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꽃의 정원 세미원(4) 세한도와 배다리 풍경

2014. 7. 22. 22:59명승지

 

 

물과 꽃의 정원 세미원(4) 세한도와 배다리 풍경

 

세미원은 연꽃과 더불어 두물머리와 연결된 배다리가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그기다가 재작년만 하더라도  볼 수 없었던 세한정이 만들어져 옛 선조들의 예술 혼을 느끼게 한다.. 

세미원의 세한정은 추사 김정희 작품 세한도에 나오는 풍경을 그대로 재현시킨 정자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로 추앙되는 김정희(金正喜, 1786~ 1856)는 본관이 경주이고, 자는 원춘(元春), 그리고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등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도 무려 540여 종이나 되는 호를 가지고 있는 분이다. 노론 북학파 실학자이면서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의 창시자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추사체는 제주도에서 유배하던 때에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가 추사체이다. 이 추사체는 한국의 필법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의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귀양을 가고 풀려나기를 반복한 그의 삶은 귀양살이로 보낸 해수가 무려 13년이나 된다.

그의 작품 중에는 모질도(耄耋圖), 부작란도(不作蘭圖) 등이 유명하지만

 특히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가 회자하는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 김정희의 문집으로 완당집, 완당척독 阮堂尺牘, 담연재시고 覃硏齋詩藁 등이 있다.

 

 

 

세한도는 추운 시절을 그린 그림으로서 세태(世態)의 모질고 차가움이 표현되어 있다. 쓸쓸한 화면엔 여백이 많아 겨울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데, 보이는 것이라곤 허름한 집 한 채와 나무 네 그루 뿐이다. 화제는 ‘세한도(歲寒圖) 우선시상(藕船是賞) 완당(阮堂)이라고 예서체로 오른쪽 화면 위쪽에 바짝 붙어 있다. 「추운 시절의 그림일세. 우선이! 이것을 보게, 완당’」 이란 뜻이다. 그래서 화면의 여백은 더욱 휑해 보인다. 이러한 텅 빈 느낌은 바로 절해고도 제주도 유배지에서 늙은 몸으로 홀로 버려진 추사가 나날이 맞닥뜨려야만 했던 씁쓸한 감정 그것이었을 것이다. 까슬까슬한 마른 붓으로 쓸 듯이 그려낸 마당의 흙 모양새는 채 녹지 않은 흰 눈인양 서글프기까지 하다.

 

 

  

 

세한도에는 꿋꿋이 역경을 건뎌내는 선비의 올곧고 견정(堅定)한 의지가 그려져 있다.

허름한 집을 그린 묵선(墨線)이 너무나 차분하고 단정하다. 초라함이나 자기 연민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집주인 완당(阮堂) 김정희, 그 사람을 상징하는 허름한 집은 외양은 조촐할지언정 속내는 이처럼

도도하다. 남들이 보건 안보건, 미워하건 배척하건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이 집에서 스스로가 지켜 나아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서 고금천지에 일찍이 유례가 없는 추사체를 만들어낸 것이다.

유배지의 추사는 왼편의 화발글씨 마냥 엄정하고도 칼칼하게 자기 자신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세한도에는 또한 영락한 옛 스승을 생각해주는 제자의 따뜻하고 고마운 마음도 그려져 있다.

집 앞에 우뚝선 아름드리 늙은 소나무를 보라! 그 뿌리는 대지에 굳게 박혀 있고,

한 줄기는 하늘로 솟았는데 또 한줄기가 가로로 길게 뻗어 차양처럼 집을 감싸 안았다.

그 옆의 곧고 젊은 소나무는 어떠한가? 이 소나무가 없었다면 저 허름한 집은 그대로 무너져버릴 것만 같다.

윤곽만 겨우 지닌 초라한 집을 지탱해주는 것은 바로 저 변함없이 푸른 소나무인 것이다.

이 젊은 소나무가 바로 멀리서나마 해마다 잊지 않고 정성을 보내주는 제자 이상적인 것이다.

그 고마움이 추사의 마음에 얼마나 깊이 사무쳤던지 유독 이 나무의 필선은 더욱 힘차고 곳곳에 뭉친

초묵(焦墨)이 짙고 강렬한 빛깔로 멍울져 있다. 그 마른 붓질이 지극히 건조하면서도

동시에 생명의 윤택함을 시사하고 있음은 참으로 감격적이다.

