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26. 23:04ㆍ국내 명산과 사찰
가을나들이 소요산 자재암
경기도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소요산에 위치한 자재암은 신라 선덕여왕 14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조선세조 10년에 간행된 반야바라밀다 심경약소 언해본이 발견되어
보물 1211호로 지정되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소요산 보다는 가을 단풍과 겨울 설경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열리는 국화와 단풍축제. 금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요일 아침 가족과 함께 단풍을 보러 소요산을 찾았지만 그야말로 소요산역에서부터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매년 들러보는 축제지만 금년 축제는 그 시기를 너무 늦게 잡은 것 같았다.
이미 붉은 단풍은 태반이 푸른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고 남은 단풍의 색은 생기를 잃어버려 바래져 가고 있었다.
금년 축제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단풍(丹楓) 축제라기보다는 현란한 인풍(人風) 축제란 말이 어울리지 않나 생각된다.
소요산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와의 얽힌 이야기가 서린 공주봉하며,
의상대사를 기리는 소요산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의상봉 등 원효대사와 얽힌 이야기가 많은 산이라
단풍철이 아니라도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하는 산이지만
단풍철에는 더 심하여 차와 인파로 들끓는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라서 입구에서부터 인파에 시달려 잠시 쉴겸 인적이 좀 한가한 곳을 찾다가
주차장 옆 우측에 있는 자유수호평화박물관 쪽으로 향했다.
오르는 길 우측에 야외전시물이 있어 흐리지만 가을하늘을 잡아보려고 셔터를 눌렀다.
원효폭포
공주봉 가는 계곡
원효대
자재암은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서
고려 광종25년 (974) 왕명으로 각규대사(覺圭大師)가 중창했으며,
의종 7년(1153) 화재를 당해 이듬해 각령선사 (覺玲禪師)가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중건(重建)했다.
조선 고종 9년(1872) 원공선사와 제암화상이 퇴락된 이 사찰을 44간의 건물로 복원하고 영원사(靈源寺)라 개칭했다.
1907년(순종 원년) 정미의병 때는 이곳이 의병 활동의 근거지였던 탓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다.
이후 제암화상과 그의 제자 성파(性波) 스님이 복원하여 원래 이름인 자재암으로 고쳤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폐허가 되어 1961년 대웅전, 1971년에 요사, 1974년에 포교당과 원효대,
1977년에는 삼성각을 각각 건립하였다.<자료:동두천시홈피>
@심생즉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
심멸즉 감분불이(心滅則龕墳不二)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없도다.
삼계가 오직 이 마음뿐이요, 만법이 오직 알음알이로다.)
불가에 회자하는 이 명귀를 남긴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淨)이다.
아버지는 내말 설담날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고,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원효는 신라의 귀족으로 본명은 설사(薛思)이며 신라의 개국공신이자
박혁거세를 추대한 사로 6촌의 촌장 중의 한사람인 설거백 또는 설호진의 후손으로 설곡(薛嚳)의 4대손이다.
원효대사는 너무나 잘 알려진 고승이라 출생만 기술한다.
옥류폭포
@자재암 동쪽 모퉁이에서 폭포 구경을 하는데 절벽 위에 5, 6장(1장은 약 3m)이나 되는 큰 바위가 서 있고
암벽사이 돌구멍에서 샘물이 졸졸 흐르는데 이것이 원효샘이다」
허목이 묘사했던 대로 지금 자재암 동쪽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바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옥류폭포가 있고
그 왼쪽에 끝이 뾰족한 촛대절벽이 보인다. 그 절벽 아래에 원효스님이 도를 닦던 자연석굴이 있고
석굴속 바위틈으로 흐르는 샘물이 바로 원효샘이다.
현재 원효굴은 자재암 나한전으로 조성돼 석가모님부처님과 16나한을 모셨다
위 사진은 나한전의 내부전경
350여 년 전 숙종 때 학자인 미수 허목(1595~1682)의 문집「미수기언」의 「소요산기」는 「폭포 옆 높이 10여인(1인은 8척으로 약 2.4m)이나 되는 벽에 비스듬히 걸린 나무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원효대가 나오고 이를 지나면 소요사가 있다」고 했다. 지금 원효대 왼편의 나지막한 폭포를 원효폭포라고 부르지만 가물어서 그런지 폭포라고 불어기는 좀 그렇다. 원효샘은 아직 물이 마르지 흘러내려 등산객이나 참배객에게 시원한 물맛을 제공하고 있다. 원효는 이 샘에서 나온 물로 차를 끓여 음용(飮用)하였는데 고려 의종때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 1168년∼1241년)는 원효샘의 물로 달인 차맛에 대해 이렇게 극찬했다.
산 따라 위험한 다리 건너
발을 포개며 좁은 길 걷네
원효가 일찍이 절을 지었네
신령한 자취는 사라지고
초상만이 흰 비단폭에 남았구나
차 끓이던 샘에 찬물이 고여
마셔보니 젖같이 맛있네
이곳에 예전에 물이 없었다면
중들이 살기 어려웠을 것인데
원효가 와서 거처하매
단물이 돌구멍에서 솟았네」<김대성 편집위원>
@허목(許穆, 1595년 12월 11일 ~ 1682년 4월 27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및 유학자, 역사가이자 교육자, 정치인이며,
화가, 작가, 서예가, 사상가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자(字)는 문보(文甫)·문부(文父)·화보(和甫)[2],
호(號)는 미수(眉叟), 태령노인(台領老人),대령노인(臺領老人), 석호장인(石戶丈人)이다.
별호는 미로(眉老), 희화(熙和), 공암지세(孔巖之世), 승명(承明)이고
별호로는 동교노인(東膠老人), 구주노인(九疇老人), 동서노인(東序老人), 이서포옹(二書圃翁),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소요산 자재암에 소장되어 있는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密多心經若疏)』는 언해본으로
1994년 10월 17일 보물 제 1211호 지정되어 있다.
이 언해본은 당나라 현장이 번역한 반야심경약소에 송나라 중희의 현정기를 붙여 편찬한 주석서인데
세조10년(1464)에 금강경과 함께 간경도감에서 발간한 책이다.
이 판본은 현재 보물 제 771호로 지정된 서울대학교 도서관본과 동일한 책이나 이곳에 없는 전이 붙어 있고
교정인이 찍혀 있으며 보전상태는 보다 양호하다고 한다.
자재암에 소장된 이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는 저지(楮紙) 목판본이며
목판본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것인 듯 표지가 없다.
불교문화재로서 뿐만 아니라 서지학 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 인정되고 있다.
@매년 국화축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생각하는 사람>.
근대 조각의 시조이며, 근대 조각 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추앙받는
프랑수아 오귀스트 르네 로댕(François-Auguste-René Rodin, 1840~1917) 작품의 모사품이다.
로댕의 가장 전형적인 작품은 1880-1900년 제작된 186인의 인체를 높이 6.50m의 문에 조각한 <지옥의 문>,
1895년 <칼레의 시민>, 1900년 <입맞춤> 등 연이어 작품을 내면서 1904년에 불후의 명작인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다,
1907년에는 <걷는 사람>, 1913년에는 <클레망소> 등을 비롯하여 그 이후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미켈란젤로 이후의 최대의 거장으로 예리한 사실의 기법을 구사하여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의 감정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약동을 표현하려 하였다.
이로써 근대 조각에 새로운 방향을 여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던 조각가로서 추앙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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