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의 얼이 깃든 화성 용주사(2/2)

2016. 7. 9. 21:42국내 명산과 사찰

정조대왕의 얼이 깃든 화성 용주사(2/2)



부모은중경 탑

보물제 920호로 지정된 1454(단종 2) 평양의 대성산 광법사(廣法寺)에서

목판으로 복각 간행한 불경을 으뜸으로 여기는 부모은중경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라고도 한다.

이 경의 내용은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다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구체적인 예로서,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는 3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고 84말의 혈유(血乳)를 먹인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업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고서 수미산(須彌山)을 백천번 돌더라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고 설하였다.

용주사에 이 경을 새긴 탑비를 세운 것은 정조의 효사상을 기리기 위함이라고 사료된다.

탑 뒤에는 호성전이 있고 세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호성전>

정조대왕께서는 일반적인 제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던 듯 현륭원 옆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대웅보전 옆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호성전을 건립하였다.

호성전은 팔작지붕의 궁궐형식으로 지어진 전각으로서 사도제자의 위패를 모셔두고

매일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 이후 등 여섯 번의 재를 올렸다고 한다.

 

이후 호성전에는 정조대왕, 경의황후(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정조의 왕비)를 차례로 모시게 되는데

이때마다 49(영산재)를 베풀 것은 물론 속절제와 기신제를 올려 극락왕생을 발원하였다.

호성전은 용주사 창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후 일반 맞배지붕으로 중건되었다.



용주사의 조실로 모셔져있는 전강영신대종사 사리탑비다

<전강대종사>

전강(田岡) 영신 스님은 20대 초반에 개안(開眼)을 이루고 30대에 조실의 지위에 오른

 현대 한국 선종의 대표적인 선지식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특히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스님 등 당대 최고의 선지식을 찾아 직접 법거량을 통해 인가를 받는가 하면

육조 혜능과 마조, 임제의 사상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경허와 만공 스님 이후 선종의 맥을 잇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전강 스님은 1898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나이 16세 되던 해인 1913

유기 행상을 하다 만난 한 스님과의 인연에 의해 해인사에서 출가했다고 전한다.

 

출가 이후 피나는 수행과 정진을 계속하던 스님은 도반이었던 사미승이 갑작스럽게 죽자

 삶의 허망함을 깨닫고 이때부터 만공 스님으로부터 자 화두를 들고 구도의 길에 오르게 된다.

이후 직지사에서 6년 간의 고행과 당대 선지식이었던 제산·용성·만공 스님 밑에서 정진을 계속한 끝에

192123살 되던 해 마침내 깨달음에 경지를 얻게 된다.

 

이십대에 깨달음을 얻은 스님은 이후 운수행각을 하며

당대의 선지식인 혜봉·혜월·용성·한암·금봉·만공 스님 등을 찾아 수많은 선문답을 통해 그의 철저한 견성을 인가 받았다.

특히 스님은 1923년 그의 나이 25세 되던 해 덕숭산 금선대에서 만공 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고

선종 77대 법맥을 잇는 대선사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근대 선종의 중흥조였던 경허 스님의 오도송에 대해서도 허물을 지적할 정도로 선지가 밝았던 스님은

지혜 제일이라는 명성을 날릴 만큼 대중들에게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날카로운 선지의 법문으로

제방의 눈푸른 납자들에게 지혜의 등불을 밝혀줬다.

 

33세에 통도사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 수도암 선원 등 전국의 선원에서 조실을 역임하며

후진을 양성하던 스님은 1962년 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화선원)을 건립하고 주석하면서

송담이라는 걸출한 제자를 남기기도 했다.

현대 한국 선종의 혜맥을 이은 전강 스님은

1975113일 제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세수 77, 법납 62세로 좌탈입망했다.

 ~출처: 법보신문~



시방칠등각

대웅보전과 천불전 사이에 위치하는 전각으로 칠성, 산신, 독성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다.

