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용문사

2018. 8. 26. 13:55국내 명산과 사찰



남해 용문사

  

남해 다랭이마을을 둘러보고 숙소를 찾기 위해 내일의 산행을 위해

금산 들머리인 금산탐방지원센터 쪽으로 가는 길에 용문사 사찰의 이정표가 있어 들러 보았다.

 사찰을 들리기는 조금 늦은 오후 시간대라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언제 다시 내려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둘러보기로 했다.



남해 용문사(龍門寺)는 앵강만을 굽어보는 호구산(

호구산(虎丘山) 자락에 있는 사찰로

663(신라 문무왕 3)에 지어졌다.

호구산은 북쪽과 남쪽에 각기 망운산과 금산을 마주 보는 산이다.

용문사는 원효대사가 충청남도 금산에 세운 보광사(普光寺)를 나중에 이곳에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처음 지은 시기는 명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세월이 지나 보광사가 없어지고 1660년에 백월당 스님이

보광사 대웅전 등의 건물을 이곳으로 옮기고 사찰 이름도 용문사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1661년에 탐진당과 적묵당을 지었다. 1666년에 일향 스님이 대웅전을 창건했고

 지혜 스님이 다듬고 윤색하게 했다. 지금의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공덕문 안에 포대화상이 모셔져 있다. 사찰 입구의 다리 공사중이라 천왕문을 들어가지 못했다.


설선당




화소당







 

@대웅전

남해 용문사 대웅전(南海 龍門寺 大雄殿)

 1974216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가,

2014122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49호로 승격되었다.

 

남해 용문사 대웅전은 중창기록과 건축양식으로 볼 때, 조선 현종 7(1666)에 일향 화상에 의해 건립되고

영조 47(1773)에 중수가 완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정면 3,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건물로 기단은 지형을 고려하여

전면은 2단으로 높게 형성하고 배면과 측면은 1단으로 구성하였다.

기둥은 4면의 우주를 평주보다 크게 사용하였고,

전면과 후면 그리고 측면의 순서로 기둥 크기를 달리하여 정면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네 모서리에는 팔각형 초석 위에 팔각형 활주를 세워 구조적 안정을 꾀하고 있다.

 

공포형식은 외 3출목 내 4출목이며, 주간포의 개수를 전·후면은 각각 2,

측면에는 1개를 적절하게 놓아 공포 간격을 조절하여 완결성을 높이고 있다.

공포는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을 강하게 주며, 살미에는 장식성이 강한 연꽃, 연봉을 조각하였다.

 보머리에는 봉황과 용의 머리를 조각하여 18세기의 장식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웅전 아미타삼존불좌상과 영산회상탱

용문사 대웅전 안에는 건양 2년 영산회상탱(靈山會上幀, 1897) 앞 불단 위에

조선 시대의 작품인 목조 아미타삼존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46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품인(九品印)의 본존 아미타불좌상은 정상계주와 중간계주를 두고 있으며,

나발은 높고 큰 편이다. 전체적인 비례에 비교해 이마가 매우 넓은 편이어서, 안면이 길어 보인다.

상대적으로 이목구비는 앞부분에 몰려 있는 느낌이 든다. 얼굴 윤곽은 방형에 가깝고,

안면부는 코와 입 주변을 제외하고는 양감이 절제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둘렀다.

 

착의는 양어깨를 덮은 상의 위에 대의(大衣)를 두르고, 내의(內衣)를 착용한 형식이다.

 목 부근에서 상의와 대의의 옷깃을 반전시키고, 왼팔 상완(上腕)을 두르고 있는

대의 끝단은 부채꼴 모양으로 흘러내리면서 길쭉한 Ω형 옷 주름을 형성하여 자연스러움을 나타내고 있다.

 상의의 옷깃 사이로는 거의 평판적으로 묘사된 부처의 가슴이 드러나 있고,

그 아래로는 내의가 표현되었는데, 매듭표현 없이 몇 개의 굵은 주름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그 아래로는 대의와 상의가 맞물려 있으며, 옷자락은 굵고 깊게 표현되었다.

 결가부좌한 둥그스름한 하체는 굵고 간략한 옷 주름으로 덮여 있다.

 

양 협시보살 좌상은 아미타불과 기본적으로 같은 착의법을 보이고 있으나,

보주화염문과 공작이 조각된 보관을 착용했다는 점과

옷 주름이 더 굵고 대담하게 표현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 안면부의 이목구비도 아미타불보다 옆으로 퍼지면서 턱 부분이 더 동그랗게 처리되어,

같은 유파의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두 보살 모두 구품인을 결하고 있으며, 우협시의 경우는 연화 가지를 들고 있다.

삼존불 모두 바닥에 복장공이 마련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복장물은 도난당하고 일부 경전·다라니 등이 내부의 목, , 다리 부근에 끼워져 있다.


  

본존불상은 17세기에 활약했던

조각승 현진(玄眞)의 작품인 법주사(法住寺) 대웅전의 소조 삼신불좌상(三身佛坐像, 1626)이나

 부여 무량사(無量寺)의 소조 아미타삼존불좌상(1633)과 양식적으로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의 1610년을 전후한 초기작인 함양 상련대(上蓮臺) 원통보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1612),

구례 천은사(泉隱寺)의 목조 관음·세지보살좌상(1614)과 유사한 점이 많아, 현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용문사 삼존불좌상은 17세기의 대표적 조각승인 현진의 초기작으로 추정되는 만큼,

당시의 조각 양식 발전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라 하겠다.


@영산회탱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창작 시기는 1897년이라고 한다.

영산회상탱은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설법을 듣기 위해 모인 수많은 권속을 함께 그린 불화이다.

