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水落山) 염불사(念佛寺)

2017. 4. 22. 18:44국내 명산과 사찰




수락산(水落山) 염불사(念佛寺)


수락산은 집 가까이 있는 산이라 언제 어느 때라도 마음 내키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산이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가볍게 집을 나섰다.

수락산을 오르는 코스는 여러 곳이 있지만 내가 자주 찾는 코스는 대략 3방향이다.

매화정으로 오르는 코스와 영원암 쪽, 그리고 깔닥고개로 바로 오르는 코스다.

염불사는 영원암이나 깔닥고개 쪽으로 오르는 길 목에 요양원과 인접해 있는 사찰이지만

오늘이야 처음으로 이곳에 사찰이 있는 줄 알았다.



수락산이라면 줄잡아도 백여회는 넘게 오르내렸는데

어찌 염불사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상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인연이 닿았는지 수락산 초입에서 염불사가 눈에 박혀

산행은 뒷전으로 미루고 사찰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기에 참배를 하러 들어가니 스님 두 분이 계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염불사의 주지 호명 스님과 총무로 계신 지선스님이었다.

호명스님은 현재 염불사의 주지와 홍매화로 유명한

태고종의 본산 순천 선암사의 주지를 겸하고 계신다고 한다.

둘러보지 못한 남도의 몇 사찰을 생각했던 내게

이것은 기연(奇緣)일까, 우연(偶然)일까. 염불사에서의 이 조우(遭遇)....


 

염불사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해 사찰에 배치된 안내책자로 대신한다.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염불사(念佛寺)

조선 초기 무학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 사명(寺名)은 백운사(白雲寺)였으나

6.25사변 이후 중창되면서 영몽사(靈夢寺), 쌍몽사(雙夢寺),

그리고 염불사(念佛寺)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염불사의 주요 당우(堂宇)와 문화재(文化財)를 살펴보면

염불사의 당우들은 1903년 상궁 김씨가 조성한 전면 3칸 측면 2칸의 지장전과

1965년 하처사 부인의 병을 낫게 한 산신을 위해 지은 전면 2칸 측면 1칸의 산신각이 있다.

그리고 예전 대웅전 터 옆에 2005년 건립한 큰 법당이 있다.


(대웅전) 

염불사의 문화재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50호 지정된 강희 34(1695)에 조성된 관세음보살상과

대한 광무 7(1903) 상궁 김씨가 지장전을 건립하고 조성하면서

돌아가신 부모와 고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발원문을 담은 복장 주머니가 전해지고 있다.

지장탱화가 소실되자 이를 대신하여 감로암에서 조성된 지장탱화를 이운하여 봉안하였다.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51호로 제정된 지장탱화는

1869(고종6)에 금암당 천여와 제자인 취선(就善)과 묘영(妙英)이 함께 그린 불화(佛畫)이다.



대웅전 법당이다. 염불사는 아직 단청불사를 시작하지 않은 모양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본존불을 모신 곳이다. 뒤편에는 삼존불의 탱화가 걸려있다. 


단청 불사가 끝나면 멋진 닷집이 위용을 뽐낼 것같다.


신중탱


칠성탱이다 치성광여래가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이 큰법당이다. 대개 한글로 큰법당이라고 할 경우 대웅전을 가리키는 데

염불사의 자랑인 목조관음불이 여기에 모셔져 있여 염불사의 큰 법당은 관음전을 일컫는 것이 된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50호 염불사의 관세음보살상은

 조선후기 1695년 전남 장흥 봉일암(鳳日庵)과 수도암(修道庵)에서 조성된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상이다.

이 보살상의 복장(腹藏)에서는 조성 원문을 비롯하여 후령봉, 다라니 등 3종의 묘법연화경이 발견되었다.

조성기(造成記)에 따르면 이 상을 조각한 조각승은 덕우(德牛)비구와 덕희(德熙)비구로

이들은 1700년대에 전남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약하였던 색난(色難)의 제자 혹은 후배로 알려져 있다.


 

보살상의 얼굴은 방형으로 양빰에 살이 많고 인증이 뚜렷하다.

입가에 미소를 띤 자비로운 표정이다. 체구는 단정하고 양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설법인(說法印)을 짓고 있다.

오른쪽 어깨 위에 걸쳐진 대의자락의 끝단은 둥글게 곡선으로 표현되고

가슴에 올려 입은 내의의 웃단은 둥근 꽃잎처럼 조각되었으며

다리에서 바닥으로 흘러내린 옷단은 둥글게 처리되었다.

한편 대좌 위에는 옷자락이 앞면 중심과 좌우로 흘러내려 연화대좌의 일부분을 덮고 있는데

이 옷자락은 대좌에 붙어 있으며 불상과는 따로 제작된 것이다.




목조관음상 옆 유리관 안에 모셔진 천수관음










큰법당의 신중탱


큰법당에 모셔진 칠성탱


지장전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지장보살을 시립하고 있고 좌우에는 시왕이 모셔져 있다.

그 아래에는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이 함께 시립하고 있다.


두명의 금강역사를 구별하는 방법은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나라연금강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밀적금강이다.




지장전에 바라 본 대웅전(좌측)과 큰 법당(우측)


대웅전 옆에 약사전이 있다. 염불사 약사전은 전각이 없고 석불로 대체하고 있다.


민간신앙에 따르면 약사여래((藥師如來, bhaiṣajyaguru))는 어떤 병은

그의 상을 만지거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기만 해도 효과적으로 치료된다고 한다.

경전에서 약사여래는 동방정유리세계의 교주로 병든 자를 구원하는 의왕으로 불리며

약사유리광여래·의왕여래라고도 한다. 아미타불의 48 서원과 함께 약사여래의 12대 서원이 유명하다.

약사여래는 구원불의 하나인 아축불(阿閦佛 Akṣobhya)과 동일시되기도 하며

일본의 몇몇 종파에서는 그를 또 다른 구원불인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약사여래 신앙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찍이 통일신라 초기부터

약사여래에 대한 신앙이 성행해 탑의 기단이나 1층 탑신에 약사여래의 권속을 조각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거듭되는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약사여래를 본존으로 하는 기원법회가 자주 열렸다.

오늘날에도 약사여래는 한국에서 석가모니불·아미타불·미륵불과 함께 가장 널리 신봉되는 부처의 하나이다.


 

약사여래 관련 경전은 4종이 전하는데,

650년 당나라 현장이 한역한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藥師瑠璃光如來本願功德經

(약칭 약사경 또는 약사본원경)이 대표적이며 가장 널리 유포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찰에 약사전이 들어서 있는 것은 이러한 약사여래의 신통력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사찰에는 이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모신 약사전(藥師殿)을 부속시키고 있어

약사신앙의 통속성을 대변하고 있는데 염불사는 따로 약사전을 두지 않고 이 석불로 대신하고 있다.




신신각/독성각 가는 길


염불사는 산신각과 독성각을 한 전각에 모셔져 있다.


산신각에는 두분의 산신이 모셔져 있다.


독성, 나반존자로 일컬어지는 분이다.


산신










바람 불어 꽃이 피고

바람 불어 꽃이 지는구나


꽃은 피고지지만

계절이 바뀌어도

세월이 흘러가도

변함없는 佛香氣

 

수락산 염불사의 蓮花.

세세토록 영원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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