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3. 13:22ㆍ국내 명산과 사찰
(도리사 일주문/ 해동최초가람성지 태조산 도리사)
(하기휴가기행 제15부) 신라최초의 가람 구미 도리사(桃李寺)
@신라불교의 최초가람지로 일컫는 도리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전법하며 절처를 찾아다니던 중,
눈 속에 오색의 도화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지은 다음 도리사(桃李寺)라 불렀다고 한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신라 최초의 절로 전해진다.
1677년(숙종 3) 화재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1729년(영조 5) 대인이 아미타불상을 도금하여 금당암으로 옮겨 봉안한 뒤
금당암을 도리사라고 고쳐불렀다.
1807년(순조 7)과 그뒤 여러 차례에 걸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태조선원·삼성각·조사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석탑(보물 제470호),
후불탱화(1876), 신중탱화(1881), 판목 24매로 된 〈묘법연화경〉 등이 있다.
1976년 6월 아도화상 석상이 발견되었으며,
1977년 세존사리탑을 해체 복원하던 중 금동육각탑형 사리구와 진신사리 1과가 발견되었다.
현재 진신사리는 새로 조성한 사리탑 속에 안치되어 있다.
도리사의 일주문을 보면 <해동최초가람성지 태조산 도리사>라고 되어 있고
모든 사찰안내서에는 도리사의 창건주로 신라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아도화상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아도화상의 실체에 대한 3가지 다른 기록이 나온다.
아도화상은 아도(阿道)는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도 불리는데
첫 번째는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때인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의 2년 후인
소수림왕 4년(374년)에 고구려에 입국하여 불교를 전한 승려로서의 기록이다
[김부식 (1145). 〈본기 권18 소수림왕〉. 《삼국사기》. “四年 僧阿道來”].
이 아도는 일반적으로 인도 승려로 추정하고 있다.
두 번째는 국적 불명의 승려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승려는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에서 신라로 건너와 불법을 전했다.
소지 마립간(재위 479년~500년) 때 시자(侍者) 3명을 데리고
일선군(一善郡) 모례(毛禮)의 집에 머무르다가 죽었다.
이 두 번째 인물과 첫 번째 인물이 동일인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두 번째의 아도가 신라에 전한 불교는 이후 법흥왕(재위: 514년-540년) 때
이차돈이 순교하여 이적을 보임으로써 널리 퍼지게 된다.
그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동고승전》에 나와 있다.
세 번째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아도는 고구려의 승려로,
5세에 출가하여 16세 때 위(魏)에 가서 아버지 굴마(堀摩)를 찾아뵙고,
19세 때 다시 고구려에 돌아와 어머니 고도령(高道寧)의 명을 받들어
미추왕 2년(263년)에 신라 왕가에 불교를 전파하려다 실패했다는 주인공이다.
아도화상은 그 후 3년 동안 일선현(一善縣, 善山)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 있었으나
미추왕의 딸 성국공주의 병을 고쳐준 공으로 그때부터 불교의 전도를 허가받고 흥륜사(興輪寺)를 지었다.
미추왕이 죽은 후 사람들의 미움을 사 다시 모례의 집에서 땅굴을 파고 들어앉아 죽었다.
이 인물이 행적이 유사한 묵호자(墨胡子)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명하다.
@ 신라불교의 전래는 불명확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라의 불교의 전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민승(民僧)이 들어와 공식외교를 통하지 않고
포교를 한 것이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와의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설선당
적멸보궁 오르는 계단
적멸보궁 안에서 바라 본 사리탑
도리사 적멸보궁은 능 대신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을 세웠다.
사리탑이다. 지금은 보수 중이라 주변이 어수선 하다.
