세워
대장암(大藏庵)이라 불렀던 곳이다.
공민왕 13년(1364) 나옹화상이 크게 넓히면서 청룡사라 이름을 고쳤는데
청룡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광경을 보고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건물로 추측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 윗몸에
연꽃과 연꽃봉오리를 화려하게 조각해 놓아
장식이 많이 섞인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인다.
기둥은 전혀 가공하지 않은 원목을 그대로 세운 것이 눈길을 끈다.
이 대웅전은 안쪽에 조선 헌종 15년(1674)에 만든 범종을 보관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의 건축 기법과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14년부터 해체보수 중에 있다. 금년 말 완공으로 보인다
안성 청룡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 (安城 靑龍寺 塑造釋迦如來三尊像)
문화재지정: 보물 제1789호
시대: 1603년
보물 제1789호. 청룡사 대웅전에 봉안된 소조석가여래삼존상으로,
불상 내부에서 푸른 비단에 붉은색 글씨로 적힌 발원문 4매와
『묘법연화경권(妙法蓮華經)』권4가 발견되었다.
발원문에는 제작 시기와 불상 조성에 관여한 승려의 소임과 이름,
화원 명단이 적혀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1603년 8월 수조각승 광원(廣圓)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조성시기와 제작자가 명확한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반의 작품으로 중요하다.
이 석가여래삼존상은 임란(壬亂)이후 대형 소조 불상이 유행하기 시작한
17세기 불상 중 가장 이른 소조불상으로,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 있다.
내부에서 발견된 발원문을 통해 광원과 그 아래 만주(萬珠),
유일(有一), 이금정(李今貞), 각통(覺通), 정현(晶玄) 등
여러 승려 장인과 함께 일반 장인도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례적인 예라 하겠다. 이들 모두 다른 작품 활동 사례는 보이지 않아
전승 관계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 소조 석가여래 삼존상은 짧은 신체와 큰 머리, 좁은 어깨,
턱 부분으로 좁아지는 갸름한 얼굴, 율동적이고 입체감 있는 옷 주름,
왼쪽 손 아래 세 잎 모양의 나뭇잎처럼 표현된 옷자락 등이 특징이다.
석가여래상은 왼손은 무릎 위에 두고 엄지와 맞대었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살짝 내려놓은 항마촉지인을 취하였다.
그리고 곧고 당당한 자세로 앉아 있으며 무릎이 높아 신체비례가 알맞다.
머리는 낮고 나발은 크고 듬성듬성하며 정수리에 정상 계주를 표현하였다.
턱이 좁은 역삼각형의 얼굴은 눈두덩이가 두껍고 좌우로 기다란 눈,
이마와 연결되는 편평한 콧등, 돌출된 인중,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작은 입 등의 표현으로
날카로우면서도 미소 짓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착의법은 변형 편단우견 식으로 대의를 걸쳤는데 오른쪽 팔을 드러내었고
밋밋한 가슴 아래에는 연꽃잎으로 유연하게 주름잡은 승각기가 보인다.
양손은 나무로 제작되었으며,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설법인을 나타내었다.
오른쪽 어깨를 덮은 대의 옷 주름이나 왼쪽 팔목 아래로 무릎에 드리운
넓은 나뭇잎 형 옷자락, 두 다리 사이의 옷 주름 등은
풍만감 있게 굴곡지면서도 번잡한 양상을 띤다.
좌우의 보살상들은 머리가 크고 신체 길이가 짧아 불균형한 신체비례를 보인다.
곧은 자세로 서 있는 보살들의 얼굴 표현은 본존불상과 유사하다.
여래상과 달리 머리에는 꽃과 화염보주가 화려하게 장식된 높은 보관을 썼고
정수리에 높은 상투머리가 올라가며 어깨 위로 머리카락이 굴곡지게 흘러내린다.
또한, 귀에는 귀를 감싼 띠형 귀걸이, 가슴에는 큼직하고
둥근 꽃무늬가 장식된 목걸이, 팔에는 둥글고 간략한 팔찌를 착용하였다.
착의법도 내의 윗주름이나 대의 옷 주름은 유연하고 복잡하게 표현되었는데,
흙의 가소성(可塑性)이 잘 활용된 듯하다.
좌우 협시보살상의 보관은 후보(後補)된 것이며,
목걸이나 수인에 있어서는 서로 닮은꼴에 가깝지만,
착의법은 좌협시인 문수보살상은 어깨 위로 숄(shawl)형 천의를 걸쳤고
두 보살상의 옷 입는 형식은 다르지만 옷 주름 표현은 볼륨감과 번잡함이 유사하다.
우협시인 보현보살상은 편삼 위에 대의를 걸친 변형 통견식으로 착용하여
본존불상과 차별화하였다. 또한, 두 보살상 모두 가슴 아래로 승각기가 보이고
이를 묶은 띠 매듭이 두 가닥으로 짧게 드리운다.