이 세 신앙은 불교를 신앙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불 수 없는 독특한 한국적 불교신앙으로

우리는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이전의 재래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조화롭게 수용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 재래신앙이 불교와 용합되면서 북두칠성을 신앙하는 칠성신앙과 스승 없이 혼자서 깨우침을 얻는 독성신앙,

그리고 산신신앙이 한국불교의 한 특성을 이루게 됐던 것이다.

 

칠성신과 독성, 산신을 모시는 전각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존재한다.

각각의 신을 따로 모셔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이 별도로 존재하기도 하고 삼성각(三聖閣)이라고 하여

이들 세 신을 하나의 전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용주사의 시방칠등각은 세 신을 함께 모신 전각이다.

그런데 이 전각 이름은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매우 독특하다.

그 뜻을 살펴보면 먼저 시방(十方)이란 동···, 동북·동남·서남·서북, 그리고 상·하의 열 곳으로서

무수한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한다. 칠등(七燈)이란 칠성, 즉 북두칠성을 가리키므로

시방칠등각은 결국 칠성각과 동일한 뜻이다.

이것은 절의 창건 당시 지금과 같은 시방칠등각이 아니라 칠성각이라는 전각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칠성각의 도편수는 경기도 안성 죽산 칠장사(七長寺)의 설잠(雪岑)스님이었고,

전 각내에는 칠성여래사방칠성(七星如來四方七星幀)을 경옥(敬玉연홍(演弘설순(雪順)스님 등이 제작 봉안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이덕무가 지은 주련이 걸려있었는데 글귀는 아래와 같다.

 

<이만리 아유타국 돌우물에는 공덕수가 널리 젖어들고, 팔십경 기타원 좋은 밭에는 길상화가 가득 피었네.>

 

건물은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면적 18평으로 아담한 규모이고 문은 띠살문입니다.

건물외부 측면에는 산신과 독성을 벽화로 묘사하였으며

내부에는 정면에 칠성탱화, 그 왼쪽에 산신탱화, 오른쪽에 독성탱화가 있고

최근작인 소규모의 석조 석가상이 안치되어있다.




지장전

용주사 지장전은 정면 3, 측면 2칸의 건물에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식 건물이다.

건물의 측면에는 주심포 양식 특유의 도리가 노출되는 가구(架構) 형식을 가지고 있다.

건물 정면의 좌우에는 빗살무늬의 창이 마련되어 있고 중앙 한 칸에만 출입문이 있다.

이 출입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자리한 지장보살과 좌우에 협시한 도명존자·무독귀왕의 지장삼존상을 마주하게 된다.

중앙의 지장보살은 민머리(僧形)에 지물(持物)은 육환장을 들고 있으며

몸체는 어깨가 좁고 그 경사가 급하여 움츠린 듯 한 인상을 준다.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의 좌우에는 명부시왕 10구와 판관 4, 사자(使者) 2, 그리고 인왕상 2구가 있는데

이들은 1894년 만의사(萬儀寺)의 지장전이 퇴락하여 이곳 용주사에 모셔온 것이라고 한다.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이다. 내부가 수리중이어서 조금 어수선했다.

그러나  후불탱화와 닫집이 화려하여 여러 각도에 담아 보았다.























만수리실

만수리실은 원래 선당(仙堂 또는 禪堂)이라고 하여 강원도 간성 건봉사(乾鳳寺) 운붕(雲朋)스님이 도편수를 맡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이덕무가 쓴 만수리실의 주련이 당시 있었으니 그 글귀에

 

도솔궁속에서 큰 게송을 말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반야대위에서 참된 법을 연습하여 무량겁을 초탈하네

兜率宮中稟大偈 普濟衆生 般若臺上演眞詮

 

라고 하였다. 총면적 86평으로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객실로 사용한다.

천보루의 2층에는 앞뒤로 난간을 둘렀고 익공계 이익공이 섬세하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인데 양끝의 처마가 날렵하게 보인다.














박물관에 전시된 몇점을 담아 보았다.


어제화성용주사봉기복게


금동향로


청동향로


아미타탱


목조불패


동자상


동자상


ㅂ박물관 정원에 방치되어 있는 옛 석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