아도화상동상
아도화상은 삼국 시대 경상북도 일원에서 활동한 승려로 법명은 아도(我道), 아두(阿頭).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아도본비(我道本碑)」에 의하면,
240~248년[위나라 정시 연중]에 고구려 사람인 어머니 고도령(高道寧)과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던 조위인(曹魏人) 아굴마(我堀摩) 사이에서 태어났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서축(西竺:인도) 사람이라고도 하고, 오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유사』의 「아도본비(我道本碑)」에 의하면, 아도는 고구려에서 태어났으며 5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출가하여 16세에 위(魏)나라로 가서 아굴마를 만나고,
현창(玄彰) 화상의 강석(講席)에서 공부한 뒤 19세에 귀국하였다.
263년(미추왕 2)에 신라로 가서 경주의 서리(西里)에 머무르며 대궐에 들어가서 불교를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사람들이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 하여 꺼려하였고 심지어는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래서 화를 피해 일선현(一善縣) 모례의 집
(현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987번지로 추정되며 ‘신라불교 초전지’라고 부름)에 숨어 살았다.
264년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어 무당과 의원이 치료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의사를 구하였다. 이때 대궐로 들어가 병을 치료하니
왕이 대단히 기뻐하며 아도의 소원을 묻자, 천경림에 절을 세워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으므로 왕이 허락하였다.
띠로 집을 덮고 흥륜사(興輪寺)를 창건한 뒤 그곳에서 불법을 강연하였으며
모례의 누이인 사씨(史氏)도 이때 여승이 되어 삼천기에 절을 짓고 영흥사(永興寺)라 하였다.
얼마 뒤 미추왕이 세상을 떠난 뒤 사람들이 아도화상을 해하려고 하자,
모례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든 다음 문을 닫고 들어가서
자절(自絶)하여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다른 기록과 『삼국사기』에 의하면,
아도가 신라 소지왕 때 시자 3인을 데리고 일선군 모례의 집에 와서 있다가 몇 년 뒤 병 없이 죽었고,
그의 시자 3인이 경률(經律)을 강독하여 가끔 믿는 이가 있었다고 하였다.
또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서축(西竺) 사람이라고도 하고,
오(吳)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도 전한다.
아도화상에 대해서는 여러 책에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해동고승전』에는 서축 사람이라고도 하고, 오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아도화상을 『삼국사기』 눌지왕조에 등장하는 묵호자와 동일 인물로 보는 설도 있다.
김천시의 직지사는 418년(눌지왕 2) 아도화상이 선산의 도리사(桃李寺)를 개창할 때 함께 지은 절이라고 한다.
절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한 후 멀리 황악산 직지사 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곳에 절을 지으라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태조선원
삼성각
삼성각 안은 칠성탱과 산신탱 그리고 독성탱이 모셔져 있다.
세존사리탑
<도리사석탑>
도리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석탑. 보물 제470호. 높이 330㎝. 각 부재의 결합방식이 특이한 이형 석탑이다.
지대석 위에 있는 기단부의 각면은 8개의 방주로 이루어졌으며 그위에 몇 개의 판석으로 된 갑석이 놓여 있다.
탑신은 3층인데 1·2층은 크고 작은 석재로 구성되어 모전석탑과 비슷하며 옥신과 옥개석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
1층은 각면을 사각형의 석재를 사용하여 3중으로 쌓았으며, 옥개석은 일반석탑과 달리 층급받침이 없고
모전석탑처럼 윗면에 몇 개의 층단이 있다.
2층은 석재를 2중으로 쌓았는데 남면 중앙에 문비형을 모각한 판석을 끼웠다.
3층은 옥신과 옥개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옥개석의 낙수면에 2단의 굄을 두었으며,
상륜부는 노반·석주·연화·보주로 이루어졌다.
이 석탑은 탑신부의 옥신을 여러 개의 석재로 중첩 결구한 점에서
모전석탑 형식이 엿보이지만 유례가 없는 특수한 석탑으로
경상북도 지방에서 유행한 방단식 석탑형식과 상통하는 면도 있다.
