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 제16구: 참된 말을 미망으로 헤아리지 말라

2020. 3. 7. 16:40증도가

(증도가) 16: 참된 말을 미망으로 헤아리지 말라

 

<16> 決定說表眞乘(결정설표진승)

有人不肯任情徵(유인불긍임정징)

 

*결정된 말씀과 참됨을 나타낸 법을

어떤 사람은 긍정치 않고 정에 따라 헤아림이라

 

表眞乘(표진승)이란 진실한 최상승의 법문을 드러낸다는 의미다.

최상의 법문, 곧 진리를 무엇으로 들어낸다는 말인가?

최상의 법문, 곧 진리란 무엇인가?

이것이 진리라고 말해도 틀린 것이고, 이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해도 틀린 것이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말을 통한 것은 모두가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심명>의 말을 빌리자면 非思量處(비사량처)情識難測(정식난측)”이기 때문이다.


 

삶의 참된 지혜는 경험에서 나온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서 문자를 빌어 얻은 지식보다 연륜이 많은 사람의 경험에서 나온 지식을 선호한다.

그러나 경험에서 얻은 그런 지식 또한 최상의 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같은 증상이 일어나면 같은 답을 내기 때문이다.

예컨대 바람불고 천둥 치면 비가 오리라는 것을 사람들은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른번개만 내리칠 뿐 비는 오지 않을 수 있다. 증상이 같다고 같은 병인 것은 아니다.

 

글자를 통한 지식도 그렇지만 연륜과 경험을 토대로 얻은 지혜라는 것도 그렇다.

가령 어떤 물형(物形)을 지닌 나무를 보면, 바닷가에 사는 어부는 물고기를 닮았다고 하고,

산에 사는 이는 짐승을 닮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마음이 어두우면 때로는 자기의 마음속에 있었던 어떤 이미지가

실제 형상으로 투영되어 이를 진실로 여기는 착오에 빠지는 때도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르시길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해도 진실이 아닐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해도 거짓이 아닐 수 있다.라고 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이라는 것은 베이컨의 <시장의 우화>처럼 그렇다는 것이다.


 

참 오래전에 삼척 신흥사에 공부할 때다.

내가 대학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에 내려갔을 때니 1971년 후반기로 기억된다.

그때 내가 머물던 방이 지금의 설성당인 모양이다.

겨울방학을 맞아 삼척의 모 공고학생 하나가 들어와 말벗이 생겨 좋았다.

그는 바로 내 옆 방에 머물렀다. 그해 겨울 폭설이 내리던 날이었던가 보다.

괜시리 그날따라 공부도 되지 않고 빈둥거리고 있는데,

달은 휘영청 밝고, 절간은 온통 눈에 덮여 몸서리치도록 고요했는데,

느닷없이 그 학생이 형님, 마을에 내려가 맥주나 몇 병 사와 풍월 한번 읊어봅시다.” 하는 게 아닌가.

무료하던 터라 그러자고 했지만, 당시 신흥사 주변에는 농가는 몇 채가 있었지만, 가계는 없었다.

소주 한 병 사려고 해도 가계가 있는 읍내까지 내려가야만 했다.

꼬부랑 언덕이 있어 교통이 불편한 시절이었다.

어느덧 4~50년이 지나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는 눈비가 내리는 날은 차는 아예 다니지 않고,

그렇지 않은 날은 고작해야 하루에 2~3번 정도 운행되는 곳이었다.



그러니 그냥 밤길도 아니고, 눈 쌓인 밤길을 걸어갔다가 오기는

 당시 한창때의 나이였지만 쉬운 걸음은 아니다.

푹푹 빠지는 눈길을 달빛을 벗 삼아 읍내로 내려가 맥주 몇 병을 사 들고 돌아오는 길,

갑자기 언덕마루에서 그 학생이 걸음을 멈추고

 ~, ~하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기 귀신이.” 하는 게 아닌가.

귀신이란 소리에 갑자기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 허깨비를 본 거야,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인공위성 날아다니는 시대야하고

내심 겁은 나면서도 선배 체면이라 오기를 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언덕을 향해 조금 앞으로 걸어가 자세히 바라보니,

소나무 가지에 흰 눈이 덮인 것이 산그늘에 가려 마치 머리에 흰 천을 둘러쓰고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여인의 형상으로 보였던 것이다.

 “소나무 가지에 눈이 쌓인 것이야.”

그 말을 듣고서야 학생은 안도했는지 아까 마신 술에 취했나.”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사물을 보지만 사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투영된 그림자를 보는 것이다.

귀신을 보았다고 외치는 그 학생도 사실 귀신은 없다고 믿고 또 그렇게 말은 하지만

 뇌리에는 귀신이란 이미지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알고 있는, 또 믿고 있는 진리라는 것도 이처럼 마음속에 어떤 형상이나,

 말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그것을 진실인 양 따라 믿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헛된 것이나, 그림자를 보고 진실로 둔갑하여 우리 눈에 비치게 되는 것이다.

 <()에 따라 헤아린다>라는 말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결정된 말이란 명자(名字)를 떠난 말을 의미한다.

 진리나 도는 명자(名字)를 통한 지혜나 지식으로도 얻을 수 있다.

이런 깨달음을 해오(解悟)라고 한다.

결정된 말이란 이런 해오(解悟)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證悟)를 일컫는 것이다.

 증오(證悟)란 일체 지식이나 경험상으로 얻어진 지혜까지도 벗어난 깨달음을 말한다.

 그래서 경에서 선사들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한 것이다.

정식(情識)에 의존해서는 참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성게는 證智所知非餘境(증지소지비여경)이라 한 것이다.

깨달음 외에는, 즉 증오(證悟) 외에는 달리 경계가 없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