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3. 14:07ㆍ국내 명산과 사찰
대둔산 기행(3/3) 대둔산 자락에 숨어있는 고찰 불명산(佛明山) 화암사(花巖寺)
대둔산의 이번 산행은 우연찮게 두 개의 사찰을 탐방하게 되었다.
산행이 일찍 끝나 안심사를 들리게 되고,
안심사 안내판에서 대둔산 뒤 자락에 숨어 있는 절 호암사를 알게 되었다.
위치로 보면 호암사는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불명산(佛明山) 시루봉 남쪽에 속한다.
불명산은 대둔산 뒤편 자락에 위치하며 화암사는 불명산 계곡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 불명산 화암사로 불린다.
화암사는 초입부터 사찰입구까지는 약2km 정도의 임도와 계곡으로 이어져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는 147계단으로 된 철다리가 연이어 놓여있고 그 아래는 비룡폭포가 흘러내린다.
불명산 화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에 소속되어 있다.
화암사의 창건은 694년 진성여왕 때 일교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창건자 및 창건연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중창비에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 이 절에 머물면서 수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암사 창건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이곳에 있는 별장에 와 있을 때,
용추에서 오색찬란한 용이 놀고 있었고 그 옆의 큰 바위에 무궁초가 환하게 피어 있어
그 자리에 절을 짓고 화암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무궁초는 복수초를 의미한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화암사에서 수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신라 10현 중 한분으로 꼽히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 태어난 설총도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한다.
그 뒤 부분적인 중건 중수를 거쳐서 이어 오다가 1425년(세종 7)
성삼문의 조부인 관찰사 성달생(成達生)의 뜻을 따라 주지 해총(海聰)이 중창하였다.
이때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임진왜란 때 극락전 등 몇 개의 당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어
당시의 규모를 알 수 없다. 그후 1611년(광해군3) 성징(性澄)선사가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7)에도 중창하였다. 1666년(현종 7)에 영혜(靈惠)선사가 중창하였으며,
1711년(숙종 37)에 극락전 등을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663호로 지정된 극락전을 비롯하여 명부전(冥府殿)·산신각,
보물 제662호로 지정된 우화루(雨花樓)·적묵당(寂默堂)·철영재(啜英齋)·요사 등이 있다.
@비룡폭포(飛龍瀑布). 날이 가물어서 그런지 수량이 적어 장엄한 기분을 느낄 수 없다.
@자료를 찾아보니 고승들의 영정 7폭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들 영정은 허주(虛舟)·고경(古鏡)·낭월(朗月)·보경(寶鏡)·인파(仁坡)
낙암(樂巖)·월하(月河)·벽암(碧巖)의 것으로
전통적인 탱화기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오래된 작품으로 일컫는데 따로 보관 중인지 볼 수가 없었다.
이 밖에도 절 주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3기의 부도(浮屠)와
덕운당(德雲堂)의 부도가 있으며, 모두 조선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우화루(雨花樓)>
우화루는 「비가 꽃처럼 내리는 곳」이란 의미다. 화암사는 일주문이 없고 우화루가 일주문을 겸한다.
보물제 662호로 지정되어 있는 화암사의 우화루는 조선시대의 불전으로 극락전을 마주고 있다.
정유재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3년(1611)에 새로 세웠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1981년 보수할 때 나온 상량문에는, 성달생(成達生)이 중창한 이래
1711년(숙종 37)까지 여섯 차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건축양식에 있어서 극락전과 비슷한 점을 보이고 있어 조선시대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맞배지붕건물이다.
같은 경내에 있는 극락전과 내정을 사이에 두고 남북축선상에 놓여 있으며,
사찰 전방에 일반적으로 놓이는 누각건물 형식의 건물이다.
<적묵당(寂黙堂)>
적묵당은 우화루와 극락전 사이에 지어진 후원을 겸한 건물로 날개를 맞대고 서 있다.
화암사는 우화루와 극락전이 마주하고 있고, 적묵당과 불명당이 마주하고 있다.
<불명당(佛明堂)>은 현재 스님의 요사채로 보인다.
<극락전>
극락전은 1425년에 성달생의 시주로 건립했으며,
중국 남조시대(南朝時代)에 유행하던 하앙식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고건축물이다.
극락전은 천년 고찰(古刹)답게 단청을 거부한 고고한 옛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극락전 법당은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협시불로는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비록 단청은 퇴색되었지만 비천상과 위용을 뽐내는 쌍용의 조각은
여느 사찰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라 눈길을 끈다.
아미타삼존불 뒤에는 1858년(철종 9)에 그린 후불탱화가 있다,
또한 극락전에는 경판 200여 장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 중에는 1469년(예종 1)에 판각된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을 비롯하여
1618년(광해군 10)에 판각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현재 전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사찰에서 남아 있는 유일한 하앙식건축물이다.
하앙(下昻)은 기둥과 서까래 사이에 끼운 목재를 말하는 데 처마와 나란히 경사지게 놓여있다.
하앙은 지붕의 하중을 고르게 바쳐 주면서 처마를 앞으로 길게 설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앞쪽 하앙에는 용머리를 조각했고 뒤쪽은 단순하게 뾰족한 구조로 마무리 되어 있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 당시 불타 없어진 것을 1605년에 복원한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하앙식 구조는 중국의 요, 금시대의 건물에서 많이 보이고
일본에서는 아스카 나라 시대의 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고식(古式)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까지는 대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어느 정도 사용되어 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의 유물인 철로 만든 소탑의 지붕부분을 보면 하앙의 구조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유구의 예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적게 사용된 구조라고 생각한다.
화암사 극락전은 1605년에 중창하였다고 하니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중창한 건물이다.
당시 극도로 피폐한 상황에서도 일찍이 극락전이 중창된 것을 보면 화암사가 당시에는 매우 주목받던 절이었던 것 같다.
하여간 당시에 아직 하앙식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대목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임진왜란이 아니었으면 하앙식 건물의 예가 한 두채 정도는 더 남아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화암사 극락전 이후로는 하앙식 건물을 우리 나라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철영재(綴英齋)>
이 건물은 극락전과 불명당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무신 성달생(成達生, 1376~1444)의 사당이다.
성달생은 사육신 중 한 분인 성삼문의 조부이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지낸 성달생은 태종 17년(1417)부터 이듬해까지
전라도 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로 있었는데, 이 때 인연으로
세종 7년(1425) 화암사 중창을 도와 대가람을 일구었다 한다.
사중에서는 그 뒤 공덕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명부전이다. 문이 닫혀져 있어 법당 내부는 볼 수 없었다.
우연이 찾아가게 된 불명산 화엄사.
의상대사와 원호대사 그리고 설총이 수행했다는 대둔산 뒤편 기슭에 숨어 있는 절
1000년이 지금 그 고풍스러운 맛에 불향이 새록새록 스며드는 듯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경길을 서두르며 안도현의 시 한수로 마무리 한다.
@花巖寺, 내 사랑/안도현(1961년 경북예천)
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 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 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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