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객(賀客)과 관람객(觀覽客)

2016. 11. 17. 00:26삶 속의 이야기들

하객(賀客)과 관람객(觀覽客)


한동안 만나지 못한 옛 도반 한분이 여식이 결혼을 한다고 전화가 왔다.

조용히 지내던 사람이 연락이 왔다면 으레 부모님의 상이 아니면 자녀결혼식이다.

허긴 우리네 나이쯤에 그런 일이 아니라면 애써 연락할 일이 있겠는가.

인생 벌써 여기까지 왔는가 생각하면 서글픈 생각이 들지만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송성가무쇼)


일요일 아침 일찍 움직인다고 움직였지만 식장에 도착하고 보니 식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식장을 둘러보니 흔히 보와 왔던 그런 결혼식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으레 있어야 할 주례가 보이지 않았다. 사회자가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었다.

신랑신부를 위한 축가를 부르는 것을 보니 끝난 것은 분명 아닌데.

연이어 이번에는 신랑이 신부를 위해 직접 마이크를 잡고 연가를 또 부른다.

소위 시세말로 신세대 결혼식으로 치루고 있나 보다.

짓궂은 사회자의 요청에 신랑은 겸연쩍어 하면서 춤까지 춘다.

아마도 신랑이 친구들 중에서 춤을 꾀나 잘 추었나보다.

지루하고 형식적인 미사여구로 결혼식을 도배하는 주례사가 없어서 그런지

모인 하객들이 이 광경에 모두 박수를 치고 웃었다. 하객이 관람객이 되었다.


(곤명 민속촌에서)

 

하객과 관람객은 무엇이 다른가.

하객은 축하해 주려고 오는 사람이다. 그러나 관람객은 즐기려고 온 사람이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이나 무용, 예술작품을 보러 가는 사람을 하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관람객은 즐기려 가는 것이지 축하하러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신세대 결혼식을 치루는 것은 개인적인 그 나름대로의 이유야 있겠지만

주례를 위주로 진행되었던 기존의 결혼식이란 형식을 깨고 엄숙하고 진중한 식장을

주객(主客)이 함께 웃고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서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계림인상유삼저쇼)

 

인생을 흔히 나그네로 비유한다. 나그네는 한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떠나가는 사람이다.

한 곳에만 머문다면 정이 들고, 정이 들면 애착이라는 것이 생긴다.

애착은 결국 병()이 된다. 병은 바로 고통이 아닌가.

그래서 삶은 나그네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집착이 아니라 유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황산가무쇼) 


그런 의미에서 우리네 삶을 이야기 한다면 삶의 하객이 아니라

삶의 관람객이 되어 삶에 애착을 버리고 그저 즐기다가 가라는 의미가 된다.

마치 나비 쫓든 어린아이 강아지를 보고는 언제 나비를 쫓아갔는지 잊어버리고 강아지를 쫓아가듯

삶에 머물지 말고 그 순간순간의 삶을 집착함이 없이 그저 즐기다가 가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다.

금강경의 말을 빌리자면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요,

선승(禪僧)의 말을 빌리자면 어사무심(於事無心)어심무사(於心無事)이다.

일을 대함에는 마음을 비우고 마음에는 일에 대한 집착을 두지 말라는 의미다.

삶을 그래서 옛 선현들은 유희(遊戲)하라고 했나보다.



(곤명화훼시장에서) 

인생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을 떠나는 삶이라면

삶은 축하할 일이 아니고 즐기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삶을 곰곰이 따져보면 사실 집착할 것이 없다. 구름이 일어났다 사라지듯

부질없는 마음의 탐욕이요, 애착이요, 집착일 분이다.

그렇다면 삶은 하객이 아니라 관람객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신세대결혼식을 보면서 나는 지금 내 인생의 하객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관람객으로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