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치족 인디언 결혼 축시(祝詩)

2017. 12. 23. 21:32삶 속의 이야기들




아파치족 인디언 결혼 축시(祝詩)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

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하리라


 

결혼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서 예부터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로 여겨져

엄숙한 분위기에서 하객(賀客)의 축복 속에 신랑신부의 환희의 장으로 여겨 왔다.

그런데 요즈음 결혼식장에 가보면 옛적 우리네 식하고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되어

 당황스러운 경우도 느끼곤 하다. 알맹이 없이 번지르 하게 포장만하거나,

아니면 마치 콘서트 장처럼 신랑이 혼자 노래하면서 등장하는가 하면,

높은 계단에서 신부가 걸어 내려오면서 한 곡조를 쏟아낸다.

그렇고 그런 소리를 피하려고 그러는 건지 몰라도 주례를 모시지 않고

사회자가 주례가 된 듯 진행하기도 하고, 심지어 케케묵은 주례선생의 말

 검은 머리 파뿌리가...” 귀찮아서인지 아예 실물(實物)을 식장에 들고 들어오는 신랑도 있다.

하객은 그저 입장권(?)을 끊은 관객일 뿐 안중에 없고

오로지 두 사람만의 공연장으로 변한지 이미 오랜 된 듯하다.

허긴 작금의 시대는 개성을 중시하는 시대라 주장하니

허드레소리라 치부해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나이든 세대로서는 다소 이해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결혼은 약속이다. 일생을 함께하는 약속이다. 그 약속은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신뢰는 모든 것을 받아드리고 포용하는 믿음이다. 신뢰는 그 어떤 조건을 달지 않는다.

두 영혼이 하나의 길을 가겠다는 믿음이요, 서약이기 때문이다.

신뢰가 없는 약속은 깨어지기 마련이다. 묵시적이든, 명시적이든 마음속에 조건이 내포되어 있다면,

어떤 바램이 있다면 그 신뢰는 신뢰가 아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차 제주공항에 내려서마자 사소한 다툼으로 이혼을 했다는

어느 신혼부부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지만

이는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겠다는 신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결혼을 본 공연이 아니라 오디션 정도 여긴 모양이다.

결혼은 화려한 결혼식이냐 초라한 결혼식이냐 하는 그런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혼 후의 어떻게 둘의 삶을 평온하고 사랑으로 영위 해 갈수 있느냐 하는 그것이 중요한 문제다.

철학자처럼 에로스니 아가폐니 하는 그런 사랑을 따질 필요도 없고, 몰라도 된다.

결혼은 어느 하나가 아니라 둘이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살다보면 인생살이에는 맑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바람 부는 날도 있고,

비오는 날, 추운날도 있고 더운 날도 있음을 알면 된다.

일이 잘못되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만 살피고 누가 라는 질문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일을 제쳐놓고 사람을 꼬집어 불평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옛 선사들은 악연(惡緣)도 선지식으로 삼아라.” 고 했듯

부부간에 일어나는 모든 고난과 분쟁은 신뢰를 굳건히 가지게 하고

서로의 믿음을 확인 시켜주려는 시련으로 여겨야 한다.

이는 시비(是非) 선악(善惡)의 문제가 아니라

위의 축시(祝詩)처럼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 앞에는 하나의 인생만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