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고석정과 순담계곡

2018. 3. 30. 21:18명승지

 

 

 

 

철원 고석정과 순담계곡

 

지난여름 폭우가 쏟아진 그다음 날 포천, 파주 일대의 폭포를 둘러보다가

 마지막으로 철원의 고석정을 들렸지만, 불행히도 귀경할 시간도 촉박하고,

둘레길도 없어 그 유명하다는 순담계곡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미련이 남았는데,

 최근에 부교를 설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계곡의 풍광을 즐길 수 있겠거니 하고

 기대하고 아픈 몸 이끌고 찾아갔지만  부교는 겨울 빙상축제 동안만 부설하고

바로 철수해 버리고 난 후라 순담계곡은 끝내 둘러볼 수가 없었다.

꿩대신닭이라고 10여 분짜리 유람선 보트만 타고 휑하니 둘러보고

아쉬운 미련만 안고 돌아왔다. 아래 사진들은 보트 안에서 담은 순담계곡의 풍경이다.

고석정에 관련된 한시와 관련 옛기록을 참고로 함께 올려본다.

 

 

 

@고석정(孤石亭)은 철원읍 동송읍 장흥리 한탄강 변에 있는 정자이다.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과 고려 충숙왕(재위 12941339)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바 이로 미루어 본다면

고려 때부터 있었던 정자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고려 승() 무외(無畏)

 <고석정기>와 김량경의 시 등에 이 고석정이 등장한다.

이설(異說)로는 조선 시대 이르러서는 명종 때 의적 임꺽정(林巨正)

이곳에 은거하였다고 하며, 뒤에 사람들이 이를 기리기 위하여 정자를 짓고 고석정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옛적의 2층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버리고

지금의 정자는 19711215일에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고석정은 현재 강원도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석정 아래 이 바위를 고석(孤石)이라 부른다. 고석정이란 이름도 이 바위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석(孤石)의 고()를 외로운 고로 풀이하여 이 바위를 <외로운 바위>라고 하는 데

()자의 의미를 찾아보면 3가지가 있다.

 외롭다()는 의미 우뚝하다()하다는 의미

 임금이 자신을 나추어 부르는 말(王侯之謙稱)이 있는데

고석(孤石)의 고()는 여기서는 우뜩서 있다는 의미로 새겨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고석정은 이 고석 바위 하나로도 철원 팔경의 이름 값을 한다.

 

 

고려 때의 승려 무외(無畏)가 남긴 고석정기(孤石亭記)에 의하면

거의 300척이나 되는 바위의 중간에 구멍이 있어,

그 안은 방과도 같으며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다고 하는데

등암금지(登巖禁地)라 올라가서 확인할 수는 없다.

 

 

  

이 고석은 조선 시 임꺽정(林巨正, ?~1562) 관련 전설이 전한다.

양주(楊州)의 백정 출신 임꺽정이 1559(명종 14)부터 대적당(大賊黨)을 만들어

동지들을 규합하고 두목이 되어 1562년까지 3년 황해도 구월산과 서흥·신계를 중심으로

관청이나 토호·양반집을 습격해 재물을 빼앗아 서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적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15621월 관군에게 토벌되어 생을 마감했는데

그 활동 시기에 관군에 쫓겨 다닐 때 이곳 고석바위 안 석굴에 칩거하면서

수시로 출몰하여 조공물(朝貢物)을 탈취해 빈민을 구제했다고도 한다.

 

 

 

고석바위 정상에서 오른쪽 뒤로 돌아가면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이 있는데

 이곳으로 들어가면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고,

 벽면에 <유명대(有名坮)>, <본읍금만(本邑金萬)>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지만

언제 누가 새겼는지는 알 수 없다.

거기에는 또 높이 100, 40, 깊이 2040의 직사각형 감실(龕室)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진평왕이 세운 비가 있던 자리라고 하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지금도 이 고장 사람들은 고석정을 꺽정바위로 부르며

고석정의 형상이 마치 임꺽정이 신고 다니던 장군화를 닮았다고 믿고 있다.

