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18. 20:09ㆍ국내 명산과 사찰
종로 숭인동 청룡사와 정업원
도성 4대 승방의 하나인 청룡사(靑龍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종로구 숭인동 17-1번지에 자리한다. 청룡사(靑龍寺)는 922년(태조 5)
도선 국사(道詵國師, 827~898)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창건되었다.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하는 산등성이에 지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청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제1대 주지로 비구니 혜원(慧圓) 스님이 주석한 이래 줄곧 비구니 스님만이 주석한 것이 특색이다.
고려에 와서는 1036년(정종 2)에 만선(萬善) 스님이 처음으로 중창하였고
1158년(의종 12) 회정(懷正) 스님이 두 번째로 중창하였는데,
이때 이 부근에서는 청룡사 동북쪽 고개 너머에 있는 보문사(普門寺) 창건 이후로
43년 만에 처음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 승방"이라고도 불렀다.
1299년(충렬왕 25) 중국 원나라의 침입으로 절이 황폐해져 지환(知幻) 스님이 중창하였다.
고려 말에는 공민왕의 왕비 혜비(惠妃)가 머물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의 딸 경순 공주가 머물렀으며,
1405년(태종 5) 무학(無學) 대사를 위하여 왕명으로 중창했다.
창건 당시 도선 국사를 위하여 창건한 이래 두 번째로 왕명에 의한 중창이다.
이어서 1512년(중종 7)과 1624년(인조 2)에도 법공(法空) 스님과 예순(禮順) 스님이 각각 중창하였다.
1771년(영조 47)에는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가 이곳에 있었다 하여
영조가 직접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내려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했는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정업원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비석과 비각은 현재도 절에 남아 있다.
1813년(순조 13)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묘담(妙潭)·수인(守仁) 두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고
1823년(순조 23) 왕명으로 다시 옛 이름인 청룡사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1902년(고종 6) 정기(正基)·창수(昌洙) 스님이 중창하였고,
1918년과 1932년에 상근(詳根) 스님이 중창하였다.
근대에 와서는 1954년~1960년 사이에 윤호(輪浩) 스님이 전체적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고
대웅전은 다시 1973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룡사는 역사적으로 왕실의 여인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당시 청룡사는 동대문 밖에 있어 왕실의 여인들이 주로 머무는 사찰이 된 것이다.
고려 말의 명신 익재 이제현(李齋賢)의 딸이자 고려 마지막 왕의 왕비인 혜비(惠妃)가
이성계에게 왕위를 인수인계한 후에 청룡사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고,
또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도 청룡사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으로 어린 두 아들과 사위를 잃었는데,
그때 과부가 된 딸 경순공주의 머리를 직접 깎아주고 청룡사로 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특히 세조에 의해 폐위되고 강원도 영월까지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게 된 단종(端宗, 1441~1457)은 유배 갈 때
왕비 정순왕후와 이곳 우화루(雨花樓)와 영리교(永離橋)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고,
이어 왕비는 영월이 있는 동쪽이 가장 잘 보이는 이곳 청룡사에서 스님이 된 비극이 서려 있는 사찰이다.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모셨다.
신중탱. 대예적금강 아래 위태천을 도식화한 신중탱
범종
대웅전에서 바라 본 우화루
심검당
산령각. 문이 닫혀 있어 안을 볼 수가 없었다.
명부전이다. 명부전 역시 문이 잠겨 있어 보물로 지정된 지장보살을 참배할 수 없었다.
요사채
정업원이다. 청용사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정순왕후와 정업원>
청룡사 옆에 있는 정업원은 15살에 시집와 왕후가 되어 18살에 생이별을 한
단종의 부인이었던 정순왕후 송씨의 애환을 품고 있는 곳이다.
열다섯의 나이로 한 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되었지만,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일임하고 상왕이 되자
왕대비가 되어 의덕(懿德)의 존호까지 받았지만,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추진하던 단종 복위운동이 발각되자
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되어 영월 청령포(淸泠浦)로 유배되어
끝내 사약을 받게 되고, 의덕 왕대비에서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궁에서 쫓겨나
82세로 나이로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파란만장한 청상(靑孀)의 삶을 살다가 간
비운의 왕비가 바로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1440~1521)이다.
정순왕후 송씨 본관은 여산, 성은 송으로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현 칠보면[1])에서 태어났으며,
판돈령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영돈녕부사로 추증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궁에서 나온 그녀는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초암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송씨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안 세조가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는 귀양 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으로 전해지는데,
결국 두 사람은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단종이 끝내 유배지인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부군의 죽음을 전해 들은 송씨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큰 바위를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하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이후 세조는 그녀에 대해 '신분은 노비이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려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다.
정업원은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출궁하여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본방 ‘비운의 왕 단종의 유배지 영월 청령포’ 참조)
궁에서 함께 나온 시녀 3명과 2명의 후궁도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됐다.
시녀는 희안, 지심, 계지라는 법명을 각각 받았고 정순왕후의 상좌가 되었다.
후궁 김씨는 원경, 후궁 권씨는 혜경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왕후의 사제가 되었다.
정순왕후는 청룡사의 노비구 지진스님으로부터 ‘허경(虛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녀의 나이 17세였다.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비구니가 된 것이다.
