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회의 효시 고성 건봉사(2/2)

2016. 2. 10. 20:06국내 명산과 사찰




만일회의 효시 고성 건봉사(2/2)

 

@한국의 3대 사찰를 말할 때는 경남 양산 영축산 통도사(佛寶 사찰),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法寶 사찰), 전남 순천 조계산 송광사(僧寶 사찰)를 말하는데

이는 불법승(佛法僧)를 상징하는 3()사찰이 됩니다.

이러한 분류는 다른 종파가 아닌 조계종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현재 조계종의 본사격인 교구본사는 25개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본사는 그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을 의미하며 지역 산하에 말사(사찰, )을 관장합니다.

 

* 그러나 4대사찰이라는 표현은 잘 쓰지 않지만 4대 사찰이라고 굳이 말한다면

위의 3보 사찰에다 선찰대본사로 불리는 부산 금정 금정산 법어사를 넣어 4대 사찰이라고 합니다.

본사의 기준은 시대적으로 다릅니다.

참고로 일제시대 1911년 조선사찰령에 따라 전국의 사찰을 31본사로 정했는데

그 기준으로 한국 4대사찰이라 할 경우 금정산 범어사 대신

강원도 고성 금강산 건봉사를 넣어 4대 사찰이라고 했습니다.

건봉사 홈피와 안내 표시판에 전국 4대 사찰 중 하나로 표시한 것은 이에 따른 것입니다.





범종각 앞에 세워진 이석주의한쪽 면에 암각된 글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이고

또 다른 한쪽 면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암각되어 있고,

또 다른 한 면에는 佛紀二九五五年戊辰夏(불기이구오오무진하)란 기록이 새겨져 있다.

불기2955년 무진은 구()불기(佛紀)이며 현재 불기(佛紀)로는 2472년에 해당한다.

단기(檀紀)로 환산하면 4261년이 되고 서기로는 1928년이 된다.

<하>는 여름을 의미한다. 그럼으로 이 석주는 1928년 여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운판과 목어



6.25동란으로 불타버린 옛 극락보전의 터.



전면의 전각들은 탬플스테이로 이용되는 요사채다, 앞에는 2개의 석주가 세워져 있고, 연못이 있다.

용사활지는 용과 뱀이 함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용은 부처나 깨달음을 얻은 이를 상징하고 뱀은 중생이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를 상징한다.

방생경지는 방새하는 곳이라는 의미인데 그래서 좌우에 연못을 파 놓은 모양이다.



철이 지났는데도 감나무 한 그루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민통선 지역이라 역시 손을 타지 않은 모양이다.





템플스테이하는 요사체다. 이 요사체 뒤에 적멸보궁이 있다. 이 요사채 왼 쪽에 산신각이 있다.



<산신각>이다. 산신각은 정면, 측면 각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여기에 두 줄의 주련이 걸려있다.


靈山昔日如來囑(영산석일여래촉)

威鎭江山度衆生(위진강산도중생)


그 옛날 영산에서 부처님의 부촉 받아

강산에 위엄 떨쳐 중생을 제도하네.









<적멸보궁 주련>

萬代輪王三界主(만대윤왕삼계주)

雙林示滅幾千秋(쌍림시멸기천추)

眞身舍利今有在(진신사리금유재)

普使群生禮不休(부사군생예불휴)

 

만대의 법왕이며 삼계의 주인이시 부처님께서

싸라상수에서 열반을 보이신 이래 얼마나 세월이 흘렀던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지금 여기에 모셨나니

수많은 중생들 끊임없이 예배하라.

(이 주련의 글귀는 자장율사의 불탄게로 적멸보궁의 주련으로 상징처럼 되어 있다.)










금강문









<석가여래영아탑봉안비(釋迦如來靈牙塔奉安碑)와 석가여래치상입탑비(釋迦如來齒相立塔碑)>

  맨 왼쪽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부도인데 이런 부도가 한 구 더 있다.

그 다음 왼쪽의 석가여래영아탑봉안비(釋迦如來靈牙塔奉安碑)는 고종 43년인 1906년에 건립한 비다.