안성 청룡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은 1603년에 제작되었으며
역삼각형의 독특한 상호와 풍만감 있는 옷 주름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품 수가 적은 17세기 초반의 불상인 점과
조각승 광원의 유일한 불상이라는 점에서
17세기 불교 조각의 태동과 변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참조 인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룡사 신중탱은 범천과 제석천 옆에 동진보살(위태천)을 묘사한 것이 특이하다.
청룡사 영산회 괘불탱 (靑龍寺 靈山會 掛佛幀)
문화재지정: 보물 제1257호
소장: 안성 청룡사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괘불로,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 회화를 말한다.
이 영산회상도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6대 보살, 10대 제자 등이 에워싼 모습인데,
중앙의 석가불은 머리에서 빛이 나고 특이하게도 오른손은 어깨 위로 들고
왼손은 무릎에 올린 시무외인의 손 모양을 하고 있으며,
다리는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관을 쓴 제석천, 면류관에 홀을 든 범천상,
책과 연꽃·정병 등을 들고 있는 6명의 보살 등이 석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석가 위로는 여러 제자와 부처의 수호신인 4명의 금강역사상이 있고,
그림의 맨 윗부분에는 여러 불상이 작게 그려져 있다.
주로 진한 붉은색과 청색이 많이 사용되었고
복잡한 구도로 인해 무거운 느낌이 들지만,
윗부분에서 보여주는 화려함과
아랫부분의 무늬로 인해 여유 있어 보인다.
이 그림은 효종 9년(1658)에 승려화가인 명옥 등이 그린 것으로
본존의 크기가 매우 컸던 고려말∼조선 초의 그림과는 달리
본존인 석가불이 작아져 상대적으로 주변 인물의 크기와 비슷해진 그림으로,
17세기 중엽 영산회상도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청룡사 감로탱 (靑龍寺 甘露幀)
문화재지정: 보물 제1302호
소장: 안성 청룡사
감로탱은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그린 불교 그림이다.
이 그림은 가로 200㎝ 세로 237.5㎝ 크기이며 3단으로 화면구성을 하고 있다.
그림의 맨 윗부분에는 가운데 아미타삼존을 포함한 7여래와
극락세계로 영혼을 인도하는 인로왕보살 등을 그려 이상세계를 표현하였다.
특히 불·보살의 몸을 금가루로 칠했는데,
이는 다른 불화에서는 거의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그림의 중간에는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영혼이 극락으로 인도되길 기원하는 제사상을 차려 공양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아랫부분에는 속세의 여러 장면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당시 풍속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 숙종 18년(1692)에 제작된 이 불화는
명료한 주제와 안정된 구도, 선명한 색채로
조선 후기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중생제도와 유교의 효사상 강조에 따른 종교적 의의 또한 매우 크다.
청룡사부도군
안성 청룡사 부도군(安成 靑龍寺 浮屠群)은 조선 시대의 부도군이다.
1986년 5월 22일 안성시의 향토유적 제27호로 지정되었다.
부도는 스님이 입적 후 유골을 안치한 탑이며,
청룡사 부도군은 청룡사 입구에 있는 사적비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 편에 있다.
석축(石築)의 대지(臺地) 위에 모두 10기의 석조부도를 안치했는데,
대지의 산 쪽으로 1단 높인 곳에 5기를, 낮은 곳에 5기를 각각 건조(建造)했다.
10기의 부도 중 1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종형(石鐘型)으로
방형과 8각, 또는 원형의 지대석 위에 1석으로 조성한 탑신을 안치했다.
8각의 지대석에는 측면과 상면 조직이 있는 것도 있다.
탑신부에도 하단부에도 하단부에 조식이 있는 부도가 있으며,
정면은 거의 보주형(寶珠形)을 이루었다.
또한, 보주형 정상부에서도 보륜을 동일석에 조각하거나
주변에 망련을 조식하는 등 화사한 상륜(相輪)을 이룬 것도 있다.
한편 석종형이 아닌 1개의 부도는 8각원당형을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다.
지대석 위에 상·중·하대를 구성하고, 원주형의 탑신을 놓았으며,
옥개석 위에 화려한 상륜부까지 장식했다.
그리고 「묘화당대사상민(妙華堂大師尙敏)」과 같이
부도의 주인공을 밝혀 기명(記銘)된 것도 있다.
청룡사의 사내 암자인 은적암을 둘러 보기로 했다.
가는 나는 장날이라고 은적암은 불사 중이었다.
은적암(隱寂庵)은 안성 서운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7부 능선에 해당하는 지점에 자리 잡은 청룡사의 부속 암자다.
은적암이라는 사찰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이 등장하는 구비전승과 관련이 있다.
즉 고려 건국 초기에 태조 왕건이 이곳에서 3일간 은거하며
기도를 드렸기에 은적암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은적암은 1265년(원종 6)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안성 청룡사의 부속 암자다.
은적암은 청룡사 창건 이후에 건립되었기에
태조 왕건과 관련된 구비전승은
후대에 부회 된 것으로 보인다.
은적암에는 대웅전·산신각·요사채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현재 불사 중이라 규모를 알 수 없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건물인 산신각 안에는 산신과 용왕탱을 봉안해 놓았다.
용 두마리가 교차하는 형상을 짓고 있는 용왕탱이 특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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