 용문사 대웅전에 봉안된 이 불화는 중앙에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협시보살인 문수·보현보살을 비롯한 여러

 보살과 사천왕, 가섭과 아난 등 부처의 10대 제자, 그리고 8금강 중 4위를 배치하였다.

앞쪽의 불보살을 크게 그리고 위로 갈수록 권속들의 크기를 줄어들게 하여

 꽉 찬 화면이지만 안정감이 느껴지는 구도이다. 불보살의 상호가 위엄있고 단정하며,

 전체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화기에 의하면 연호 봉의가 수화승으로 참여하였고

근대기 활발하게 활동했던 보응 문성이 밑그림을 그렸으며, 10여 명의 화승이 함께 참여하여 그렸다.

사천왕의 안면과 화면 위아래의 구름에는 명암법을 도입하여 입체감을 주었고,

 전체적으로 부분부분 코발트블루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어 당시의 시대적 경향이 엿보인다.


신중탱





@동종

대웅전에 있는 이 동종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7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성 시기는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이 종은 하대로 내려갈수록 자연스럽게 넓어지는 형태인데 정상부에는 음통과 용뉴가 한 개씩 있다.

음통의 입구는 연꽃이 만개한 모양인데 아래쪽은 사선으로 표현하였다.

용뉴의 용은 꼬리로 음통을 두 번 휘어 감고 있으며 앞다리와 입으로 종의 상부인 천판을 부여잡고 있다.

평평한 천판 위에는 열두 개의 연판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천판과 종신이 만나는 부분을 도드라진 선으로 구분하였다.

그 아래인 상대는 범자문원권대(梵字文圓圈帶)로 장식하였다.

이처럼 범자문으로 상대를 장식하는 기법은 조선 후기에 보이는 특징이다.

범자문원권대 아래에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사다리꼴 모양의 연곽과 보살상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연곽의 둘레는 당초문을 장식하였다. 연곽 내부에는 아홉 개의 연뢰가 있고 그 주변에는 화문이 있다.

 연곽 사이에는 합장한 모습의 보살상이 네 구 배치되어 있는데

원형의 두광과 합장을 한 채 화관 형태의 보관을 착용하고 연꽃 대좌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하대에는 연화당초문이 가득하다. 종신에 명문이 없어 정확한 주종 시기를 살필 수는 없지만,

 형식적인 특징 등을 고려할 때 조선 후기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탐진당



@명부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6호로 지정된 용문사 명부전에는 조선 시대의 목조불상 25구가 모셔져 있다.

명부전 내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왼쪽에 도명존자, 오른쪽에 무독귀왕이 시립하고,

그 좌우로 시왕상 10구와 판관 2, 귀왕 2, 명부사자 2, 인왕상 2구 등 모두 21구의 존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용문사의 백지묵서 발원문에 의해, 목조지장시왕상은 1678(현종 4) 지현(智玄)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존인 지장보살상은 높이가 87이며, 나머지 상들은 150정도이다.

지장보살상은 목재 재질 위에 일정한 크기로 한지(韓紙)를 붙였다.

양 귀는 나무로 조각하였고, 두 손은 별도로 만들어 손목에 끼워 넣었다.

시왕상과 판관, 인왕상 역시 목조로 여러 부위를 조립하여 연결하는 방식으로 조성되었고 후대에 채색을 가하였다.

 

민머리형의 지장보살상은 상반신을 곧게 세운 결가부좌에 양감이 풍부한 건장한 모습이다.

상호는 사각형에 가까우며 살집이 있고 턱부위가 모나지 않아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이마는 넓은 편이며 백호가 돌출되었고 긴 눈은 눈꺼풀이 두꺼운 편이다.

콧날은 완만하며 콧방울을 작게 나타냈고, 뚜렷한 인중이 넓게 패여 있다.

도톰한 입술은 입술 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띠며 큰 귀의 귓바퀴가 뚜렷하다.

 짧은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착의는 가슴 아래로 평행하여 승각기를 입고, 오른쪽 어깨에 걸친 편삼 위에 대의를 입었다.

엉덩이까지 길게 늘어진 대의는 오른쪽 어깨 부분만 감싼 변형통견식이며,

양쪽 어깨에서 주름선이 계단식으로 정연하게 표현되어 있다.

군의는 결가부좌한 양다리 아래로 넓게 드리워져 있는데,

가장자리의 조각이 매우 두껍다. 법의는 매우 두꺼우며

옷 주름은 굵고 간략한 몇조의 선으로 표현되었다.


  

도명존자는 오른손에 석장을 쥐고, 무독귀왕은 합장한 채 각각 시립하였는데,

신체와 비교하면 머리가 큰 편이며 넓은 어깨가 당당해 보이고 온화한 인상을 준다.

방형의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시왕상들은 모두 등받이와 팔걸이, 족좌가 있는 의자에 앉아 정면을 향해 있다.

가슴 중앙에서부터 수()를 아래로 길게 늘어뜨리고, 화문을 도드라지게 한 장식은 따로 제작하여 끼워 넣었으며,

 조립된 의자에 족좌를 따로 부착하였다.

등받이 양측에는 용두장식이 있고, 팔걸이의 양측에는 봉황두(鳳凰頭)를 장식하였다.

 

본존인 지장보살상은 육신부의 양감과 건장한 모습 등으로 불신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수작이다.

이 용문사 지장시왕상은 17세기 말의 대표적 조각승인 지현의 작품으로,

조성자와 제작연대가 분명하여, 당시의 조각 양식 발전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적묵당




범종각


칠성각






칠성각 뒤편은 찻밭이다.









용문사를 나와 숙소를 정하고 앵만호의 일몰을 담아보려 했지만 날이 흐려 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