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古傳)이 주는 삶의 교훈 8가지 허물(八疵)과 네 가지 근심(四患)

2021. 3. 3. 19:56삶 속의 이야기들

 

 

영불리신(影不離身)이라는 말이 있다. 그림자는 몸을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사람들이 자신의 허물이나 어떤 일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구하듯 엉뚱한 곳에서 해결책을 찾는

어리석음을 비유할 때 인용되는 말이다.

같은 의미로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발자국을 싫어한다는 뜻으로

‘외영오적(畏影惡跡)’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그림자를 두려워하여 달아난다는 뜻의

‘외영이주(畏影而走)’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있다.

이 사자성어들은 《장자(莊子) 〈어부(漁父)〉》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인데

스스로 근신(謹身)하지 못하고 처신(處身)함에 분수를 지키지 못하여

몸과 마음으로 8가지 허물(八疵;팔자)과 4가지 근심(四患)을

짓게 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이 8가지 허물과 4가지 근심은 크게는 국가 대사를 물론

기업인에게도 교감이 되고, 적게 가정사나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 데도 교감이 되기 때문이다.

8가지 허물 곧 팔자(八疵)는 총(總), 영(佞), 첨(諂),

소(謏), 참(讒), 적(賊), 특(慝), 험(險)을 말하고,

4가지 근심 즉 사환(四患)은

도(叨), 탐(貪), 흔(很), 긍(矜)을 말한다.

 

1)8가지 허물 팔자(八疵)

⓵자기가 할 일이 아닌데 억지로 하는 것을 총(總)이라 한다.

<非其事而事之(비기사이사지), 謂之總(위지총)>

 

사람이 다니는 길이 있고, 동물이 다니는 길이 따로 있듯,

자기에게 주어진 본분을 넘어 티를 내는 일은 삼가해야 된다.

묻지도 않은 남의 일에 나서거나,

자기의 일도 아닌 것을 조언이나 충고를 한답시고

괜스레 개입하거나, 삼국지에 나오는

양수의 계륵(鷄肋)이라는 고사(故事)처럼 자신의 영특함을 과신하고,

또는 자신의 직위나, 부(富)를 믿고 상대방이 원하지도 않은 일을

앞서 행동하는 것은 설령 피해는 아니 될지는 몰라도

적어도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괜스레 남의 가정사에 끼어드는 것도,

남의 일에 호(好), 불호(不好)를 이야기하는 것도

주제넘은 것으로 이는 결국 자신의 허물이 됨을 알아야 한다.

 

산청 수선사

⓶살펴보지도 않고 천거하는 것을 영(佞)이라 한다.

<莫之顧而進之(막지고이진지), 謂之佞(위지영)>

 

어떤 사람을 추천하거나, 천거할 때는 먼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살피고,

그다음에 그 일을 수행할 능력을 살펴야 한다.

남의 평판이나 단소리에 매혹되고, 또 인맥(人脈), 학연, 동향(同鄕) 등

이런 선입감을 가지고 사람을 추천하거나 천거해서는 아니 된다.

어떤 일을 성취함에는 그 사람의 일에 대한 수행능력 평가도 중요하지만

일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를 성취한 다음 일도 대비해야 하므로 항상 일을 하는 주체,

즉 그 사람의 됨됨이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역량이 되지 못한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것 또한

그 사람보다도 일을 맡기는 사람의 허물이 된다는 것 알아야 한다.

 

남일대 코끼리바위

⓷남의 뜻에 영합하여 말을 하는 것을 첨(諂)이라 한다.

<希意道言(희의도언), 謂之諂(위지첨)>

 

옳고 그름을 떠나 내 편이기 때문에 동조하고,

유(有) 불리(不利)에 따라 편을 들고. 호(好), 불호(不好)에 따라서 행동하면

이는 곧 아첨이 됨뿐만 아니라 그 사람까지 망치게 된다.

귀에 단 소리는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끝에는 독이 됨을 유념해야 한다.

 

강화 백련사

 

⓸시비를 가리지 않고 말하는 것을 소(謏)라 한다.

<不擇是非而言(부택시비이언), 謂之謏(위지소)>

 

시비(是非)를 가리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하거나,

일의 전후를 생각하지 못한 급한 성격 때문에 일어나게 되고,

나에 대한 호(好), 불호(不好)와 유(有)불리(不利)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을 시작함에는 항상 시작 전에 그 일의 전후(前後)를 생각하고,

또한 그 일의 진행함에 경중(輕重)을 따진 다음 행동에 나서야 한다.

