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29. 21:28ㆍ국내 명산과 사찰
맑고(淨) 향기로운(芳)로운 아름다운 금수산 자락의 고찰, 정방사
청풍호의 풍광에 매료되어 운무 자욱한 흐린 날이였지만 이른 아침 제천 금수산의 정방사를 찾았다.
정방사(淨芳寺)는 충북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 금수산(1,016m) 산자락인
신선봉(845m)에서 청풍방면 도화리로 가지를 뻗어 내린 능선 상에
신라 문무왕 2년(662)에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에 속하는 사찰이다.
@법전당지탑(法田堂之塔)
제일 먼저 정방사가 마련한 주차장 쪽에서 만난 탑이다.
탑에 나온 법전당이 인조17년(1639년)에 생존했던 도은 강흡(姜恰)을 가리키는지
조계종 11대와 12대 대종사를 지닌 도림당 법전스님을 가리키는 지 안내판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정방사로 오르는 돌계단 길
겨울철이라서 그런저 해 묵은 이끼가 빛바랜 색을 토하고 있다.
@ 지금의 정방사는 《동국여지승람》에는 산방사로 소개되어 있으며,
1954년에 지은 「정방사창건연혁기」현판을 통해 보면 662년(문무왕 2)에
의상(義湘)이 수도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는 절이다.
전설에 의하면 의상이 강원도 원주에서 공부하다가 신통력을 얻은 뒤 조용히 공부할 절을 창건하고자
석장을 공중에 던졌는데, 그 석장이 날아서 현 절터에 떨어졌으므로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1825년(순조 25) 중건하여 1825년(순조 25)과 1838년(헌종 4)에 중수하였고,
1950년대에 혜봉(惠鳳)스님이 일주문을 세우고 1970년대 후반에 범종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825년에 건립한 목조 법당과 칠성각·산신각·종각·일주문(一柱門)·요사채 등이 있다.
법당 내에는 높이 60㎝의 관세음보살좌상을 비롯하여
후불탱화·신중탱화·칠성탱화·산신탱화·독성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범종각(梵鐘閣)
정면과 측면 각1칸에 사모지붕의 범종각은 근래(2002년)에 신축한 것이다.
사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기둥에 낙양각(落陽刻)이 장식되어 있다.
당초문을 조각하여 건물의 기둥이나 창방을 장식하는 것을 낙양각(落陽刻)이라 하는데,
궁궐이나 사찰 건물 등에서 이 수법을 주로 쓴다.
즉 낙양각을 액자로 하고 그 안에 자연 풍경을 차경(借景)하여 그림으로 담아내 즐기고 감상하는 것이다.
@정방사 가람배치도를 보면
사찰 공간에 크게 3단의 축대를 평지 삼아 전각이 배치되어 있는데,
오솔길에서 자그마한 암벽을 넘으면 초입에 자연식 해우소(解憂所)와 신도들의 요사채가 있으며,
그 위로 주법당과 나한전, 그리고 종무소로 사용되는 유운당과 범종각이 있다.
주법당이 자리한 중심곽은 폭이 매우 협소하여 의상대(義湘臺)를 배경으로 중정이 없는 모습이며,
법당에서 서쪽으로 장방형의 가람이 펼쳐진다.
중심곽은 법당을 중심으로 좌측에 나한전, 우측에 유운당과 범종각을 두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지장전과 석금실, 그리고 해수관음보살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외에 나한전 뒤편으로는 의상대를 기둥 삼아 높은 축대 위에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유운당(留雲堂)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에는 툇마루를 가설하였으며, 종무소 겸 요사채로 쓰고 있다.
건물의 정면에는 유운당(留雲堂) 편액이 걸려있고,
기둥에는 송나라 서예가이며 화가인 미불(米芾)의 글씨를 복각한 주련 4기가 걸려 있다.
다른 사찰의 주련과 달리 청풍호를 내려다 보며 가파른 절벽 아래 세워진
정방사의 풍경에 참 잘 어울리는 멋진 주련이다.
<유운당주련>
山中何所有(산중하소유)
嶺上多白雲(영상다백운)
只可自怡悅(지가자이열)
不堪持贈君(불감지증군)
산 속에 무엇이 있을까마는
백운이 산마루에 많이도 머물고 있구나
(아름다운 이 풍경을) 다만 나홀로 즐길 수 있을 뿐
(안타깝게도) 그대에게까지 나누어 줄 수 없구나.