포대화상이다. 중국사찰에서는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숭상되어 사찰마다 쉬이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우리나라 사찰에서도 어떤 연유인지 포대화상을 모신 사찰이 늘어나고 있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다. 단청이 퇴색되어 고풍스러운 멋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경상북도 구미 도리사 극락전(龜尾 桃李寺 極樂殿)의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96년 11월 20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31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4월 8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466호로 지정되었다.
극락전은 도리사의 부속 암자인 금당암의 법당으로 19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내부에는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으며, 벽면에는 벽화를 그려 놓았다.
아미타회상도. 지장보살과 시왕들이 협시하고 있다.
아미타회상도. 아래 위태천과 함께 신장들이 둘러싸있다.
<아도화상 비>
도리사 남쪽 사면의 송림(松林) 속에 남쪽을 정면으로 하여 나란히 아도화상(我道和尙) 사적비(事跡碑)와
도리사(桃李寺) 불량답시주질비(佛糧畓施主秩碑)가 세워져 있다.
이 두 비(碑)는 조선 후기 건립된 것으로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도화상(我道和尙) 사적비(事跡碑)는 아도화상이 고구려에서 신라로 와서
불교를 포교한 내력을 자세히 적은 비석이며,
도리사 불량답시주질비(佛糧畓施主秩碑)는 비슷한 시대에
도리사 신도들이 논과 밭을 시주한 내역을 담고 있는 비석이다.
아도화상 사적비는 비석 높이 296㎝, 받침돌 가로 131㎝, 받침돌 세로78㎝,
받침돌 높이 31㎝, 비신 높이 197㎝, 폭 83.5㎝, 두께 24㎝, 이수 높이 69㎝, 제자경(題字徑) 10.8㎝,
비문자경(碑文字徑) 3㎝이다. 자연 암석을 받침돌로 삼았고 그 위에 장방형의 구멍을 파서 세웠으며,
이수는 앞면에 쌍룡을, 뒷면에 사룡을 조각하였고, 그 사이에는 운용(雲龍)을 각출하였다.
도리사 불량답시주질비(佛糧沓施主秩碑)는 비석 높이 161㎝, 폭 45㎝, 두께 24㎝,
덮개돌 높이 29㎝, 보주(寶珠) 높이 11㎝이다. 자연 암석을 받침돌로 삼았고,
상면에 장방형의 공(孔)을 파서 비신을 세웠으며, 덮개돌을 덮었다.
앞뒷면에는 태조선(太條線)으로 양각한 연봉과 줄기가 조식되었고,
좌우 측면에는 2단의 원조대(圓條帶)가 있으며, 정상 중앙에는 보주가 면각되었다.
[금석문의 의의]
아도화상 사적비의 남향한 비신의 표면에는 상부에 횡으로
<아도화상사적비(阿度和尙事蹟碑)>란 전자체(篆字體)의 제목이 있으며,
비문은 해서 종행(縱行)으로 첫줄에
‘조선국경상도선산부냉산도리사아도화상사적비(朝鮮國慶尙道善山府冷山桃李寺阿度和尙事績碑)’라
전제(前題)하고 음각하였다. 이 비(碑)의 뒷면에는 ‘자운비(慈雲碑)’ 명이 음각되어 있다.
<도리사 불량답시주질비>의 비문은 화강석을 갈아서 앞뒷면에 음각(陰刻)하였는데,
해서체로 가로 쓰기를 하여 초두에 ‘도리사불량답시주질(桃李寺佛糧沓施主秩)’이라 하고
도리사에 불량답(佛糧沓)을 시사(施捨)한 시주와 전답량(田畓量)을 결부(結負)와 두락(斗落)으로 병기하였다.
두 비석은 건립 연대상 17세기 중엽, 또는 18세기 초에 해당한다.
비석의 역사적 의미와 비문의 내용 및 비석의 조각 등을 고려할 때
충분한 역사적 가치가 있어 문화재로 지정하여 역사적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조선국 경상도 선산부(善山府)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 아도화상(阿度和尙) 사적비 (번역분)
화상(和尙)의 법호는 아도(阿度)이고 모친은 고씨(高氏) 도령(道寧)이며 부친은 위(魏)나라 사람 아굴마(阿崛磨)이다.