비문은 윤용선(尹容善)이 짓고, 글씨와 전액(篆額)은 박기양(朴箕陽)이 썼다고 한다




     

장방형의 대좌 위에 1.8m 높이의 오석(烏石)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운산형雲山 形)의 옥개석(屋蓋石)을 올려놓았고,

옥개석 중앙에는 삼태극(三太極)을 새겨 놓았고 비의 꼭대기에는 보주(寶珠)를 놓았습니다.

이 비는 신라 선덕여왕 7년 무술년(638)에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

당나라 청량산(淸凉山) 정상에서 기도한 후 문수보살로부터 석가모니부처님의 정골사리(頂骨舍利)

치아사리(齒牙舍利), 가사, 수주(염주)를 받들고 돌아와 오대산 월정사,축서산 통도사, 사자산 법흥사,

갈래산 정암사 등 네 산에 나누어 봉안하였으나, 임진왜란(1592) 때에 왜구가 보물임을 알고 가져갔고,

그후 선조 37년인 갑진년(1604)에 사명대사가 왕명을 받들고 일본에 가서 두루 찾아 모시고 와서는

여러 절에 나누어 봉안하였는데, 영아(靈牙. 치아사리) 12()

간성의 건봉사에 소장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이 후 숙종 9년인 1683년에 탑을 세워 봉안하고 비를 세웠는데

고종 15년인 1878년 화재로 인하여 비가 없어졌으므로,

1904년에 발원하여 2년 뒤에 다시 비를 세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오른쪽의 석가여래치상입탑비(釋迦如來齒相立塔碑)

영조(英祖) 2년인 1726년에 건립한 비로, 비문(碑文)은 월봉당(月峰堂) 쌍식(雙式)이 짓고 썼으며,

전액(篆額)까지 썼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 신라시대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께서 당나라에 가서

부처님의 정골(頂骨)과 치아(齒牙) 사리와 금점가사(金點袈裟) 등을 전해 받아 왔으며,

이를 통도사(通度寺)에 봉안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왜구가 모두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사명대사(四溟大師)께서 일본에 가서 모두 찾아와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 12()

건봉사 낙서암(樂西庵)에 안장하였다가 사리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좌측이 세존영아탑>

이 세존영아탑(世尊靈牙塔)은 선조 38년인 1605년에 사명대사께서 일본에서 되찾아 온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경종 7년인 1724년에 건립한 탑입니다. 이 탑은 1986년에 도굴범들에 의하여 사리를 도굴 당했던 사리탑이다.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기단부 하대석의 밑 부분에는 8면마다 영기창(靈氣窓)이 새겨져 있고, 그 위로 복련(覆蓮)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중대석에는 동심원을 새기고 범자(梵字)와 만자(卍字)를 새겼고, 그 위에 상대석을 놓고 앙련(仰蓮)을 새기고, 그 위에 탑신을 세우고 옥개석을 놓았는데 옥개석은 경사가 급하 고 높게 이루어졌는데 이는 조선 중기와 후기에 가끔 나타나는 형태라고 합니다. 옥개 석 위에는 노반(露盤)복발(覆鉢)보륜(寶輪)보주(寶珠) 등이 차례로 놓여 있습니다.



독성각


독성각은 나반존자를 모시는 전각이다. 나반존자는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 불리는 나한이다.

말법시대에서 미륵불이 출현하기 전까지 중생들에게 복을 주고, 재앙을 없애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나한이다.

독성(獨聖)이란 말은 홀로 인연의 이치를 깨달아서 도를 이룬 소승불교의 성자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으나,

나반존자가 홀로 깨친 이라는 뜻에서 독성 또는 독성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반존자라는 명칭은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나 5백 나한의 이름 속에 보이지 않고,

불경 속에서도 그 명칭이나 독성이 나반존자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불교에서도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다.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앙형태이다.

우리나라 사찰에 모셔지는 나반존자의 모습은 하얀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있으며,

눈썹은 매우 길게 묘사되어 있고 미소를 띤 경우가 많다.

건봉사의 이 나반존자상 옆에 동자상을 둔 것은 좀 특이하다.


왕소나무 찾아 가는 길에 내려다 본 건봉사


왕소나무, 수령은 300년?






















사명당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