@원통보전(圓通寶殿)
정방사 주 법당은 원통보전이다. 원통보전이란 관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전각으로 보통 관음전이라고 하는데
정방사의 원통보전은 지붕 기와의 명문을 통해 1838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암벽 아래에 거의 붙어 있으며,
전면에 툇마루가 가설되어 있다.
건물의 중앙에는 원통보전(圓通寶殿) 편액을,
좌우로는 유구필응(有求必應)과 정방사(淨方寺) 편액이 걸려 있다.
원통보전 내부 불단 위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관음보살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며,
후불탱은 아미타후불탱으로 1928년에 금어 관하종인(觀河宗仁)스님이 조성 봉안하였고,
불단 우측의 칠성탱은 1900년에 금어 영운봉수(永雲奉秀)스님이 조성하였으며,
그 옆으로 1928년에 종인스님이 조성한 신중탱이 걸려 있다.
* 정방사의 구조와 볼거리 *
정방사 경내에는 법당과 요사, 현혜문 등이 있다. 1825년에 세워진 법당은 12칸, 요사는 5칸 규모의 목조 기와집이다. 현혜문은 절의 정문으로 일주문이라고도 하고, 1칸 규모의 목조문이다. 정방사의 법당에 주불로 모셔진 목조관음보살좌살은 비교적 작은 규모이나 전형적인 조선 중기 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얼굴은 몸에 비해 작은 편이며, 머리 정면에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는 높은 보관을 쓰고 있다. 신체는 비례가 알맞으며 옷은 오른쪽 어깨를 반달형으로 덮은 형식을 보인다. 손은 왼손을 들고 오른손을 내리고 있는데 아미타삼존불의 좌협시보살로서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주존불의 높이는 60cm, 어깨 너비는 30cm의 관음보살상이며, 불상 뒤로 후불탱화가 그려져 있다. 최근 법당 안에 신중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등을 그려 넣었다.
원통보전에 걸려 있는 정방사(淨方寺) 편액은 석정(石丁) 안종원(安鍾元, 1874~1951)이 쓴 글씨이다.
본존불인 목조관음보살좌상은 2001년 3월 30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6호로 지정된 직후 도난당하여
현재까지 행방을 알 수 없으며 사찰측에서는 대신 모사품을 봉안하고 있다.
<정방사/원통보전/유구필응의 주련(柱聯)>
影入三途利有情(영입삼도이유정)
形分六道曾無息(형분육증무식)
觀音菩薩大醫王(관음보살대의왕)
甘露甁中法水香(감로병중법수향)
洗濯魔雲生瑞氣(세탁마운생서기)
消除熱惱獲淸凉(소제열뇌획청량)
삼도에 어린 관음의 그림자 유정을 이롭게 하시고
(중생을 건지려)몸으로 육도에 들어감이 쉼이 없어라
관음보살 대의왕 감로병 속에 법수의 향기
마군의 구름을 벗겨내고 서기를 발하시어
번뇌를 멸하고 청량함을 얻게해 주시네
@유구필응(有求必應) 숭산 소림사의 입설정이나 여타 중국사찰을 방문해 보면 <설인심주(雪印心珠) 유구필응(有求必應)>나 <佛光普照 有求必應(불광보조 유구필응)>등 유구필응과 관련된 이런 문구의 주련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숭산 소림사의 입설정은 일명 달마정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에서 2조 혜가대사가 초조 보디달마로부터 법은 받은 곳이라 이를 기린 곳이다. 유구필응(有求必應)이란 (지극히)구함이 있으면 (그것에 대한) 응답이 있다는 의미다. 원통보전 옆에 유구필응이란 편액을 단 것은 아마도 지극한 마음으로 관음보살의 자비를 구하면 반드시 응답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유구필응의 말이 인용된 경전을 보면, <묘비보살소문경(妙臂菩薩所問經)>에 『聖心不間(성심불간) 有求必應(유구필응)』 라는 경구가 나오는데 이는 「맑고 지극한 마음이 끊이지 않게 구하는게 있으면 반드시 응답이 있다.」라는 의미이고 또 <菩薩本生鬘論(보살본생만론)>에 『王者如天雨澤(왕자여천우택) 隋時有求必應(수시유구필응)』이란 경구도 나온다. 「왕이란 사람은 하늘이 비를 내려 윤택하게 하는 것처럼 때에 따라 구함이 있으면 반드시 답을 주어야 한다.」라는 의미다. 정방사와 관련된 다른 기록에 의하면 『여지도서(輿地圖書)』 청풍부(淸風府) 사찰조(寺刹條)에 “(1). 