진(晋) 목제(穆帝) 영화(永和) 12년 병진년(고구려 고국원왕 26, 신라 내물왕 원년, 356년)에 아굴마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와서 국왕이 빈관에서 고도령과 함께 접대하였다. 이해 4월 8일에 해와 달의 꿈을 꾸었고
이로 이해 임신하여 다음해 정사년(357년) 인월(寅月, 정월) 19일에 화상이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신성한 자태가 있었는데 나이 5, 6세가 되자 어머니에게
“사람에게 아버지 없는 사람이 없는데 나만 홀로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위나라의 아무개가 너의 아버지이시다.” 라고 하니 아도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제가 가서 만나겠습니다” 하였다.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임신년(소수림왕 2, 고구려에 불법이 처음 들어온 해,
372년)에 사신 행차를 따라 위나라 서울에 들어가니 나이 16세였다.
길에서 한 대관(大官)을 만났는데, 대관이 말하기를 “너는 어떤 아이인데 무슨 일로 왔느냐?” 하니
“저는 고구려에 있는데 대국의 아무개가 저의 아버님 되십니다. 이에 천리가 멀다 않고 왔습니다.” 하였다.
아굴마에게 이르니 자기 아들임을 알고 또 골상이 범상하지 않음을 기쁘게 여겨
함께 돌아가 점치는 사람에게 보였더니 점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여래의 사인(使人)이니 장차 승려가 되어 불법으로 만세에 울릴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굴마가 그 일을 위나라 왕에게 말하였다. 왕이 “너의 아이는 무슨 일을 하고 싶어 하느냐?” 하니
“해동에는 불법이 없어 원컨대 승려가 되어 불법을 받들어 전하고 합니다.” 하였다.
왕이 “좋다” 하고는 불러 보고 도첩(度牒, 승려가 출가하면
국가에서 인정하는 문서)을 하사하여 이름을 아도(阿度)라고 하였다.
이어 현창(玄暢) 화상을 뵙고 또한 아도(我道)라고 이름하였다.
널리 선도(禪道)를 수행하고 의발(衣鉢)을 받아 동쪽으로 돌아오니 나이 19세였다.
불교의 복장으로 어머니를 뵈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라에 불도가 없어 아직 쉽게 행하기 어렵다.
듣자 하니 동경(東京, 신라 서울 경주)에 성왕이 있다고 한다. 너는 그곳에 가서 만일 행할만 하면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은둔하거라.” 하였다. 아도는 어머니의 명을 받고 동경으로의 길에 매진하여
선주(善州, 경상북도 선산) 땅의 냉산(冷山) 아래에 있는 주인 모례(毛禮)의 집에 이르렀다.
때는 신라 눌지왕(訥祇王, 417~457 재위) 치세였다.
스스로 묵호자(墨胡子)라 이름하고 머물러 지내며 품팔이하고 소를 치며 해가 저물도록 지냈다.
처음에 아도 화상이 붉은 관에 가사(袈裟)를 입고 불자(拂子)를 집고 조용히 참선하며 좌정하자 큰 빛을 발하고
신령한 털과 상서로운 무리가 방을 밝히고 뜰에 가득 차 천지가 환해졌다.
때는 한겨울이었는데도 눈 속에서 칠과 등나무가 생겨났다.
모례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그 근원을 따라 보니 남쪽 고개에 이르니 참으로 기이하고 뛰어난 곳이 있어
곧 암자를 짓고 받들어 모셨다. 오색 복사꽃이 눈 속에 가득 피어 암자 이름을 도리암(桃李庵)이라 하고
마을 이름을 도개촌(桃開村)이라 하였다. 이미 헤어져 돌아오니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소지왕(炤智王, 479~499 재위) 때에 아도(阿度)라고 하는 이가 다시 암자에 돌아왔는데 모양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상서로운 신변(神變)을 드러냈는데 더욱 이상한 것은 혹은 방광(放光)하여 세상에 두루 미치고
혹은 높은 대의 너른 돌 위에서 가부좌한 채로 공중에 떴다. 신령하고 기이한 소문이 원근에 자못 알려졌다.
