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16. 10:06ㆍ삶 속의 이야기들
(금산 쌍홍문)
야합(野合)
요즘의 우리 사회나 정치는 특정 이익집단이나 이념집단의 야합으로
매스컴을 통해 여론을 조작함으로 힘없고 귀 어두운 가난한 민초들을
수렁으로 몰고 가고 있는 사례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야합(野合)이란 말은 원래 남녀 간의 정상적이지 않은 결합을 가리키던 말이었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눈앞의 이익이나 좋지 못한 목적으로
서로 어울리거나 결합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野> 는 들판을 의미하고, <合> 은 합친다는 의미가 되니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들판에서 남녀가 이층집(?)을 짓는다는 말인데,
야합(野合)이란 이 말의 시원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아이러니칼하게도
세계 4대 성인이라 일컫는 공자의 고사(故事)에서 비롯된다.
「공자(孔子)는 노(魯)나라 평창향(昌平鄕) 추읍(陬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공방숙(孔防叔)이라 했다.
방숙은 백하(伯夏)를 낳고 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숙량흘은 안씨의 딸과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니구산에서 기도를 한 후에 공자를 얻은 것이다.
공자는 노나라 양공(襄公) 22년에 태어났는데,
날 때부터 머리 중앙이 쑥 들어간 반면 주위가 불쑥 솟아 있어 구(丘, 언덕)라 이름 지었다.
자는 중니(仲尼)고 성은 공(孔)이다. 숙량흘은 공자가 태어나고 얼마 후에 죽었고 방산에 매장되었다.
방산은 노나라 동쪽에 있는데 공자는 부친의 묘소를 알지 못했다.
모친이 (야합한 것을 꺼려)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孔子生魯昌平鄕陬邑. 其先宋人也, 曰, 孔防叔. 防叔生伯夏, 伯夏生叔梁紇.
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 禱於尼丘得孔子. 魯襄公二十二年而孔子生.
生而首上圩頂, 故因名曰丘云. 字仲尼, 姓孔氏. 丘生而叔梁紇死,
葬於防山. 防山在魯東, 由是孔子疑其父墓處, 母諱之也.)」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온 이야기다.
정도를 걷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합치는 것을 가리켜 <야합(野合)>이란 말로
사마천은 『사기』에서 기록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의 부모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는 이야기인데, 흥미로운 사실은 사대부 계층인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이
천민계급의 안징재를 취할 때 나이가 72세로,
50살이나 연하인 안징재(顔徵在)라는 처녀와 혼인식도 올리지 않고
훌쩍 동거(同居)로 들어가 바로 공자를 나았다는 것이다.
65세에 세상 하직할 때까지 무려 25명의 첩을,
그것도 절반은 유부녀만 골라 취한 삼국지의 간웅 조조보다도 훨씬 더 걸출(傑出?)했던 모양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미투운동으로 본다면
사회적 직위나 위계에 의한 것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분명한 것은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가
고소나 고발 양심선언 등 그런 것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양귀비)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양귀비는 원래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아내였으니
현종과 양귀비의 관계는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되는데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니 그런 것은 잠시 덮어두고,
현종이 환관 고력사(高力士)와 야합하여 양귀비를 취할 때 나이는 58세였고,
당시 양귀비는 22살이었다고 하니, 분명한 사실은 현종도 스테미나가 좋았지만,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당나라 황제 현종보다 더 스테미나가 좋았던 모양이다.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에 따르면
「남자는 태어나서 8개월이면 이가 돋아나고 8세가 되면 젖니가 빠지기 때문에
이 팔 16세에 양도(陽道)가 형성되어 통하다가, 팔팔 64세에 양도가 소멸한다.
여자는 생후 7개월에 이가 생겨서 7세에 젖니가 빠진다.
이칠 14세에 음도(陰道)가 통한 후, 칠칠 49세에 음도가 모두 단절된다.
혼인할 때 이 나이를 벗어나면 ‘야합’이 된다.
(男八月生齒, 八歲毁齒, 二八十六陽道通, 八八六十四陽道絶.
女七月生齒, 七歲毁齒, 二七十四陰道通,
七七四十九陰道絶. 婚姻過此者, 皆爲野合)」 라고 했는데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숙량흘이 64세도 아닌 72세에
새장가를 들어 아들을 나았으니 무슨 비장의 특수 비법이 있긴 있었나 본데
이런 비법이 후손들에게 전수되었다면 분명 억만장자가 되었을텐데....
팔팔이나, 씨알리스 애호가들에게 어찌 아쉬움이 들지 않겠는가.
(김유신장군동상)
야합의 또 다른 고사로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에 얽힌 이야기를 빠트릴 수가 없다.
김유신(金庾信)의 아버지는 가야 왕족의 후예인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만명(萬明) 부인이다.
만명 부인의 할아버지는 갈문왕 입종(立宗)이며 아버지는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肅訖宗)이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유신의 아버지인 서현(舒玄)이 길에서 만명 부인을 보고
마음이 혹하여 중매도 없이 야합(野合)하였다고 한다. 시세말로 첫눈에 반한 모양이다.
만명 부인도 서현을 끔찍이 좋아했는지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가게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려 하니 숙흘종이 이 사실을 알고 두 사람의 결합을 반대하여
만명 부인을 다른 집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는데,
갑자기 그 집에 벼락이 떨어져,
지키는 사람들이 놀라서 흩어지는 틈에 도망하여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고 한다.
(김유신장군의 영정)
만노(萬弩)는 신라의 지명인 만노군(萬弩郡)으로,
생거진천(生居鎭川)을 모토로 외치는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을 가리킨다.
진천은 삼국시대에는 먼저 백제의 땅이 되었으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진천은 고구려의 금물노군(今勿奴郡)이 되었다.
484년(소지왕 6) 모산성(母山城) 부근에서 신라가 고구려를 물리쳐 진천은 신라의 만노군(萬弩郡)이 되었다.
만명 부인은 김유신이 젊어서 기생 천관(天官)에게 혹하여 타락하였을 때
김유신을 잘 타일러 천관과의 관계를 끊게 하는 등 자녀의 교육에 엄격하였던 분으로 전한다.
서현과 만명 부인 사이에는 김유신뿐만 아니라 삼국통일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바 있는 김흠순(金欽純)과
태종무열왕의 왕비가 된 문명부인(文明夫人) 등이 있었다.
부처님은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라고 했는데
우째거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야합이 어쩔수 없다면
정치와 경제도 이 정도의 아웃컴(outcome)이라면 얼마나 좋으랴만
빛 좋은 개살구처럼 민초들의 귀와 눈을 가리고 주머니만 틀어갈 생각을 하니
어찌 민초들의 마음이 매일 아침 해만 뜨면 쪼그라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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