재부치동십오리허 자도화동동전(在府治東十五里許 自桃花洞東轉), (2). 상오륙리허시지암암유상중하삼암중하이암처지초평이상암즉재최고봉후유절벽 (上五六里許始扺菴菴有上中下三菴中下二菴處地稍平夷上菴則在最高峰後有絶壁), (3). 암기시신승의상지소점운(菴基是神僧義相之所占云)”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1), (2) 내용에 의하면, 정방암은 도화동에서 15리 거리에 있고 5~6리 거리에 상중하의 암자가 있었으나, 아래쪽의 두 암자는 폐사되고 상암만이 제일 높은 봉우리 절벽에 있다고 하였다. (3)번은 창건과 관련된 기사이지만, 이를 증빙할 문헌 자료나 유물 자료는 확인할 수 없다. 정방사 승려의 전언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사전(寺傳)에 1825년(순조 25) 현재의 법당을 보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법당 건물에 얹힌 기와에서 1838년(헌종 4)의 간지와 ‘충청북도청풍금수산정방암’, ‘도편수이대운’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하여 19세기 중반에 법당을 중수하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후 1900년대인 20세기 초 대대적인 불사가 이루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전각의 탱화와 전각들은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00년(고종 37)에 승려 정흔(定欣)이 칠성각(七星閣)을 중수하며 내부에 칠성탱화·독성탱화·나한탱화를 조성하고, 1928년에 승려 장민(莊旻)이 법당의 아미타후불탱화와 신중탱화를 조성한 것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또한 1904년(고종 41) 경내에 건립된 헌답대시주비와 1913년에 건립된 「석수당기(石壽堂記)」를 통해 20세기 초 정방사의 불사를 짐작할 수 있다. 근대에 와서는 1954년에 혜봉(惠鳳)스님이 「정방사 창건연혁기(淨芳寺創建沿革記)」와 현혜문(玄慧門)을 세우고, 산신각(山神閣)에 산신탱화를 조성하였다. 1974~1978년에는 담월이 정방사에 주석하면서 사찰 소유의 전답과 유물, 재산 등을 정리하고 아울러 범종 불사를 일으켜 현재 가람의 모습으로 일신하였다. 이후 1990년대 후반 주지 석구(石龜)스님이 주석하며 대규모 중건 불사를 이루었다. 법당의 보수는 물론 지장전과 나한전(羅漢殿), 산신각을 건립하고, 요사를 증축·신축하였으며, 해수관음상과 지장보살상을 새로 봉안하였다. 가파른 절벽에 앞에 세워진 정방사는 주변경관이 빼어나고 특히 법당 앞에서 바라다 보이는 청풍호의 풍광은 불자가 아니더라도 뭇 시인묵객들의 찬사가 이어지는 곳이다. 특히 법당 지붕의 3분의 1을 뒤덮은 암벽은 그 웅장함과 기묘한 모습에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
@산신각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근래에 신축한 것이다.
산신각의 중앙에 모셔진 칠성탱은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배치하였다.
독성탱은 1900년에 금어 영운(永雲)과 봉수(奉秀)외 4인이 조성한 것이고
산신탱은 1955년에 혜봉스님이 조성한 것이다.
산신탱화
독성탱화
@지장전(地藏殿)
자연암벽을 이용하여 선각(線刻) 지장보살을 봉안하였으며
그 앞에 높이 250cm의 석조지장보살 입상을 개금하여 봉안하였다.
<기타 전각에 걸린 주련>
高無高天還返低(고무고천환반저)
淡無淡水深還墨(담무담수심환묵)
높음이 하늘보다 높은 것은 없으나 도리어 밑으로 돌아가고
맑음이 물보다 맑은 것이 없으나 깊음이 도리어 검다
僧居佛地少無欲(승거불지소무욕)
客入仙源老不悲(객입선원노불비)
수행자가 불국정토에 있으니 조금도 욕심이 없고
나그네가 신선 사는 곳으로 들어서니 늙음 또한 슬프하지 않는구나.
맑은 날이 아니라서 청풍호의 조망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정방사 탐방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마을가계의 가지런한 장독풍경이 좋아 한컷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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