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2/2) 서장대와 국청사

2016. 7. 13. 18:03국내 명산과 사찰

남한산성(2/2) 서장대와 국청사

@남한산성은 서울근교에서는 이름난 명소로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하고 있지만

사실 언제 다녀왔는지 내 기억은 까마득하다. 아마도 대학졸업 후 였을테니 70년 대 초반 쭘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때만 하더라도 남한산성은 먹거리도 볼거리도 시원찮은 허름한 산성이라

별 흥미를 가지지 못했기에 지금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지금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어 있었다.

허기사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것도 몇 번의 강산이 바뀌었을 시간이니 이곳인들 변하지 않았겠는가.

마침 초파일날이라 멀리가지는 못하고 번잡한 것도 싫어서 한가하면서 교통이 편한

가까운 사찰을 찾다가 우연히 남한산성의 국청사가 눈에 띄어 생각 없이 카메라만 달랑 메고 집을 나섰다.

가벼운 산행이라도 예상했다면 적어도 물통하나, 땀을 닦을 수건 한 장 정도라도 어련히 챙겨야 했겠지만

마치 동네 수퍼마켓 들리는 기분으로 나섰기에 무더운 날씨에 조금 곤욕을 치렀다.

서울근교를 나들이 할 경우는 집을 나와 버스정류장이나 전철역에서 시간대에 맞추어

그날 나들이 갈 코스를 정하는 무식한 습벽 때문에 오늘도 만행(漫行) 아닌 만행을 한 셈이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산성으로

둘레는 약 8면적은 528,460에 이른다.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화문의 누각)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자리하였다. 원성에는 동···북 모두 4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북문은 전승문(全勝門), 서문은 우익문(右翼門), 남문은 지화문(至和門)이라고 불렸다.

암문도 원성 11, 봉암성 4, 한봉성 1곳 등 16곳이 설치되어, 우리나라 산성 중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암문 가운데 6곳은 평거식이고, 10곳은 홍예식이다.

여장은 처음에 벽돌로 쌓았으나 영조 20(1744)에 벽돌을 제거하고서 기와로 덮었으며,

정조 3(1779)에 다시 원성을 고쳐 쌓을 때 기와로 덮었던 것을 전돌로 바꾸었다.

현재 남아 있는 여장은 대부분 전돌로 쌓은 것이며,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갈라놓은 타구(垛口)에는 수키와를 한 장씩 올려놓았다.

성벽에는 원성 4, 봉암성과 한봉성 사이 1곳 등 5곳의 치()도 설치되어 있다.

  


  

한편 7곳의 포루가 있는데, 1남옹성 8, 2남옹성 9, 3남옹성 5,

장경사 부근 원성 2, 장경사 신지옹성 2, 연주봉 옹성과 봉암성 2곳 등이다.

장대는 원성 성벽의 동···북에 하나씩 설치되었고, 봉암성에도 외동장대가 있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남한산성 안에 125곳의 초소인 군포가 있었으며,

각 군포는 23칸 정도의 규모였다고 하였는데,

실제 성 안에서 앞면 3, 옆면 1칸의 군포 건물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소금을 묻어두었던 매염처(埋鹽處), 숯을 묻어두었던 매탄처(埋炭處)도 있었다.



  

산성 안에는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옥정사, 남단사, 한흥사, 천주사, 동림사 국청사 등 여러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은 산성 축성에 동원된 8도 승군의 주석처이자 승군이 군기와 화약을 비축하고서 산성을 수비하는 곳이었다.

  



  

인조 16(1638)에는 온조왕묘를 건립하여 배향하였으며, 남단사 오른쪽에는 사직단,

북문 안의 동쪽 언덕에는 성황당, 서장대에는 기우제단을 두어 정기적으로 제의를 행하였다.

동문 안에는 숙종 14(1688)에 유수 이세백이 병자호란 때 청의 침입에 끝까지 저항할 것을 주장한

척화파의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위패와 좌의정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를 배향한 한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서장대 입구의 안내문을 읽고 있는 사람들. 사진의 우측길이 서장대 입구다.

국청사를 먼저 들리기로 했다. 여기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국청사가 있다.




국청사 일주문





국청사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에 있는 절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담당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비밀리에 군기와 화약, 군량미 등을 비축하였던 사찰이다.

  



  

1625(인조 3)에 각성(覺性)을 팔도도총섭총절제중군주장(八道都摠攝總節制中軍主將)에 임명하고,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의 축조를 담당하게 할 때

7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국청사이다.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담당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비밀리에 군기(軍器)와 화약군량미 등을 비축하였던 사찰이다.

그 뒤 한말에 의병의 군기창고로 사용되다가 비밀이 누설되자

일본군이 불태워서 절터만 남아있던 것을 1968년에 보운(普運)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삼존불  

  

성삼문(成三問)의 친필이라고 전하는 병풍 1점과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책자 3권이 전해오고 있다.

절 근처에는 국청사정(國淸寺井)이라고 하는 조그만 우물이 있는데,

금닭이 나와 홰를 치며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대웅전의 칠성탱


대웅전의 신중탱



삼성각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


삼성각에 바라본 풍경


천불전, 안은 <ㄴ>자 형태로 불상이 배열되어 있다.


천불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협시불로는 지장보살과 관음을 모셨다.





국청사를 나와 다시 회귀하여 서장대로 간다.




@수어장대(守禦將臺)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시설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972.05.04. 지정) 로 지정되어 있다.

산성 서편에 위치한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4장대 중의 하나로

인조 24(16241626)년 사이에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이다.



이 건물은 조선 인조 2(1624)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북의 4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대로 산성 내의 최고봉인 일장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

성 내부와 인근의 양주·양평·용인·고양·서울·인천까지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외부 정면에 守禦將臺(수어장대)’라고 쓴 현판이, 안쪽에는 無忘樓(무망루)’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수어장대란 요새 방어를 맡은 수어사가 지휘, 명령하는 곳을 의미하며,

건립 당시는 단층누각으로 '서장대(西將臺)'라 하였고,

영조27(1751)년 유수 이기진이 2층 누각을 증축하여 내편은 무망루, 외편은 수어장대라 명명하였다.

이 수어장대는 인조14(1636)년 병자호란때 인조가 친히 수성군을 지휘하면서

청태종의 12만 대군과 대치하며 45일간 항전으로 버티던 곳이며,

항전 45일만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전면에서 볼 때 크고 작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기둥을 세우고 내부에는 널마루를 설치하여 단조로운 난간을 둘렀다.

내부 천정에는 장반자를 귀틀 위에 깔아 단청으로 시문하였고 툇간 위의 반자는 연등천정이다.

내진과 외진 사이 바닥에는 전을 깔고 한쪽에 계단을 설치하여 2층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2층은 1층과 달리 변주에 판문을 달아 열고 닫을 수 있게 되어 있고,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수어장대의 목부에는 모로단청을 시문하여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청량당의 문은 잠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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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은 만해기념관 쪽으로 내려왔다.






만해기념관 쪽으로 내려오니 행궁 뒷길과 연결된다.

노지에 전시된 석조물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