 

 

 

 

 

고석정 아래 이 계곡은 순담계곡이라 하며 한탄강이 흐르고 있다.

한탄강은 한반도 중서부 화산지대를 관류하는 강으로

 한강의 제2지류이자 임진강의 제1지류이며, 길이는 134.5이다.

강원도 평강군 상송관리, 장암산(長巖山, 1,052m) 남쪽 계곡에서 발원해

김화군과의 경계를 따라 남쪽으로 흘러 휴전선을 지나 남대천을 합류한다.

유로를 남서쪽으로 바꾸어 영평천(永平川차탄천(車灘川)을 차례로 합치고,

연천군 미산면과 전곡읍 도감포 사이에서 임진강으로 흘러든다.

 

 

 

흔히 6·25전쟁 중 다리가 끊겨 후퇴하지 못한 사람들이

 '한탄하며 죽었다'라고 해서 불려진 것이라고 하나

이 명칭은 '크다·넓다·높다'라는 뜻의 '()'

 '여울··'의 뜻인 '()'이 어울린 순수한 우리말이며,

이를 한문으로 음차한 것이다.

또 다른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곳에 수도로 삼고 태봉국을 세운 궁예가

 고려 태종 왕건에 의해 패망하였는데 그 궁예의 한()이 서린 강이라 하여

 한탄강(恨灘江) 이라고도 불렀다.

 

 

 

@고석정 위쪽은 철원 8경 중 하나로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순담계곡이다.

신철원으로부터 북서쪽 5지점에 있으며, 고석정에서는 2떨어진 곳에 있다.

조선 영조(재위17241776) 때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16911767)가 요양하던 곳이다.

한탄강 물줄기가 이룬 계곡 중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순담(蓴潭)이란 이름이 지어진 유래는 순조(18001834)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17431806)20평 정도의 거문고 모양의 연못을 파고

 제천 의림지에서 가져온 물풀인 순채(蓴菜)를 옮겨다 심었다 하여 <순담(蓴潭)>이라 불렀다고 한다.

기암절벽과 맑은 물이 이루는 연못,

천연의 하얀 모래밭이 어울려 경치가 뛰어나 현재 철원 8경 중 하나로 꼽힌다.

 

 

 

 

 

~孤石亭記/무외(無畏)/동문선~

 

푸른 바위 맑은 물에 높다랗게 솟았는데

양쪽 언덕에는 가을 산이 비단 병풍 펼쳐있네

저녁이 되자 솔바람 소리 맑게 들리니

신선이 황정경(黃庭經) 읽는 듯하네

 

@황정경은 중국 위·(魏晉) 시대의 도가들이 양생(養生)

수련의 원리를 가르치고 기술하는 데 사용했던

도교 관계 서적으로 원래 명칭은 태상황정외경옥경 太上黃庭外景玉經

태상황정내경옥경 太上黃庭內景玉經이다.

그밖에 후서로 태상황정중경경 太上黃庭中景經이 있다.

일반적으로 중경경황정경에 포함되지 않는다.

 

 

 

황정경포박자 抱朴子하람(遐覽)편에 이미 기록되어 있으며

 7언가결(七言歌訣) 형식으로 씌어진 초기 도교 경전이다.

 황정(黃庭)은 인간의 성()과 명()의 근본을 가리키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뇌(上黃庭심장(中黃庭비장(下黃庭) 등을 말한다.

양생과 수련의 요지는 명리(名利)를 탐내는 마음이 없는 담박한 상태(恬淡)

 무욕(無欲), 허무자연(虛無自然)에 이르는 데 있다.

또한, 거기에 이르는 방법은 기욕(嗜慾)을 단절시키고 호흡을 조절하며

 수진(漱津 : 타액을 삼키는 것)하고 신성을 길러, ((()'황정'에 응집시키는 것이다.

 내경경 內景經36장과 외경경 外景經은 내용 면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다.

