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산 기행(4/4) 보물제355 신경리마애여래입상과 용봉사

2019. 1. 16. 23:14국내 명산과 사찰



용봉산 기행(4/4) 보물제355 신경리마애여래입상과 용봉사


홍성 용봉산은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용봉산을 등산할 경우 날머리나 들머리로 들리게 되는 절이라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절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존하는 유물로 볼 때

이 절은 백제 말 혹은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된다.

또한, 용봉사에 1690(숙종 16)에 조성한 괘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 사찰이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괘불은 영산회상도로서 제작연도가 분명하고 기법도 뛰어나 보물 제1262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의 사찰 서편의 조금 높은 곳에 있던 옛 절이 명당임을 안 평양조씨(平壤趙氏)가 절을 폐허화시키고

그 자리에 묘를 썼으며, 현존하는 사찰은 1906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18세기 후반 무렵 폐사되었으나 1980년 무렵에 중창되었고,

1982년에는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1988년에는 축대를 완성하고,

그 뒤 당우로 지장전, 삼성각을 짓고, 종무소를 겸한 적묵당 등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절 입구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8호로 지정된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마애석불 1위가 있고,

기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2호로 지정된 장방형 석조(石槽)와 절구,

거대한 맷돌이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8호로 지정된 부도 등이 있다.


















대웅전에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좌우협시불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 예적금강을 중심으로 한 신중탱

예적금강(穢跡金剛) 은 오추사마(烏樞沙摩)로도 불린다.

 여래의 화현이며 일체의 더러움과 악을 제거하는 위력을 가진 명왕(明王)이다.

신중탱에서 예적금강의 모습은 19세기 초에는 붉은 머리카락을 곤두세운 험상궂은 얼굴에

손에는 금강저를 들거나 공수인(拱手印)을 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예적금강은 얼굴 3개에 눈도 3개이며 이를 드러내며 분노한 표정을 짓고 있다.

 8개의 팔을 갖고 있으며 손은 합장을 하거나 금강령, , 부적, , 밧줄, 창 등의 지물을 들고 있다.

또한 온몸을 불에 휩싸이게 그려 보다 극적으로 분노존(忿怒尊)을 표현하기도 한다.





삼성각, 독성, 사신, 칠성탱이 모셔져 있다.




칠성탱


독성


산신













@괘불탱

보물 제1262호로 지정된 용봉사의 괘불탱은 삼베 바탕에 채색. 세로 6.15m, 가로 5.8m,


해숙(海淑), 한일(漢日), 처린(處璘), 수탁(守卓) 7명의 화사(畵師)1690(숙종 16)에 그렸다.

 1725년에 화사 원각(圓覺) 비구가 중수(重修)했으며 1987년에 새로 표구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석가불 좌상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대 제자,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사천왕 등이

둥글게 에워싼 군도식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이다.

영축산에서 석가모니불이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도상화한 영산회상도는 괘불탱의 가장 대표적인 도상이다.

군도식 영산회상도는 괘불탱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권속의 축소를 거치면서

석가불 독존, 삼존, 오존 형식 등 다양하게 전개된다.


신중탱. 위는 예적금강, 아래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범천 제석천을 비롯한 제신장들을 도식화 했다.



운판


법고


적묵당이다. 종무소를 겸하고 있다.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입상(洪城新耕里磨崖如來立像)

보물 제355호로 지정되어 있다.  3.77m 크기의 고려시대 초기 불상이다.

일명 노각시 바위라고 불리는 바위를 감실(龕室)로 만들고 바위 표면을 다듬어 불상을 새긴 것이다.

신경리 마애여래입상에 대한 문헌 기록이나 명문이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조성 배경을 알 수는 없다.

 

4m가 넘는 자연석의 한 면을 오목하게 파들어 간 다음, 여래입상을 고부조로 새긴 것으로,

마애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인 윗부분이 아랫부분보다 입체적인 모습을 이 불상에서도 볼 수 있다.


마애여래입상은 머리가 몸에 비해 큰 편이며, 넓은 어깨에 비해 상체가 약간 짧아 보이나,

전체적으로 장대한 모습이다. 얼굴의 양 볼과 턱, 드러나 있는 가슴 등에서 상당히 살찐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종교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불상의 상호(相好: 얼굴)는 마모가 심하지만, 높고 둥근 형태의 육계(肉髻: 정수리 위에 솟아나온 부분)

소발(素髮: 머리카락이 표현되지 않는 것)의 머리카락,

미간(眉間)의 백호(白毫: 원래 흰 털을 뜻하지만, 후대에 보석 등으로 대체됨) 구멍,

반원을 그리고 있는 눈썹, 가늘게 뜬 눈, 오뚝한 코, 살짝 다문 입,

어깨까지 닿아 있는 긴 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 부분도 마모가 심하여 삼도(三道: 세 개의 선)의 표현이 선명하진 않으나, 원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애여래입상은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까지 내려뜨려 법의(法衣) 자락을 잡고 있으며,

왼손은 왼쪽 겨드랑이까지 들어 올려 손바닥으로 밖으로 내보이고 있다.

보통 시무외인(施無畏印)을 결한 불상들은 오른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 상례인데,

이 불상은 왼손을 들어 올리고 있고, 오른손으로 법의 자락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설법인(說法印: 설법하는 손 자세)을 결한 듯하다. 약간 차이는 있지만,

한손으로 옷자락을 잡고 다른 손을 들어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는 수인은

국보 제80호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에서 그 전통을 찾을 수 있다.

 

마애여래입상은 통견(通肩: 옷이 양쪽 어깨를 덮고 있는 것) 형식으로 법의를 착용하였는데,

가슴 앞부분에서부터 U자를 그리며 내려오다가 배꼽 아래부터 옷주름 선이 자유분방하게 흐트러지고 있다.

보통 이러한 형식은 U자를 그리며 갈라져 양 다리 위에서 각각 U자를 그리며 내려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법의의 옷자락 표현이 통일신라시대 8세기부터 유행하던 전통을 계승하고 있긴 하지만, 그 모습이 많이 흐트러진 것이다.

  


(마애불 뒤편 모습)  



한편 가슴 앞부분에서는 약간의 입체감이 나타나지만,

배꼽 아래와 왼쪽 팔뚝을 걸치고 내려오는 법의 자락은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어 밋밋한 느낌을 준다.

재미있는 사실은 불상의 발과 연화대좌를 별도의 돌에다 조각하여

 마애여래입상의 아래쪽에 붙여 놓았다는 것이다.  


  

마애여래입상을 둘러싸고 있는 광배(光背: 붓다의 몸에서 나온 빛의 표현)

두 줄의 돌기로서 원형 두광(頭光: 머리 주위의 빛의 표현)과 신광(身光: 몸 주위의 빛의 표현)을 나타내었는데,

마모가 심하여 어떤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신경리 마애여래입상은 오목하게 파고 들어간 마애기법과 평판적인 모습,

간략화된 선각 기법 발과 연화 대좌를 별도의 돌로 조각하여 조합하였다는 점 등을 통하여 볼 때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묵당





@용봉사 입구에 위치한 이 마애불은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으로 799년 조성된. 높이 210cm의 마애불이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애불은 거대한 절벽의 바위 면이 세모꼴로 떨어져 나간 곳에 바위를 쪼아 부조를 새긴 불상이다.

오른쪽 어깨 옆의 바위 면에는 331자의 불상 조성기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