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역사 환향녀(還鄕女) 이야기

2016. 12. 10. 15:34삶 속의 이야기들

 흘러간 역사  환향녀(還鄕女) 이야기


환절기 때만 되면 유행하는 병이 감기다.

감기라는 병은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근절되지 않는 불치(不治)의 병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머리를 짜내어 별의 별 퇴치방법을 마련 하지만 감기라는 놈도 영악하여 잘 대처하기 때문이다.


                                                      

(서안화청지에서) 

오늘날 사회문제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성범죄(性犯罪)도 감기와 같은 질병이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동서고금을 통해 금과옥조(金科玉條)같은 처방이 많지만

지금까지도 근절되지 않고 하루가 멀다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범죄가 바로 성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범죄를 다룸에 있어서 단순하게 생각하면 가해자인 범법자를 처벌하면 그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피해자인 당사자가 정신적으로 받는 수치감과 고통 더 나아가 가족들의 눈총

그리고 사회적으로 암암리 받는 냉소적인 비난을

어찌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강간과 같은 성범죄의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으로 인한 겁탈과 강간의 경우는 그 참혹상은 더 심각하다.

흘러간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가까이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사건도 그렇고

멀리는 역사의 망각 속에 묻혀 버린 환향녀(還鄕女)와 같은 사건도 그렇다.



(인천차이나타운에서)


우리 역사에서 폭군으로 알려진 광해군,

그는 군왕으로 몹쓸 짓을 많이 저질렀지만 외교문야에서는 제법 수완을 발휘한 왕이다.

당시 명()나라와 새로 발흥한 후금(後金)이 대치하는 민감한 정치현실 속에서

광해는 실리(實利)외교로 국난을 피했지만, 인조반정으로 광해가 물러나고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그들이 옹립한 인조를 내새워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고수했다.

그 결과 화가 난 후금(後金: 후일 청으로 개칭)은 두 차례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것이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과 1636년 발발한 병자호란이다.

사가(史家)들은 그때 민초들이 입은 피해는 7년간 지속된 임진왜란보다도

단지 40일 만에 끝난 병자호란 때가 더 참혹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알랑한 명분만을 추구하는 사대부들과 그들에게 휘둘린 왕의 어리석은 정책으로 빚어진 치욕적인 결과는

나라도 굴욕을 당했지만 힘없는 민초들이 인질로 끌려가 참혹한 시련을 겪었다.


(진시황릉지하궁전에서)


최명길(崔鳴吉, 1586~1647)지천집에 의하면 당시 끌려간 사람들은 50만 명이 넘었다 기록하고 있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당시 의정부 우의정 좌의정을 두루 거친 사람이다.

그는 환향녀에 대해 자의(自意)에 의하여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니며

조정과 정부 대신들의 잘못으로 청나라에 끌려가서 능욕을 당한 것이니

잘못은 조정의 대신들에게 있는 것이라며 용서하고 받아드려야 한다고 입바른 소리했다가

조정대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국속(國俗)을 해하는 자,

미풍양속을 해치려는 자로 몰려서 몰매를 맞았던 사람이다.

허기사 이런 일에는 예나 지금이나 지 혼자 국민을 위하고 나라 지키는 애국자인냥

별의별 명분을 앞세우는 족속들이 더 기승을 부리기 마련이다.




또 남한산성의 저항 기록인산성일기에는 60만 명이라고 했고,

훗날 정약용이 지은 비어고에서도 60만 명이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1000만 명 정도라고 하니 가족이나 친척 중 끌려가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실록에서는온 나라 백성 중 태반이 연루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잡혀간 인질이나 포로 중에는 여자가 2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하니 지금의 시민혁명을 방불케 하는 숫자다.

끌려간 남자들은 대부분 노예로, 여자는 첩 또는 창부로 노예시장으로 팔려 나갔고

그들 중 일부는 인질로 잡혀 있다가 훗날 속제금을 물고 풀려나기도 했다.


(남한산성수어장대)


인질에서 잡혔다 탈출하거나, 배상금을 물고 조선으로 돌아 온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고향으로 돌아 온 여자라는 의미다.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불행히도 그 환향녀들은 이미 청군에 의해 겁탈당하고, 임신까지 한 여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송성가무쇼에서)

 

그러니 열녀문을 세우고 여인들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든 조선의 알량한 사대부라는 사람들이

미풍양속만 앞세워 환향녀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퍼붓었다.

민초들은 그래도 자비심을 베풀어 이해하려고 해도 주변의 눈총이 두려워

감히 환향녀를 지어미로 받아 드리기를 꺼렸다.

설령 운이 좋아 집으로 돌아간 환향녀라 할지라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고향으로 돌아 왔지만 환향녀라는 오명의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으니

그 심적 고통이 오죽했으랴.



(송성가무쇼에서)


서울 북한산 비봉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슬픈 전설을 지닌 <사모바위>를 만날 수 있다.

사모(紗帽)는 고려시대나 조선 시대 벼슬아치가 관복을 입을 때 쓰는 모자로,

바위의 모양이 그것과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북한산 사모바위)

 

병자호란 때였다. 한 청년이 전쟁터에서 겨우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은 청나라로 끌려가고 없었다.

