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태학산 태학사와 법왕사(1/2)

2018. 1. 14. 13:04국내 명산과 사찰

천안 태학산 태학사와 법왕사(1/2)

 

천안 태학사는 지난 여름 남쪽 지방 미타석굴 등 석굴사원들을 탐방하고 나서 그런지

갑자기 천안 태학산의 천연동굴이 있다는 법왕사가 어떤 절인가 싶은 호기심으로 찾아갔다가 알게된 절이다.

천안 법왕사는 옛적에 광덕사를 비롯하여 각원사, 성불사를 둘러 보다가

시간대가 맞지 않아 포기했던 절이기 다소 미련이 남았던 사찰이기도 하다.

마침 옛 도반 중의 한분이 천안에서 카페를 열었다기에 겸사겸사하여 내려갔다.


(좌측은 태학사 우측은 법왕사다)

 

@천안 태학산 자락에 두 절이 위치하고 있는데 하나는 태학사요 다른 하나는 법왕사다.

사찰의 진입로가 같은 사찰은 많지만 두 사찰이 계곡이나 산을 등진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요사채를 중심으로 나란히 붙어 있고 법당도 겹치는 것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태학사는 극락보전과 미륵전을 두고 법왕사는 대웅전과 지장전 그리고 나한전을 두고 있다.

아마도 같은 문중에 같은 도반이였기에 법당도 이렇게 다정하게 나누어 건립한 것이 아닌가 사료해 본다.

뿐만 아니라 두 사찰간의 알력없이 삼태리 마애석불은 태학사가,

천연동굴의 마애불은 법왕사가 관리하는 것도 특이하며

한편으로 불심의 무애심(無碍心) 보든 듯하여 보기가 좋다.

이번 포스팅은 편의상 태학사와 법왕사를 따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태학산(泰鶴山)은 서울에서는 그리 많이 알려진 산은 아니지만

천안지역에서는 태학산 자연휴양림과 더불어 많이 알려져 있는 모양이다.

태학산은 해발 455m로 천안 시가지 남서쪽에 위치한 산인데

지리적으로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의 풍세면과 광

덕면과 아산시 배방면 수철리를 경계로 삼고 있는 산이다.

북서쪽에 위치한 배방산과 능선이 이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천안 고을 남쪽 18리에 위치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872년 지방 지도(1872年地方地圖)에는 태화산(泰華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조선 지형도(朝鮮地形圖)한국 지명 총람에는

태화산(太華山)으로 한자를 달리해 표기하고 있다.


 

(제1부) 천안 태학산 태학사(泰鶴寺)


@태학사는 바로 옆은 요사채를 경계로 맞붙어 있는 법왕사와 함께 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한다.

사내의 안내판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때 진산조사(珍山祖師)

절 뒤의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한 뒤 절을 창건하여 해선암(海仙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의 중창 및 중건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현재의 절은 1931년에 춘담(春潭: 1903~1994)스님이 옛 해선암을 재건하고

마곡사에서 득도한 그 이듬해 해선암을 태학사(泰鶴寺)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선암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해선암 터에서 보면

풍세면 논 모내기철에 논에 물을 담으면 수면이 저녁노을 빛에 반사되는 모습이

바닷물이 되돌아 오는 것 같다 하여 바다 <()>를 따 해선암(海仙庵)이라 불렸다고 한다.

태학사가 있는 산등성에 보물 제407호로 지정된 삼태리 마애불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과 미륵전 그리고 요사채가 전부다.


(극락보전)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지장보살



예적금강을 중심으로 둔 신중탱

(극락보전 전경)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관음불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불로 모셨다.


미륵전이다. 전각안에는 아직 불상을 모시지 못하고 마애불사진으로 대치하고 있다.






@삼태리 마애불상

이 마애불은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태화산(泰華山)의 해선암(海仙庵) 뒷산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입상이다.

불상은 7.1m의 크기이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천안 삼태리(三台里) 마애여래입상에 관한 명문과 문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조성 배경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삼태리 마애불은 196493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07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상 윗부분에는 언제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목조 건물을 가설하기 위한 흔적이 남아 있다.