 

무등산 무애암

⓹남의 잘못을 즐겨 말하는 것을 참(讒)이라 한다.

<好言人之惡(호언인지악), 謂之讒(위지참)>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속성은 남의 말이나 행동에 <예>라고 동조하기보다는

<아니요>라고 부정하는 경향이 짙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을 침소봉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 속담에 입은 모든 재앙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처럼

항상 말을 조심해야 하지만 특히 남을 비난하고,

남의 허물을 꼬집을 때는 말을 뱉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또 깊이 심사숙고 해야 한다.

그래서 옛 성인들은 홀로 있을 때 더욱 근신(謹愼)해야 한다고 말하며,

선어(禪語)에서도 또한 항상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의미로

조고각하(照顧脚下)를 말하고 있다.

 

미아신 은수사

⓺사귐을 막고 친한 사이를 떨어지게 하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

<析交離親(석교이친), 謂之賊(위지적)>

 

역사의 흥망을 보면 충신은 간언하지만, 간신은 아첨을 늘어놓는다.

충언은 귀에 거슬리고, 아첨은 귀를 즐겁게 한다.

그래서 임금과 신하를 이간시키게 되고 나라는 망하게 되는 것이다.

삶 속에서도 가족을 이간시키고, 친구를 이간시키고,

사회와 격리하는 일이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나 내 가까운 사람들이다.

이는 서로 간에 믿음이 약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모자랐기 때문에

남의 작은 소리에도 괴리(乖離)가 생기는 것이다.

때로는 호(好), 불호(不好)와 이해관계가 얽혀 갈등이 생기게 되고,

갈등이 생기면 서로가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친구나, 가족은 이해관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과 신뢰의 관계로 맺어지는 것이다.

믿음과 신뢰는 또한 용서와 포용을 함께 하는 것임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영탑사

⓻거짓으로 남을 칭찬하거나 헐뜯는 것을 특(慝)이라 한다.

<稱譽詐僞以敗惡人(칭예사위이패악인), 謂之慝(위지특)>

 

거짓으로 남을 칭찬하거나 헐뜯는 것은

자신을 향한 유불리와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다.

칭찬받지 못할 사람을 몰라서 칭찬하는 것은 아첨이요,

또한 궁극에 그 사람에게도 죄악을 짓게 만드는 것이다.

하물며 거짓으로 칭찬한다면 그 죄는 더 큰 것이 된다.

남을 헐뜯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때로는 어른이 자식들을 선행으로 유도하기 위해

반어법(反語法)으로 거짓 칭찬하는 때도 있지만

이는 아첨이 아니라 선행을 유도하기 위한 교훈적 훈시이다.

분명한 것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릇된 것은 그르다고 말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중국 심천의 목화석 공원

⓼선악을 가리지 않고 얼굴빛을 꾸며 남의 뜻을 좇는 것을 험(險)이라 한다.

<不擇善否, 兩容頰適(불택선부 양용협적),

偸拔其所欲, 謂之險.(투발기소욕 위치험)>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

사려분별(思慮分別)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라면

두려움이 없어져 매사 외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이비(似而非) 교리에 빠져 맹종(盲從)하는 사람들이나

특정 집단에 예속된 사람들이 대개 이런 행동을 하게 된다.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이나 교리만을 고집하고 맹종하면서

남의 생각이나 교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동이나 사고가 최고이고 절대적이라고만 여기게 되면

자만심이 생기고 교만해져 무식하면 용맹해진다는 말처럼

매사 뻔뻔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뻔뻔한 마음이 곧 맹종(盲從)을 불러오는 것이다.

특히 집단의식에 매몰되면 더욱 그렇게 된다.

붉은 것을 선호하는 집단은 붉은색이 진리가 되고,

흰색을 선호하는 집단은 흰색만이 오로지 진리가 된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이성적이란 곧 일의 선악,

시시비비를 가릴 줄 아는 사리 분별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성인들은 이 여덟 가지 허물이

밖으로는 사람을 어지럽게 만들고, 안으로는 몸을 상하게 하므로

군자는 (이런 자들과) 벗하지 않고

명군은 (이런 자들을) 신하로 삼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此八疵者, 外以亂人, 內以傷身. 君子不友, 明君不臣.)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의 근본 도리는 변하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보고 삼가 근신하지 않으면 그 허물이 고통과 재앙을 낳게 된다.

