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5. 00:08ㆍ국내 명산과 사찰
남해바다 노을과 남해 무민사
무더위 속에 금산 종주를 하고 숙소로 돌아온 어제.
시원한 남해 바다의 바람을 쐬려고 커튼을 걷으니 창밖에 남해의 노을이 들어왔다.
온종일 운무 속을 걷다 보니 일몰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막상 남해의 일몰을 보니 그냥 놓칠 수 없다는 욕심이 발동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남해의 일몰이라!
카메라를 챙켜 머물던 2층 모텔에서 급히 밖으로 나와 셔터를 눌러본다.
맑은 날은 아니었기에 기대한 만큼의 풍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해에 내려와서 남해의 일몰을
몇 커트만이라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행운이 아니겠는가.
이튿날 아침 남해 숙소를 떠나 다음 여정지인 남해의 끝자락에 위치한 무민사로 향하는 길.
머물렀던 남해 바다 앵만호의 미련이 남아 아침 바다 풍경을 기념으로 담아 본다.
무민사(武愍祠)는 경남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의 미조진 성지에 있는
사찰이 아닌 최영 장군을 배향하는 사당(祠堂)이다.
아름다운 미조항이 내려다보이는 좌측 언덕 기슭에 자리한 무민사는
일명 장군당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며, 무민사(武愍祠)라는 사명(祠名)은
1397년(태조 6)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가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장군이 참형 된 후 8년 만에 내린 ‘무민(武愍)’이라는 시호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하는 설화에 의하면 500여 년 전 미조진항을 지키던 첨사(종3품)는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최영 장군의 영정과 칼이 바닷가에 있으니 찾아서 잘 모셔 놓으라" 고 했다.
첨사는 다음 날 아침 수문장인 봉 장군에게 꿈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찾아볼 것을 지시했다.
봉 장군이 바닷가에 나가 둘러보다가 이상한 나무 궤짝 하나를 발견하고,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백발노인이 말한 그대로 최영 장군의 영정과 칼이 들어 있었다.
첨사는 어디에 모셔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 방편으로 짚으로 싸서 관사에 임시 모셔 놓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불이 나면서 영정이 하늘로 날아올라 가 현재의 무민사 자리에 내려앉았는데
첨사는 이곳에 조그마한 사당을 짓고 최영 장군의 시호를 빌어 '무민사'라 했다고 한다.
최영 장군은 고려의 유명한 충신인 최유청의 5대손으로 충숙왕 4년(1317)에 출생하였다.
1358년에 양광 전라도 왜구체복사가 되어 서해안과
남해안에 침입하는 왜구들을 격파하는데 큰 전과를 올린 명장이다.
1380년에는 해수도통사가 되어 삼남 지방을 순찰, 왜구의 침입을 막기도 했다.
1388년에는 문하시중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최영 장군은 문하시중이 되어 자신과 고려왕조의 운명을 결정한 요동 정벌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는 왕과 비밀리에 의논하여 원나라를 도와 요동을 정벌하기로 했다.
최영 팔도 도통사, 이성계 우군도통사, 조민수 좌군 도통사. 이렇게 구성된 요동 정벌군 3만으로 원정을 떠났다.
그러나 고려말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 왕조를 건설할 야심에 차 있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역사적인 회군을 하여 왕을 폐위시켰다.
최영 장군도 이성계의 손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최영 장군은 고려 우왕 때 남해군 평산포 수군 진영(만호가 주둔하던 곳. 지금의 해군기지)을 순시한 뒤
미조항에 들러 수군들을 격려한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남해의 고도에서 항상 왜구에 시달리며 살아오던 어민들이 장군을 추모하면서
그들의 수호신으로 모시게 된 연유를 앞의 전설에서 느낄 수 있다.
예전에는 미조진에서 제사를 주관했으나, 1
950년경 이 지방 유지들로 구성된 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사우를 중수하고,
해마다 섣달 그믐날과 8월 보름날 두 차례 제향을 지내고 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유훈(遺訓)을 종신토록 명심하여
명리(名利)를 돌보지 않고 청렴하게 살다 비운의 생을 마감한 최영 장군.
"내가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에 단 한 번이라도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면 내 무덤에서 풀이 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결코 풀이 돋지 않을 것이다." 라고
임종전에 한 장군의 이 절규를 입증이라도 하듯,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최영장군의 묘소에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풀한포기 자라나지 않는 <적분(赤墳: 붉은무덤)>이었다.
조그마한 권력이라도 잡으면 갑질하기 바쁘고,
실리(實利)를 위해서는 의리와 지조를 버리고 오로지 권모술수와 야합하기를 서슴치 않는
작금의 세태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교훈으로 삼았으면 좋으려만...
무민사에서 내려다 본 미조항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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