불상은 머리가 몸에 비해 큰 듯하지만, 7등신(等身)에 가까운 신체 비례를 갖추고 있다.


통견(通肩 : 옷이 양쪽 어깨를 덮고 있는 것) 형식으로 법의(法衣 : 불상의 옷)를 입고 있으며,

양 손은 가슴 앞으로 올린 다음, 손등을 위로 한 채 오른손을 위에 두고,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왼손을 아래에 마주보게 두고서 손끝을 살짝 만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수인은 고려시대 마애불상에 많이 보이는데, 다만 그 성격은 알 수 없다.



 

삼태리 마애여래입상은 마애불상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인 윗부분을 고부조로 새기고

아랫부분을 밋밋하게 조각하였다. 불상은 크고 둥근 육계(肉髻 : 정수리 위에 솟아나온 부분)

 마치 가발을 쓴 것과 같은 소발(素髮 : 머리카락이 표현되지 않는 것)의 머리카락을 하고 있다.

장방형의 상호(相好 : 얼굴)에 이마의 길이는 눈썹과 맞닿을 정도로 짧고,

이마 중앙에는 백호(白毫 : 원래 흰털을 뜻하지만,

후대에 보석으로 대체됨)를 끼워 넣기 위해 뚫은 구멍이 나 있다.

반원으로 새겨진 눈썹과 가늘게 뜨고 있는 초승달 같은 눈,

커다란 코, 윗입술이 살짝 들린 입, 튀어나온 광배 뼈,

어깨까지 닿아 있는 귀를 가지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 : 세 개의 선)가 양각되어 있다.


 

마애여래입상은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는데, 그 폭은 다리 부분과 거의 같다.

즉 불상의 몸을 장방형으로 구획한 다음, 어깨와 팔꿈치 등 굴곡진 부분을 깎아 내는 방식으로 조각하였다.

법의 자락은 가슴 앞에서부터 U자를 그리며 무릎 앞까지 내려오는데,

윗부분에서는 그나마 평행계단식 표현법이 구사되다가

다리 부분에 이르러서는 선각(線刻)으로 간략하게 표현되고 있다.

정강이 부분은 마모가 심하여 선명하지 않으나

수직선 몇 가닥으로 군의(裙衣 : 치마) 자락을 표현한 듯하다.

한편 양쪽 어깨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는 법의(法衣 : 불상의 옷)의 주름은 대칭적으로 처리되었으며,

팔뚝 위를 휘감고 내려오는 법의 주름도 같은 모습이다.


 

삼태리 마애여래입상은 불상의 형식과 상호의 표정,

바위 바깥부분에서 안쪽으로 오목하게 파고 들어가는 마애 기법 등을 통하여 볼 때,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징)

산 정상부의 거대한 바위를 이용하여

 마애기법으로 새기던 고려시대 전기의 마애불상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마애여래입상은 광대뼈가 강조되는 얼굴 표현 등에서

 고려시대 전기에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고려시대 전기에 유행하던 산 정상부의 마애불상의 중요한 예이자

얼굴의 표정 등에서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이 같은 시기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불상으로서

고려시대 전기의 시대성과 지역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마애불 옆에 고은의 시()가 걸려있다. 고은(高銀, 1933 ~ )시인은

 전북 군산 출생으로 1958"현대시"'폐결핵'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하신 분으로 노벨문화상 후보자로 거론될 만큼 대단한 시인이다.

이 글을 보니 문득 삼조 승찬 스님의 신심명(信心銘)

圓同太虛(원동태허) 無欠無餘(무흠무여)

兩由取捨 (양유취사)所以不如(소이불여)라는 말이 생각난다.

무상대도는 허공과 같아 원융하여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는데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여영하지 못하는 의미다.

시비(是非), 선악(善惡), 호불호(好不好), 증애(憎愛)와 희비애락(喜悲哀樂)에 얽혀

취하고 버리는 일로 살아가는 이 중생의 삶을 돌아보라는 의미일게다.



태학사는 마애불을 보기 위해 찾는 절이다.

전각은 너무 단조롭다. 법당이라야 극락보전과 미륵전 뿐이고 그리고 요사채가 전부다.

(제2부 법왕사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