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계곡(華陽溪谷)

2013. 11. 24. 12:23명승지

 

 

 

화양계곡(華陽溪谷)

 

국립공원 속리산에는 화양동계곡, 선유동계곡, 쌍곡계곡, 만수계곡, 서원계곡 등 이름난 계곡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웅장하고 기암괴석들에 둘러싸인 수려한 계곡은 단연 화양계곡이다.

화양계곡은 1975년 속리산 국립공원에 포함되었다.

이 계곡이 유명하게 된 것은 조선 중기 사색당파의 붕당이 난립했을 때

서인 노론의 영수를 지냈던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이 은퇴 후 여기에 머물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화양계곡의 원래 이름은 화양동 이였는데 화양목이 많아서 그렇게 불린 모양이다. 화양(華陽)이란 말은 중화(中華)의 화(華)를, 주역의 일양래복(一陽來復)이라는 괘에서 양(陽)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일양래복이란 말은 음(陰)이 다하면 양(陽)이 다시 온다는 말로,

흉(兇)함이 가면 길(吉)함이 다시 온다는 의미다.

 

 

 

화양계곡을 화양구곡이라 불리는 것은 중국 복건성 무이산(武夷山)의 아홉 구비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지은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본떠서 화양구곡(華陽九谷)이라고 했다고 한다.

주희는 남송(南宋)의 유학자(1130~1200)로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산인(雲谷山人)등으로 불리며

주자학의 창시자 이다. 우암 송시열은 주희를 흠모하여 그의 학설을 깊이 받아 드렸다고 한다.

 

 

 

11월의 3번째 휴일 날이 맑았다면 동해안 일출을 보러갔을 텐데 날이 흐리고 비소식이 있어 포기했다가 꿩대신 닭이라고 화양계곡으로 향했다. 일기예보가 날은 흐리지만 비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기예보와는 달리 서울을 벗어나자마자 날은 흐리고 간간히 비까지 뿌리더니 화양계곡에 닿으니 진눈깨비에 바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날씨는 그렇게 변덕을 부렸다. 충북 괴산까지 거리는 가까울 줄 알았는데 가는데 2시간 반, 올라오는데는 무려 5시간이나 걸렸다. 서울을 진입하는 것은 어디를 갔다 오든 교통체증을 피할 수 없는 것이 휴일 나들이다. 그래도 젖은 하루를 맑은 마음으로 만추의 끝자락을 밟았다 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닌가.

 

 

 

 

 

 

 

 

 

第1谷: 경천벽(擎天壁).

화양구곡의 제일곡(谷)으로 공원 입구 주차장 가기 전 좌측에 있다.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쳐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듯하여 경천벽이라 했다.

 

 

 

 

 

 

 

 

 

 

 

 

 

 

 

 

 

 

 

 

친목차 관광을 나온 모양이다. 느티나무가 늘어선 계곡에 나란히 줄을 서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이

마치 옛날 초등학교 시절 소풍나온 때의 추억을 자아낸다.

 

 

 

 

 

 

 

第2谷.운영담(雲影潭)

경청벽에서 1.2km 북쪽의 계곡에 위치하는 소(沼)다.

물이 맑아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 하여 운영담이라고 했다.

<운영>의두 글자는 주희의 무이구곡가 중 “천광운영(天光雲影)”에 따온 것이라고 한다.

 

 

 

 

 

 

 

 

 

화양계곡에는 우암 송시열의 흔적이 많다. 그 유명한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있는 곳이다. 

 

 

 

 

 

 

 

 

 

 

 

 

 

 

@만동묘의 정비

만동(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약자로 만 번을 굽이치고 꺾어져도 반드시 동으로 간다는 의미인데

원래는 선조대왕이 명나라 황하는 반드시 동쪽의 황해로 흘러들어가 조선을 감싼다고 하는

대중화에 대한 보은의 글귀로 지어졌다고 한다. 

 

만동묘

 

@만동묘는 만력제(萬曆帝)와 의종을 추모하는 묘다. 만력제는 명나라 제13대 황제(재위 1572~1620)인 신종(神宗)을 말하며 우리나라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장군을 선두로 파병을 도운 명의 황제다. 신종은 10세 등극했는데 나이 어린 탓에 은사인 재상 장거정(張居正)이 정치를 주관했다. 그는 어린 나이로 등극한 황제에게 너무나 검소한 살림을 강조하고 또 엄격하여 철혈재상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던 장거정이 황제 등극 후 10년 만에 죽자 황제는 억눌림에서 해방되어 재물을 밝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윗물이 그러니 당연한 아랫물도 그렇게 되어가 이로 인한 매관매직이 성행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조선의 임진왜란 때 국내적으로 누루하치의 금국과 대치하면서도 조선에 파병정책을 실시한 결과 패망의 길을 재촉한 명의 황제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는 숙종29년(1703)에 우암 송시열의 유지로 그의 제자들이 사당을 세웠는데 그것이 만동묘(萬東廟)인 것이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이여송장군을 내세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황제를 제사 지내기 위한 사당으로 충북 괴산군 청천명 화양리에 위치한다. 만동묘는 한때 도산서원과 더불어 명성으로 떨쳤으나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를 지시할 때 헐려버리고 지금은 묘정비만 존재하고 있다. 