황정경의 주해서는 많은 편이며 그중 양구자(粱邱子)와 무성자(務成子)의 영향이 비교적 크다.

~출처: 위키백과~

 

 

 

 

고석정/김양경

 

태초에 어떤 사람이 이 정자를 지었던가.

만 길이나 되는 산등성이 허공에 걸려있네

몸이 가벼우니 문득 바람이 옷에서 나는 것 깨닫고

걸음이 편하니 이끼가 산을 받혀줌을 알겠네

학 주변의 소나무는 늙은 용의 푸른 수염 같고

몰새 밖에 노을이 지니 물고기 꼬리 붉게 보이네

철원은 기름지고 참으로 아름다운 땅인데

화려한 전각이 다 거칠었네

고기잡이와 나무꾼 가리키니 예와 어제를 느끼며

글귀를 찾아 읊조릴 때 오사모가 기울렀네

 

@김양경(?∼1484:성종 15). 조선 전기의 문신.

@오사모(烏紗帽)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벼슬아치가 쓰던,

검은 깁으로 만든 모자.

오사모라는 것은 조회 및 사적으로 알현할 때의 빈객의 복장이다.

 당서24, 거복지(車服志).

 

 

 

 

 

 

 

 

 

 

 

 

의병을 일으켜 민족혼을 일깨우신 면암 최익현(崔益鉉) 선생이

 친구들과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철원 8경을 한시로 작시하는데

  고석정의 멋스러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최 선생은 고석정의 <()>자를 높을 <()>자로 표현했다.

 

高石亭/면암 최익현

 

海山餘趣更何求 高石東州別界幽 (해산여취갱하구 고석동주별계유)

只此堪誇涉玄圃 亦曾多事訪丹丘 (지차감과섭현포 역증다사방단구)

時艱不合思輕退 身健偏宜賦壯遊 (시간불합사경퇴 신건편의부장유 )

㝡是親堂西日迫 歸心爭駛 下灘舟(최시친당서일박 귀심쟁사하탄주)

 

(해산의 남은 흥취 다시 어디서 찾으리,

동주의 고석정이 그윽한 별천지라,

여기가 감히 현포라 자랑할만 하구니,

구태여 단구 찾으려 애쓸 것이 무에 있나.

때가 어렵다고 가벼이 물러남은 옳지 않고

몸 건강하니 먼 여행길에 나섰다.

어버이는 (늙어서) 서산의 해 기울어지니 듯하니

돌아갈 마음 조급함이 여울의 나룻배 내려가는 듯하네.

 

@丹丘는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함. 선경(仙境), 선계(仙界),

선향(仙鄕),선환(仙寰), 신경(神境),옥허궁(玉虛宮)과 유사어다.

@현포(玄圃) ; 중국의 전설에서, 천제가 살고 있다는 곳

@친당(親堂):부모를 일컫는 말이다.

 

 

 

 

 

 

 

고석정(孤石亭)

~이은상~

 

아름다와라 절경 한 구역 예부터 이름난 고석정

물은 깊어 검푸르고 골은 돌아 몇 굽인데

3백 척 큰 바위 하나 강 복판에 우뚝 솟았네!

 

위태론 절벽을 다람쥐가 기어올라

갈 길도 잊어버리고 강물을 내려다보는 뜻은

여기서 전쟁을 끝내고 총 닦고 칼 씻던 곳이라

 

고석정 외로운 돌아 오늘은 아직 너 쓸쓸하여도

저 뒷날 많은 사람들 여기와 평화의 잔치 차리는 날

낯익은 시인은 다시 와서 즐거운 시 한 장 또 쓰고 가마

 

 

 

 

 

 

 

 

 


순담(蓴潭) /면암 최익현

 

綠野當年意味淸(녹야당년의미청)

客來只有谷禽鳴(객래지유곡금명)

浮雲流水迷茫地(부운유수미망지)

采采潭蓴不盡情(채채담순부진정)

 

늘판을 누비던 그 사람 의지는 맑았건만

나그네 되어 돌아오니 산새만 지저귀네

떠도는 구름 흐르는 물 아득히 먼 곳에

나 홀로 순채를 따는 마음 가이없네

 

 

 

 

 

 

 

 

 

 

 

고려사절요 제24(지은이 金宗瑞 等)

수강궁(壽康宮)에 거둥하였다가 철원(鐵原)에서 사냥하고 고석정(孤石亭)에 이르렀다.