 

 

 

세한도의 집 왼편 약간 떨어진 곳에 선 두 그루 잣나무는 줄기가 곧고 가지들도 하나같이 위쪽으로

팔을 쳐들고 있다. 이 나무들의 수직적인 상승감은 그 이파리까지 모두 짧은 수직선 형태를 하고 있어서

더욱 강조된다. 추사는 이 나무들에서 이제 기대할 수 없는 희망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세한도란 결국 석 자 종이 위에 몇 번의 마른 붓질이 쓸고 지나간 흔적 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는 세상의 매운 인정과 그로 인한 씁쓸함, 고독, 선비의 굳센 의지, 옛사람의 고마운 정,

그리고 끝으로 허망한 바램에 이르기까지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세한도는 당대의 통유(通儒) 추사 김정희가 환갑을 바라보던 1844년 제주도에서 5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그의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 자신을 대하는 한결같은 마음에 감격하여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 보낸 작품이다.

 

 

 

추사는 그림 왼쪽에 적혀있는 해서체의 화발(畵跋)에서 작품을 그리게 된 연유를 적어 놓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대가 지난해에 책 수백권을 보내주니 이는 세상에 흔한 일은 아니다. 지금 세상을 온통 휩쓸고 있는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 속에서 이렇게 서책을 구하여 바다멀리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이득을 좇듯이 하였구나 사마천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는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사람으로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공자왈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 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예전의 그대에 대해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시대의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곤 하였다.

세상 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라. 슬프다! 완당노인이 쓰다.」

 

 

 

 

화발에서 보듯이 추사는 자신을 천추의 명작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과 동일시하고 있는 듯하다.

추사의 뇌리에는 사마천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유배생활을 결코 헛된 나날로 보내지는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새기고 있다. 

 

 

 

이상적은 추사보다 18세 연하의 중인이었다. 김정희는 다가오는 새 시대를 예감하고

일찍부터 계급의 장벽을 넘어 재능 위주로 제자를 길러냈으니,

그 문하에는 진보적 양반 자제는 물론 중인과 서얼 출신의 영민한 제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상적은 중국어 역관으로 12번이나 중국을 드나들었는데,

스승이 닦아놓은 연분을 따라 중국의 저명한 문사들과 깊이 교유하였다.

그는 특히 시로 크게 명성을 얻어 1847년에는 시문집을 중국에서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상적은 스승의 세한도를 받아보고 곧 다음과 같은 답장을 올렸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중략).이번 사행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 표구를 해서 옛 지기 분들게 두루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하고자 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를

벗어나고 세상의 권세와 이득을 초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다?

참으로 과당한신 말씀입니다.」 

 

 

 

이상적은 편지의 글대로 청나라의 문인 16인과 같이한 자리에서 세한도를 내보였다.

그들은 세한도 그 작품의 고고한 품격에 취하고, 김정희와 이상적 두 사제간의 아름다운 인연에

마음깊이 감격하였다. 그리하여두 사람을 기리는 송시(頌詩)와 찬문(讚文)을 다투어 썼다.

이상적은 이것을 모아 10미터에 달하는 두루마리로 엮어, 귀국하는 길로 곧바로 유배지의 스승에게 보내 뵈었다.

 1년이 지나 다시 세한도를 대한 추사의 휑한 가슴에 저 많은 중국 명사들의 글귀가

얼마만큼 큰 위안으로 다가섰을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이상적은 나중에 스승 김정희의 부음을 듣고 지은 시 가운데서 이렇게 읊었다

 

평생에 나를 알아준 건 수묵화였네

흰 꽃심의 난꽃과 추운 시절의 소나무

 

스승 김정희가 그려준 이 세한도와 난초를 친 그림인 묵란도(墨蘭圖) 두 폭은

이상적의 평생이 가치 있는 것이었음을 대변해줄 정도로 소중했던 것이다.

 

 

 

 

세한도는 애초 제주도에서 그려져 이상적에게 보내졌다가 연경까지 다녀왔던 이 작품은 다시 스승에게 보인 후에 물론 이상적의 소장이 되었다. 그러다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이란 이의 소장품이 된 것을그 아들 김준학이

물려받아 2대에 걸쳐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추사 김정희의 연구자였던 경성대학 교수 후지즈키 란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급기야 광복 직전인 1943년 10월 현해탄을 넘고 말았다.

 

 

 

그러나 종전 직전에 서화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일본 도쿄로 후지즈카를 찾아가

비오듯 퍼붓는 폭격기의 공습 위험을 무릅쓰고 석달 동안이나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가까스로 양도받아 다시 조국 땅을 밟게 되엇다. 당시 후지즈카가 소장했던

김정희에 관한 그 밖의 수많은 자료들은 결국 미군의 폭격을 피하지 못하여 대다수가 타버리고 말았다고 하니,

세한도는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화를 피한 셈이었다. 그래서 작품 말미에 이러한 전말을 기록했던

오세창 선생은 세한도를 다시 보게된 감회를 비유하여 말하기를

“마치 황천에 갔던 친구를 다시 일으켜 악수하는 심정”>이라 하였다.

 

(이용된 이 글은 고 오주석 선생이 지은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999, 솔)에 들어있는

글을 발췌 정리하여 올려 논 대구대학교 펜싱부카페의 글을 펌함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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