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외무법(心外無法)이라. 경전을 들어야 하나 놓아야하나.

2018. 1. 19. 22:17잠언과 수상록




심외무법(心外無法)이라. 경전을 들어야 하나 놓아야하나.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모든 것은 네 마음대로 해도 좋지만

무화과열매만은 따 먹지라고 했습니다. 무화과 열매는 지식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기독교는 성경(聖經)에 대한 지식이 봇물처럼 넘치고 있습니다.

 

불교 공부는 명자상(名字相)을 떠나야 한다고 합니다. 명자상의 핵심은 곧 말과 글입니다.

그런데 84천 경문을 비롯하여 아비달마로 시작된 방대한 논서들과 조사어록들이 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반대로 선()불교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심외무법(心外無法)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하여

문자로 들어낼 수 없으며,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으니 이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합니다.

불교공부는 이 마음 밖에 일체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경전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심지어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까지 합니다.

말과 글 모든 형상을 놓아야만 부처님이 말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생이 진정한 불법을 알기위해서는 경전을 들어야 할까, 놓아야 할까 망설이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화두라는 것도 의심을 가져 봅니다.

오늘날 선승들이 말하는 화두 父母未生前 本來面目 是甚麽을 비롯하여

이 뭐꼬?”의 대상들은 모두 언어도단(言語道斷)의 대상이 됩니다.

불성(佛性)이니 진여(眞如)이니 하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의 대상입니다.

교학에서는 불교공부를 경전을 위주로 하는데 이는 곧 말과 글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가에서는 도라는 것은 신심명에 이르듯

非思量處(비사량처) 情識難測(정식난측)이라

중생의 헤아림으로 분별할 수 없다고 일제 말과 글을 떠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불교공부는 침묵의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원시경전의 아함경을 보면 외도의 유무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부처님도 침묵했습니다.

이는 선()으로 말하면 무()자 화두와 같은 것입니다. 이 뭐꼬(是甚麽)의 대상인 것입니다.

유마경에서는 지혜의 제일인자라 불리는 문수보살의 달변도 유마거사의 침묵을 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말이나 글이 없었다면 어떻게 부처가 아난에게 법을 전할 수 있었으며,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의 태두(泰斗)라 일컫는

달마대사가 혜가에게 전법(傳法)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이런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선가(禪家)3대 선시(禪詩)로 곱히는 지공(誌公)화상의 대승찬(大乘讚)에서는

 도의 참 모습을 알고자 한다면 성색언어를 버리지 말라.

 언어가 곧 도이니라(若欲悟道眞體 莫除聲色言語 言語卽是大道 )라고 했습니다.

언어가 곧 번뇌이니 그 번뇌를 끊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지공화상이 어떤 분이냐 하면 달마대사가 양()나라의 무제(武帝)를 뵙고 문답한 후

 양무제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자 휑하니 북위 소림사로 떠나버리자

무제가 측근에 있던, 당시 기인으로도 알려진 고승 한분에게 저 분이 누구냐고 묻자

 저 분은 관음보살의 화신입니다.하고 알려준 분이 바로 지공화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교공부를 하는 것은 부처님의 도를 알기 위함인데

경전을 놓아야 하나 들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봉착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 선가에서 잘 알려진 고명원묘선님의 법어를 갖추린

선요라는 책 서문에 해답이 명료하게 설명이 되어 있어 소개합니다.

(고봉원묘화상에 대해서는 본방 중국고승들의 이야기/간화선의 고승 고봉원묘화사참조)

 

(영은사 문수보살)


<禪要 跋>

복주 고령사 신찬스님은 경을 읽는다고 하여 묵은 종이만을 뚫어지게 본다라고 하였고,

윤편은 책을 읽는다고 해도 술찌끼 같은 내용을 맛볼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도는 말과 글자로써 구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의 실체는 소리와 모양이 없으니, 말과 글자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그 내용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우리 부처님 세존께서 비록 중생의 근기에 따라

교화하는 법을 자상히 했더라도 십이부법을 말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달마스님이 서역에서 오시어 불립문자를 주장했더라도

법을 전할 때에 얼굴을 맞대고 입으로 전했으니, 이 또한 말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개 도는 말과 글자에 있지 않더라도 실로 말과 글자를 여의지도 않습니다.

특히 가장 정미로운 뜻은 말 밖에 갖추어져 있어 쉽게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세상의 공부하는 이들이 자주 말 떨어지는 곳을 집착하여 그 정미로운 뜻을 알지 못합니다.

 

부질없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고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말과 글자를 방해물로 여겨서 고령사 신찬스님이나 윤편이 격렬하게

묵은 종이와 술찌끼라고 비방하는 결과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말과 글자야말로 바로 마음의 빛을 드러내어 오묘한 도를 그려내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처음부터 도를 장애하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고봉화상의 많은 설법 가운데서 도 닦는 비법을 추려

직옹 홍군이 선요라 이름 하였습니다.



(중국정부가 공식 인정한 양귀비 초상)

 


심외무법(心外無法)이란 말을 선사들이나 고승들이 하지만

 분들은 이미 모든 경전을 섭렵(涉獵)하신 분들입니다.

그럼으로 이 말은 초입자들을 위한 말은 아닙니다.

깨달으면 경전도 법이란 것도 필요 없기 때문에 하신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두운 밤 뱃사람들이 등대의 불빛을 보고 뱃길을 찾아가듯

중생은 길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란 말도 경전을 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경전의 말귀에 빠지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라는 말은

손가락을 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라는 의미입니다.

말이란 그저 방편이라는 것을 알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사람인 양귀비가 안록산과 밀회를 즐길 때 이야기입니다.

양귀비가 안록산이 그리워 안록산을 부를 때

 소옥아, 소옥아하고 자기의 몸종인 소옥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부름의 진정한 의미는 소옥이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말과 글이란 것은 그런 것입니다. 방편일 뿐입니다.

 

이래저래 생각해 보니 불교공부는 쉬우면서도 참으로 난해합니다.

직설적으로 경전을 들어야 하는냐? 놓아야 하는냐?라고 묻는다면

이는 실로 한마디로 답하기로는 난감한 질문입니다.

그렇다고 선사들의 말처럼 경전을 멀리하고 화두에만 매달리는 것도 그렇습니다.

경전이란 경전을 벗어나기 위해 읽는 것이라고 어느 선인(先人)이 말했습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벽암록이나 무문관을 보면 많은 화두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화두를 가지려면 이 뭐꼬?라는 의구심이 절실해야 하고

또 어느 정도 수행 과정도 필요합니다.

만약 외길로 오로지 화두만 가지고 공부하고 싶다면 적어도 남이 말한 화두가 아니라

자신의 화두를 가지고 달려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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