(충숙왕 기미6:1319  

 

 

  

가정집 제19/ 율시(律詩)(지은이 이곡(李穀)

 

충숙왕(忠肅王)이 철원(鐵原)에서 사냥할 적에 고석정(孤石亭)에 올라 절구 한 수를 남겼는데,

이때 안부(按部) 정공 자후(鄭公子厚)가 객관(客館)에 썼다.

그리고 뒤에 삼장법사(三藏法師) 조순암(趙順菴)도 그 운에 의거해서 응제(應製)하였다.

 이에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삼가 절구 두 수를 지었다.

 

 

 

엎어진 앞 수레를 누가 제대로 경계할까 / 覆轍誰能後戒前

여기는 바로 태봉의 유적 옛날의 그 산천 / 泰封遺跡舊山川

왕이시여 먼 사냥은 좋은 계책이 못 된다오 / 勸王遠狩非良策

이유는 하나 간신은 하늘을 겁내지 않으니까 / 只爲姦臣不畏天

 

 

 

산을 등진 관사 그 앞에 펼쳐진 그림 병풍 / 背山官舍畫屛前

반걸음 오르면 백리천이 또 내려다보인다오. / 跬步登臨百里川

술자리에서 다시 만난 우리 어진 태수님 / 置酒更逢賢太守

명절날의 멋진 유람 그야말로 가을 하늘 / 勝遊佳節正秋天

 

 

 

 

 

 

 

 

 

@동문선 제68(지은이 : 徐居正)

孤石亭記 /석무외(釋無畏)

 

철원군(鐵員郡)에서 남쪽으로 만여 보를 가면 신선의 구역이 하나 있는데,

 서로 전하기를, “고석정(孤石亭)이라.” 한다.

그 정자에는 큰 바위가 우뚝 솟아나 높이가 삼백 척 가량 되고 둘레는 10여 장()쯤 된다.

바위를 타고 올라가면 구멍 하나가 있어서 기어들어 가면 집같이 생긴 층대가 있는데, 10명쯤 앉을 수 있다.

 옆에 돌비가 세워져 있는데,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놀러 와서 세운 비다.

구멍에서 나와 꼭대기에 오르면 판판하여 둥근 단()과 같은데

거친 이끼가 끼고 푸른 솔이 둥그렇게 서서 마치 요를 펴고 푸른 일산을 펴놓은 듯하다.

 또 큰 내가 동남쪽으로부터 흘러 언덕을 끼고 돌을 굴려 여러 풍류를 갖추어 놓은 것 같고,

바위 밑에서는 고인 물이 못이 되어 가까이 가서 보면

벌벌 떨릴 만큼 두려워 마치 신기한 물건이 사는 것 같다.

그 물이 넘쳐 쏟아져서 서쪽으로 3십 리쯤 흘러가다가 서남쪽에서 부딪쳐 남쪽으로 흐르는데,

앞뒤에 모두 바위와 멧부리가 벽처럼 서 있고 단풍나무ㆍ남()나무ㆍ

소나무ㆍ상수리나무가 그 위에 있어서 그 신묘하고 맑고 시원하고 기이한 형상은

비록 글에 능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자라도 아마 비슷하게 묘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지난 무자년 가을에 산인 만행(萬行) 등과 찾아 왔었는데,

처음 볼 때는 정신이 상쾌하더니 마지막에 오르니

사려(思慮)마저 끊어져서 우두커니 앉아 있노라니,

모든 것이 잊혀져 해가 저무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에 늦게서야 왔다는 탄식을 하고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미 그 모양을 기록하고 또 시()로써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