학수고대(鶴首苦待)하며 기다렸지만 전쟁이 끝났어도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후 많은 사람이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 가까이 있는 북한산 홍제동에 있는 샛강으로 찾으러 나갔다.

청국으로부터 돌아온 여자들은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회절강에서 몸을 깨끗이 씻었야 한다는 교지가 내렸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홍제동 샛강 일대를 샅샅이 뒤졌으나 여인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잊지 못한 청년은 북한산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끝내 망부석이 되었는데 그 바위가 지금의 이 사모바위라 한다.


(가평수목원야경)


아수라같은 청국놈들에게 끌려간 조선의 여인들. 시세말로 망가질대로 망가진 걸래같은 몸으로

천신만고 끝에 생명만 건져 인질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반겨줄 것으로 알았던 그들의 지아비들은 아예 <화양년>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그들이 낳은 자식은 호로(胡虜)자식이라고 천대했다.

그러한 냉대를 견딜 수 없었던 환향녀들은 목을 매거나 절벽에 투신하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화류계(?)로 데뷰하거나,

심지어 그 지옥 같은 청나라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속출했다.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인조는 방편으로 도성과 경기도 일원은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충청도는 금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을 각각 회절강으로 지정하고.

환향녀들은 회절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명을 내렸다.

회절강이란 더럽혀진 몸을 강물에 씻으면 정조를 회복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례가 있다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라는 교지까지 내렸다.


(계림 이강)

 

어찌 강물에 몸을 씻는다고 그 오명이 벗겨지며,

교지를 내린다고 해결될 문제인가마는 그래도 인조는 명분상 쥐꼬리만한 배려는 한 모양이다.

기록에는 환향녀가 너무 많아 청천강, 낙동강, 섬진강을 추가로 회절강으로 지정했다고 하니

요즘처럼 환경오염조사반이 없었길 망정이지 조선의 강들은 환경오염(?)에 엄층 몸살을 알았을 것이다.


(범륜사에서)

 

요즘 같으면 촛불시위가 아니라 횃불시위라도 벌려 임금을 탄핵이라도 했을 텐데

임금이 하늘인 절대군주체제 하에서 힘없는 환향녀들이 누구에게 하소연 할 것인가.

오로지 지아비들이 부처님같은 마음을 가지도록 기도하는 길 밖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옛적 몽고의 야사에 이런 이야기 있다.

예수게이라는 부족장이 타타르족 적장을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아들을 낳으니 그가 테무진이다.

 세월이 흘러 예수게이가 세운 부족이 몰락하고 예수게이마저 정적들에게 암살당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했던가. 예수게이에게 멸망당한 타타르 족의 후예인 메르키트족이

 힘을 키워 테무진의 마을을 습격하여 테무진의 아내 보르테를 겁탈하고 임신까지 시켰다.

메르키트족은 그의 아버지의 연인이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에게 빼아긴 복수를

그의 아들 테무진에 꼭같이 한 것이다.

분노한 테무진은 복수에 나서고 겁탈당하여 임신한 보르테를 마을에서 유배시켜 버렸지만

<초원은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드린다.

그럼으로 너는 초원과 같은 삶을 살아야 되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충고를 듣고

테무진은 보르테를 용서하고 지어미로 받아드린다.

그가 바로 삼대륙을 정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의 징기스칸이다.


(징기스칸묘.심천 중화민속박물관에서)

 

비록 시대와 상황이 다르지만 그때의 <환향녀>의 지아비들이

모두 징기스찬처럼 자비롭게 환향녀를 받아드릴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이란 열면 우주를 담을 수 있지만 닫으면 바늘 하나 꽂을 곳이 없다고 하는데

조선의 지아비들이 모두 징기스칸과 같이 될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징기스칸 동상)


오뉴월에도 여자가 한을 품으면 서리가 내린다고 하는데

환향녀의 그 피끓는 울분과 분노를 무엇으로 달래수 있겠으며,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버린 민초들의 가슴에 어떻게 자비와 사랑의 온기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창경궁춘당지에서)

 

사랑은 머리는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한다고 한다.

그러나 미움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려면 머리도 필요하고 가슴도 필요하다.

머리로 이해해야 응어리가 풀리고 응어리가 풀려야 가슴으로 포용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감성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과거의 찌거기를 담고서 어찌 새롭게 내일의 사랑을 열 수 있으랴,

주먹 진 손을 펴지 않으면 새 것을 잡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바위처럼 굳어져 응어리져 있는 증오와 미움을 삭히는 용서와 화해란 말은

남의 일처럼 말하기는 쉬워도 극복하기 제일 어려운 인간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는 최상의 길은 종교적인 길이다.

그래서 난세(亂世)마다 미륵과 아미타를 더 찾고, 메시아를 찾지 않은가.

종교적인 마음만이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찬 마음을 위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마음은 빈 마음을 의미한다.

<>가 먼저 빈 마음이 되어야 모든 것을 화해하고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죄를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숫파아니타의 금언(金言)을 음미해 본다.


                                    

(남미륵사 아미타불)

 

마음속으로 노여움을 모르고

세상의 흥망성쇠를 초월한 수행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다 함께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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