왕후는 청룡사에 온 뒤 바깥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일념으로 기도하는 한편
절의 어려운 생활을 돕기 위해 댕기, 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의 옷감에 자주물을 들여서 내다 팔았다.
자줏물을 들일 때 바위 위에 널어 말리곤 하였으므로 그 바위를 "자주바위"라 하고,
바위 밑에 있는 우물을 "자주우물"이라 하며 또 그 마을 이름을 "자주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한양의 아낙네들은 이를 팔아 주려고 일부러 자주 끝동을 달아 입었다고 한다.
후일, 영조가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동망봉 근처 지역이 채석장으로 쓰였으며 그 바위는 깨어져 나가버렸다.
2011년 현재, 서울 종로구 낙산 근처인 이곳 동망봉 남쪽에는,
동망정(東望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들어서 있다.
(숭인동 묘각사 뒤편에 복원한 동망정이 있다.)
왕후는 청룡사에서 65년간을 수도하다 82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그 뒤 1698년(숙종 24)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왕후도 함께 복위되었고
그의 능도 사릉(思陵)이라 추상(追上)되었으며 신위도 종묘로 옮기게 되었다.
단종과 그녀의 복위로 종묘에 배향되면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한 것은
억울하게 살해된 남편을 사모(思慕)한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명승지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녀의 묘소 뒤편에 심은 나무들이 단종의 능인 장릉 쪽을 향해
고개 숙여 자란다는 전설이 한때 전해졌다.
무속에서는 그녀를 송씨 부인 신이라 부른다. 그
리고 영조는 정순왕후가 지낸 청룡사 경내에 세워진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는
영조의 친필 비석으로,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는 정업원 옛터라는 뜻이다.
영조는 단종을 위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모두 복권시켰는데,
이 청룡사에 와서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친히 비문을 썼다고 한다.
이 비는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령포에 있는 망향탑. 단종이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막돌을 하나씩 하나씩 쌓아 올린 돌무더기
청령포의 노산대. 단종은 이곳에 올라 한양을 그리며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정업원(淨業院)의 유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다만 1164년(의종 18) 의종이
정업원에 이어(移御:임금이 행차함)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정업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화도 천도 이후인 1252년(고종 38)에는
박훤(朴暄)의 집을 정업원으로 삼아 성안에 있던 비구니를 살게 하였고,
환도 후에는 다시 개경에 정업원을 두었으며,
충숙왕 때 남편 이집(李緝)을 살해한 반씨(潘氏)를 정업원에 있게 하였다.
고려 말에는 비구니 묘장(妙藏)이 한때 정업원의 주지로 있었다.
한양에 도읍을 건설한 조선 초에는 개경의 정업원을 옮겨 건립하였다.
정업원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응봉(鷹峰) 아래 창경궁(昌慶宮)의 서쪽이었다는 설과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아래였다는 주장이 있다.
동망봉 아래에 1771년(영조 47) 영조가 세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업원이 동망봉 아래 있었다는 설은 단종의 비 송씨가 동망봉에 있었던 사실과
또한 그가 정업원 주지로 있었던 사실이 얽혀서 잘못 전해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영조가 비를 세운 것은 이미 정업원이 없어진 지 160여 년 이후였기 때문이다.
1408년(태종 8) 주지로 있던 공민왕의 후비가 죽자, 소도군(昭悼君)의 처 심씨(沈氏)를 정업원의 주지로 삼았다.
정업원의 이승(尼僧:비구니 스님)들은 대부분 사족이었고, 주지는 왕족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 초기에는 노비와 별사전(別賜田:임금이 특별히 하사한 전답),
분수료(焚修料 : 향불을 피우고 도를 닦는 데 드는 비용)가 지급되는 등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태종 때부터 유생들에 의해 정업원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1448년(세종 30) 척불 정책에 의해 폐지되었다. 1457년(세조 3) 다시 정업원 복립(復立)이 결정되고,
1459년 원사(院舍)가 중창되었다. 이 해에 사원의 비용으로 공포가(貢布價)를 특사했고,
이듬해에는 왕이 두 차례 행차하는 한편, 200구의 노비를 지급하였다.
국가적인 비호는 예종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성종 때에는 다시 유생들의 정업원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여러 차례 대두되었다.
그 뒤 1505년(연산군 11) 왕의 타락 정치로 정원은 다시 혁파되고 이승들은 성 밖으로 축출되었다.
그 뒤 정업원은 독서당(讀書堂)으로 사용되다가,
독서당을 두모포(頭毛浦)로 옮긴 1517년(중종 12) 이후에는 빈 절로 남게 되었다.
중종은 정업원을 다시 세우고자 했지만, 유생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550년(명종 5) 3월에 다시 세웠다.
이때에도 유생들의 강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에
정업원을 후궁들의 별처로 한다는 구실을 붙여
인수궁(仁壽宮)이라고 했다가 뒤에 다시 정업원이라고 하였다.
유생들의 정업원 폐지 운동은 꾸준히 계속되었지만,
특히 선조가 즉위한 이후에는 격심해졌다.
그리하여 1612년(선조 40)에 정업원은 폐지되고
비구니들은 성 밖으로 쫓겨났으며, 그 뒤 다시 복구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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