그때 신라 왕에게 한 딸이 있었는데 병이 들어 의약으로 고치지 못하여 명하여 병을 고칠 사람을 찾아
사자를 사방으로 보내게 하였다. 사자가 어쩌다 모례의 집에 이르니 모례가 말하기를
“우리 집에 화상이 있는데 도를 알고 신통하여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사자가 가서 보고는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 돌아와 국왕에게 알렸다.
왕이 역마를 보내 불러 보고는 딸의 병을 모두 말하였다. 아도가 말하기를
“저에게 천경림(天敬林)을 주시면 곧 병이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들 말하기를 “이곳은 비보(裨補)로 전해온 바로서 만대에 이어온 것입니다.
위아래가 함께 받드는데 어찌 승려에게 주겠습니까?” 하였다.
아도가 말하기를 “상제(上帝)께서 저에게 명하였으니 이 땅은 허락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거짓으로 속이는 말이라 하여 믿을 수 없다고 하는데
근신(近臣) 이차돈(異次頓)이 홀로 말하기를 “불법은 깊고 깊으니 그 말을 따르십시오.” 하였다.
왕이 그가 요망하여 대중을 미혹하게 한다 하여 아래 관리에게 명하여 목을 베려 하니
이차돈이 말하기를 “불법은 신령함이 있어서 제가 죽으면 반드시 기이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목을 베자 피가 흰 우유와 같았고 머리는 스스로 공중을 날아 동문 밖 5리가 넘는 높은 봉우리 위에 떨어졌다.
화상은 대광명을 놓으며 온 하늘에 보배처럼 빛났다.
왕과 여러 신하들이 이상하게 여겨 마침내 그 땅에 절을 짓고 백률사(白聿寺, 경주 북쪽에 있는 栢栗寺)라 하였다.
또 천경림을 하사하여 절을 세우고 공양하여 받들었다.
화상이 가사를 입고 불자를 짚고 손을 모아 오래 무릎 꿇고
7일 동안을 정근(精勤)하니 왕녀의 병이 차도가 있어 왕이 크게 기뻐했다.
마침내 불법을 숭신하여 7대 가람을 창건하여 용이 일어난 곳과 천경림과
하늘에서 내려온 곳 등에 흥륜사(興輪寺) 황룡사(黃龍寺) 분황사(芬皇寺) 영묘사(靈妙寺)
천왕사(天王寺) 담엄사(曇巖寺) 등의 절을 일시에 창건하고
이후에 천개 만개의 사찰이 여기저기 세워져 불교가 마침내 크게 행해졌다.
아도가 도리사에 돌아와 어느날 저녁 입적하여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절 뒤에 금수굴(金水窟)이 있어 사람이 갈 수 없다고 하는데,
화상은 이곳으로 들어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고 한다.
지금 굴 안은 불교의 재일(齋日)이 되면 등을 켠 것처럼 빛을 낸다고 한다.
그런데 아도가 심은 복숭아는 남쪽 북쪽 가지가 있어 해를 번갈아 살아나고 시들어서 천년을 지내 왔는데,
숭정(崇禎) 병자년(인조 14, 1636년, 병자호란이 난 해)에 쇠약해 시들해져
4년이 지난 기묘년(1639년)에 두 가지가 모두 말라버렸다. 찬한다.
해동에 불교를 처음 개창한 사람은 아도대사
해동에 처음 절을 창건한 것은 도리사
여기 금석의 전함이 있어 후대의 풀이를 불러오누나!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종각
낮은 돌담 위에 자라난 파란 이끼가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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