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27. 22:02ㆍ국내 명산과 사찰
불향기(佛香氣)따라 땅끝마을 해남 달마산 미황사(美黃寺)
땅끝마을 해남 달마산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창건되었다.
1692년(숙종18년)에 지은 <미황사사적비>에 따르면
서역 우전국 국왕이 보낸 경전(經典)과 불상(佛像)을 가득 실은 배가 포구에 닿았는데
의조화상(義照和尙)과 향도(香徒) 100여명이 그 배를 맞이하여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우전국은 지금의 <Khotan>으로 대승을 행하는 곳으로 중국에 오는 경전이 모두 이곳을 경유하여 전해졌다고 한다.
이땅에 관한 역사는 서역기(西域記)13에 전해진다.)
(미황사 일주문인데 아직 현판은 걸려있지 않다. 불사중인 모양이다.)
(일주문천장의 단청)
@달마산(達磨山: 489m)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이 두륜산을 지나 마지막으로 우뚝 솟은 산이다.
해남군 현산면, 송지면, 북평면에 걸처 있고
달마산이라고 칭한 것은 경전을 뜻하는 범어 dharma에서 비롯되었다. 경전을 봉안한 산이라는 의미다.
달마산의 능선은 마치 공룡의 등줄기처럼 기암과 괴봉이 7km에 걸처 이어져 있어
그 풍기는 풍광이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데 손색이 없을 만큼 수려하고
힘찬 기상과 장엄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창건이후 미황사는 조선중기까지 12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로 크게 번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1597년)을 겪으며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1601년에 중창하였고, 2008년에 삼창하였다.
미황사는 현재 대한 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에 소속되어 있다.
(자하문)
@달마산 미황사에 얽힌 재미난 전설이 있다.
1692년(숙종18년)에 지은 미황사 사적비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때인 749년
어느 날 돌로 만든 배가 달마산아래 포구에 닿았다.
(앞은 자하문, 뒤는 만세루 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배안에서 범패소리가 나 어부들이 살피러 다가갔지만 이상하게도 배에 가까이 갈수록 배는 더 멀어져갔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의조화상이 정갈하게 목욕재개하고
스님들과 동네 사람 100여명을 이끌고 포구로 나갔더니 금인(金人)이 노를 젓고 있었다.
그 배안에는 화엄경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聖衆), 16나한, 탱화, 금환(金環), 검은 돌들이 실려 있었다.
(불교용품 판매소와 간이식당을 겸한 곳인데 연밥이 별미다. 달마선다원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사람들이 불상과 경전들을 모실 곳을 의논하는데 검은 돌이 갈라지면서 그 속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왔다.
소는 금방 큰 소로 변했다. 그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나는 본래 우진국 왕인데 부처님 모실 곳을 찾아 여러 나라를 다니는 중인데
이곳 달마산을 보니 1만 부처님(佛)이 나타남으로 여기에 부처님을 모시고자 하오,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모시도록 하시오.」하는 것이었다.
(미황사의 동백꽃도 이제 끝물인가보다)
의조화상이 꿈의 게시를 따라 소를 몰고 가는데 산기슭에 이르기 전에 한번은 눕더니 금방 일어났다.
그리더니 산골짜기에 이르자 쓰러져 눕더니 다시 일어나지를 않았다고 한다.
의조화상은 처음 소가 누웠던 자리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누운 자리에 또 절을 세웠는데 그 절이 바로 미황사(美黃寺)라고 한다.
미황사의 미(美)는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다워 따온 것이고,
황(黃)은 금인(金人)의 황홀한 색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주요 전각으로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응진당,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선원), 달마전(승방), 세심당(수련원), 요사체, 향적전(객실),
안심료(후원), 보제루(누각), 감로사실(종무소), 자하루. 이심당 등이 있다.
(범종각)
(청운당)
(이심당, 종무소를 겸하고 있다.)
(세심당)
(향적당)
(염화실)
(삼성각 가는 길에 돌담 축대 위에서 반기는 손님 하나 만났다.)
(명부전)
(삼성각)
(대웅보전)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제947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미황사의 중심 전각이다.
본존불로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모시고 협시불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
미황사는 두번째 방문인데 언제나 단청은 칠해져 있지 않았다.
1598년에 중창하였고, 1660년, 1754년, 1982년, 2007년에 거듭 중수하였다.
내부의 대들보와 천장은 산스크리트문자(범어)와 천불도로 장엄되어 있는데
그 아름다움이 인도의 아잔타석굴벽화와 중국 돈황막고굴의 천불벽화에 비견되어지기도 한다.
미황사의 뒤편을 그대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저 있는 달마산은
그 빼어난 아름다움 때문에 남도의 금강산이라고도 불린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선(禪)을 전하고, 해동의 달마산에 늘 머물러 있다고 하여
달마산이라 이름 지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닌 것 같다.
고려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송나라의 높은 관리들이 찾아와 달마산을 찬탄하고 예경하였다고 전해진다.
대웅보전처마
(응진당)
보물제1183호로 지정된 미황사 응진당(應眞堂)은 석가모니 제자 가운데 신통력이 뛰어난 16 아라한들을 모신 전각이다.
응진(應眞)은 참다운 존재의 실상을 훤히 깨닫고 해탈에 이른 이들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아라한>의 한자어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대웅보전과 함께 여러차례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부벽에는 수목으로 그려진 나한(羅漢) 벽화가 있는데
선(禪)의 경지를 보여주는 유려한 선(線)맛으로 이름이 높다고 하는 데 색이 너무 바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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