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금산(2/2) 부소암에서 쌍홍문으로

2018. 9. 1. 16:12국내 명산과 사찰




남해 금산(2/2) 부소암에서 쌍홍문으로

 


금산의 단군성전에서 탐방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면 거대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가 진시황의 아들 부소(扶蘇)가 유배되어 머물렀다고 하는 부소암(扶蘇岩)이다.

 부소암(扶蘇岩)은 부소대(扶蘇臺)라고도 부른다.

()을 대()로 부르는 것은 거대한 바위가 마치 누각처럼 솟아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 부소대 뒤편에 있는 암자 또한 부소암(扶蘇庵)이라 부른다.

 

부소대는 법왕대라고도 한다. 남해에 와서 금산을 오르지 않고서야

남해를 다녀갔다 말할 수 없듯이 금산에 올라 법왕대를 보지 않고서는

금산을 다 보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이 금산의 부소대(부소암)이다.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유배되어 살다가 간 곳이라 하여 부소대라 부르지만,

부소암(扶蘇庵)의 요사채 상량에 법왕대라고 적혀 있어

본래 이름인 법왕대라 부르는 것이 맞을 듯싶다고 사찰안내서는 밝히고 있다.

금산의 보리암은 조계종 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지만

특이하게도 같은 금산인데도 부소암은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로 되어 있다.

부소암은 산행금지구역으로 묶였다가 20139월에 정식 개방되었다.




아침부터 낀 운무는 오후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시야를 가리고  있다.





@부소암은 진시황의 아들인 부소가 이곳에 유배되어 머물었기 때문에

 부소암이라는 불리게 되었다고는 하나 역사적인 유배기록은 알 수 없고,

단지 전설이나 설화로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서(史書)에 이름이 나타나는 진시황의 자녀는 장자 부소(扶蘇)를 비롯하여

막내아들인 호해(胡亥), 공자 고(), 공자 장려(將閭)의 네 사람이다.

역사서마다 조금씩 다른 기록이 있지만, 전문가의 고증에 의하면 진시황은 모두 33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부소의 유배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다만 사서에 의하면 진시황의 장자인 부소는

 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대해 부당함을 간언했기 때문에 분노를 사,

북방의 기마민족·흉노에 대한 국경 경비의 감독을 명령받아

 장군 몽염(蒙恬)과 함께 벽지로 보내졌다는 것이 전부다.



BC 210년에 순행 중이던 시황제가 급사하자,

시황제의 상()을 주관하던 환관 조고(趙高)와 승상 이사(李斯)는 시황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26황자인 호햬를 옹립하고 장자인 부소와 장군 몽염에게 자결를 권하는 거짓 성지(聖旨)를 내렸다.

장군 몽염은 그것이 거짓 성지인 것을 간파하고 곧바로 부소에게 진언했지만,

부소는 "의심하는 것 자체가 도리(道理)에 반()한다"고 말하고

 성지 내용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부소암의 바위는 마치 사람의 뇌()를 닮은 형상을 하고 있는데

어쩜 그의 고뇌(苦惱)를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해소가 황위에 오른 후 몽염장군 또한 반역죄의 누명을 씌어 3대가 살육당하게 된다.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진시황은 37세에 제국을 통일한 후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 270개의 궁전을 짓고 일만여 명의 궁녀를 두었다고 한다.

그는 33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누구도 황비로 책봉하지 않았고 후계자인 태자도 책봉하지 않았다.

그 결과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마지막 순행 중 급사함으로 진시황의 33명의 자녀는

 조고와 이사의 공모하여 황위에 올린 호해를 제외하고 나머지 32명은 모두 비명횡사하였다.

장남 부소는 위조된 유조에 따라 사사 당했고,

호해는 황제에 오른 후 형제들이 불만을 가질 것이 두려워

그의 형제자매들을 모두 잔혹하게 살육하였다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호해 역시 2년 만에 자기를 옹호했던 조고에 의해 시해되었다.

조고는 부소의 아들을 영을 황제로 옹위했지만

진나라는 시황의 죽음과 더불어 끝내 몰락하게 된 것이다.



















부소암으로 오르는 돌계단길


부소암의 이 암자는 조만간 재건축될 예정이라고 한다.



부소암 법당 안은 협소한 데 석조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연등불과 약사불을 협시로 하여 좌우에 나한을 모셨다.


법당 뒤 거대한 바위는 와불(臥佛)과 입불(立佛) 형상을 하고 있다고,

법당을 지키는 친절한 처사 한분으로부터 사찰 주변을 설명을 들었다.


위는 와불의 형상


그 옆은 입불의 형상이다.


마치 거북이가 고개를 들고 있는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거북바위라 일컫는다.


바위에 부조된 산신, 호랑이를 타고 있다. 누가 언제 조성했는지는 알 수 없다.




법당 옆에는 작은 동굴이 하나 있는데 새로 법당이 조성되면 동굴 안에 불상을 모실 예정이라고 한다.



법당 앞 마당에서 바라본 남해의 전경이다. 운무 때문에 시야가 별로다.


확대해 본 두모마을 풍경이다. 다랭이논도 보인다.

멀리 보이는 저 바위는 관음불이라고 한다.


강아지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의 덕분으로 부소암에서 잠시 담아 본 금산의 바위들






촛대바위라 했던가..




망원으로 담아 본 관음불바위다.










































하산할 금산산장까지 와서도 운무는 여전하다.




















하산을 앞둔 장군봉에서는 다행히도 운무가 오락가락했다.

조금 일찍 요런 기회가 왔으면 하는 생각이...

여기서 금산탐당지원센터까지는 이제 1km가 채 안남았다.  


쌍홍문






다시 운무가 시작된다. 금산의 운무가 이렇게 끈질길 줄은 몰랐다.

산행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가는데 종일 운무로 얼굴을 가린 금산도 미안한지 잠시 본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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