2)네 가지 근심거리(四患)〗

⓵큰일을 도모하면서 법을 고쳐 공명을 내세우려는 것을 도(叨)라 한다.

<(好經大事, 變更易常(호경대사 변갱역상), 以掛功名, 謂之叨(이괘공명 위지도)>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당리당략의 목적을 위해

자기 당헌을 고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곤 한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기존의 약속과 원칙을 무시하고 행동하고 있다.

이는 곧 결과가 좋으면 과정을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과정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법과 제도는 약속이다. 그 약속은 신의와 정의, 인간의 양심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법과 제도를 임으로 뜯어고치는 것은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다.

이는 가정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삶의 가치를 추구함에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약속을 멋대로 변경하고 파기한다면

약속이란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가치가 몰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경(佛經)에서 이르기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아야 한다고 말 하는 것이다.

 

중국 원통사의 위태천

⓶자기 지식만 옳다 하고

남의 견해는 무시하며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것을 탐(貪)이라 한다.

<專知擅事, 侵人自用, 謂之貪(전지천사 침인자용 위치탑)>

 

흔히 독단이라는 것은 자기의 견해만 고집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특히 어떤 사상이나 교리에 빠지면 더욱 그렇게 된다.

내 편이 있으면 상대편이 있고, 또한 인간사의 일이란 흑백이 있고,

시비가 있고, 호(好) 불호(不好)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협의하고, 타협하고, 형평과 정의를 논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사의 일이란 절대적인 것은 없다. 독보적인 것도 영원한 것도 없다.

지금은 옳은 것이 내일이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고, 오늘은 내일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타산지석(他山之石)이란 말이 있듯이 오늘의 견해도 중요하지만,

어제의 견해도 돌아봄이 중요하다.

상대방의 소리에도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⓷잘못을 보고도 고치지 않고 간언을 듣고도 더욱 심해지는 것을 흔(很)이라 한다.

<見過不更, 聞諫愈甚, 謂之很(견과불갱 문간유심 위지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신하의 간언(諫言)을 듣고,

언로(言路)를 개방한 나라는 흥(興)하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망한 사례는 역사 속에 비일비재하다.

이는 국가나, 기업이나, 가정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막으면 시각장애인이 되고,

청각장애인이 되고, 언어장애인이 된다.

그런 사람들만 모여서 산다면 국가도, 기업도,

가정도 멍터구리가 되어 발전은커녕 바르게 굴러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항상 어떤 일을 도모함에는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보고,

귀를 열고 남의 소리도 귀담아들어야 하며,

내 주장만 옳다고 내세우지 말고 남의 생각이나 주장도 귀를 기우일 줄 알아야 한다.

간사한 말은 듣기는 감미로우나 끝은 독이 되고,

충언은 귀에는 거슬리지마는 그 끝은 보약이 되는 것이다.

 

단양 원통암

⓸다른 사람이 자기 생각과 같으면 괜찮다고 여기고

자기와 다르면 선해도 선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긍(矜)이라 한다.

(人同於己則可, 不同於己, 雖善不善, 謂之矜.)

 

인간의 속성 중 하나는 유유상종(類類相從)하는 성질이다.

같은 것은 끼리끼리 모인다는 의미다.

그래서 내편 네편이 갈라지게 된다.

나와 다르면 적이 되고, 나와 같으면 친구가 된다.

적은 무조건 부정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며, 시기하려 들지만

내편에게는 무조건 긍정하고, 사랑하고 칭찬하려고 한다.

이렇게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이분법적(二分法的)인 사고는

인간의 삶에 갈등을 야기 시기코, 불협화음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다양한 부류가 모여 함께 살고 있다.

그러므로 삶은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서 살 수 없다.

삶은 총체적으로 보고 살아야 한다.

너와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너와 나가 함께하는 사회가 있고,

그 사회가 있기에 나라가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삶은 내 편, 네 편이란 부분으로 갈라서 보는 것을 지양하고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로 보고 살아야 한다.

너와 내가 얽히고설킨 것이 바로 인간사회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될 수 있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내 편은 옳고 네 편은 그르다는 사고로만 볼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너>도 보고 <나> 도 보고 또 <우리>라는 관념으로 보아야 한다.

숲만 보면 나무를 잃게 되고,

나무만 보면 숲을 놓치게 된다.

인간의 삶은 나무도 보고, 숲도 보고,

또한 동시에 나무와 숲도 함께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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