 

 

@만동묘로 올라가는 계단은 좁고 가파르다.

이는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임으로 올라갈 때

머리를 숙이라는 의미라는 뜻에서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비례부동(非禮不動)

민정중이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친필로 된 비례부동이라는 4글자를 받아 송시열에 전하자 1674년 우암은 이를 화양동 바위에 새겼놓고 그 원본은 환장암(지금은 채운암)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를 영의정 김수황이 글로 적어 기록하였다고 한다.

@화양서원

화양서원은 1695년 숙종21년에 건립되어 이듬해 사액을 받았다.

조선 중기 붕당이 난립할 때 가장 세력을 떨치던 서원이었으며 그 횡포 또한 대단했다고 한다.

1870년 고종 7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다.

 

 

 

 

 

第3谷.읍궁암(泣弓岩)

조선의 17대 왕인 효종대왕(1619~1659)이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8여년을 불로로 잡혀있다가 돌아와 그 치욕을 갚기 위해 북벌(北伐)을 계획했지만 불운하게도 41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울분을 참지 못해 새벽마다 이 바위 위에 올라 임금님이 계신 한양 대궐을 향해 활(弓)처럼 업드려 통곡하였다 하여 읍궁암이라 했다.

 

 

 

 

 

 

 

 

 

 

 

 

 

第4谷. 금사담(金沙潭)과 암서제(巖棲齊)

화양구곡의 백미는 단연 금사담과 암서제이다. 맑고 깨끗한 물과 금싸라기같은 모래가 보이는 계곡속의 연못이라는 의미로 금사담이라 불리며 정자 암서제가 바위와 어우러져 고풍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화양구곡에서 단연 제일 풍광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설경과 어우러지면 더 멋진 풍광을 자아낼 것 같다. 전면3칸 측면2칸으로 아담하게 지어진 이 암자는 조선 숙종(1661~1720)때 우암 송시열이 정계를 은퇴하여 여기 반석 위에 지은 암자로서 암서제(巖棲齊)라 명명 하였는데 우암은 여기에 은거하면서 학문과 수행을 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86년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第5谷.첨성대(瞻星臺)

큰 바위가 첩첩이 쌓여 있어 그 위에서 천체를 관측할 수 있다고 하여 첨성대라 하였다.

첨성대의 바위들은 마치 사람이 쌓은 듯 묘하게 세워져 있어 바위를 좋아하는 내 눈길을 잡는다.

 

 

 

 

 

 

 

 

 

第6谷.능운대(凌雲臺)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마치 하늘의 구름을 찌를 듯 하여 능운대라 하였다.

능운대 이 바위 뒤길이 채석암 오르는 길이다. 

 

 

 

 

 

 

 

 

 

 

 

 

 

 

 

 

 

第7谷.와룡암(臥龍岩)

용이 누워 꿈틀거리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와룡암이라 했다.

 

 

 

 

 

 

 

 

 

 

 

 

 

 

 

 

 

 

 

 

 

 

第8谷.학소대(鶴巢臺)

청학(靑鶴)이 바위 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 하여 학소대라 하였다.

푸른 솔나무가 운치있게 자리하여 풍광을 더한다.

 

 

 

 

 

 

 

第9谷.파천(巴串)

계곡 전체에 티 없는 흰 바위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그 위에 흐르는 물결이 마치 “용의 비늘을 꿰어 놓은 것”처럼 보여 파천이라 불리며, 이곳에서 신선들이 술잔을 나누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파(巴)자는 뱀을 의미하며, 천(串)은 “관”자로도 읽히며, 그 생김이 잇빨이 연이어 있는 모습을 의미한다. 그럼으로 파천을 글자 그대로 보면 뱀의 하얀 잇발이 가지런히 솟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화양계곡에는 유달리 백옥같은 흰 바위가 많은 것이 특색이다.

 

 

 

 

 

 

 

 

 

 

 

 

 

 

 

 

 

 

 

 

 백옥같은 하얀 바위가 마치 눈속의 초가집같은 형상을 보여준다.

 

 

단양 오석으로 된 수석이다. 수마도 잘 되고 색감도 일품이다.

 

 

 

 

 

 

 

 

 

 

 

비가 내린 탓인가, 떨어진 붉은 낙엽이 더 선명하다.

 

 

성황당(城隍堂)

이곳 주민들의 한해 동안 풍년농사와 안가(安家) 태평을 기원하던 곳이다.

 

 

돌아 오는 길,  햇살 사이로 비치는 구름이 멋져서 고속도로 차 안에서 담아 보았다.

 

 

 

 

 

 

 

 

 

 

 

 

 

 

 

 

 

보름날이라 달의 풍경이 아름다웠지만 차 안에서 담는 것은 한계가 있다. 흔들림도, 화각도 그렇고.. 

 

 

 

 

 

                                                  

                                                                             ♬ 떨어지는 잎새/김성아

'명승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궁산책 창경궁  (0) 2013.12.19
추암의 일출  (0) 2013.12.04
꽂지해수욕장  (0) 2013.11.19
고궁나들이 경복궁  (0) 2013.11.14
경복궁 향원정(香遠亭)  (0) 2013.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