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하남성 낙양기행(2/2) 향산사

2013. 6. 25. 07:30해외여행

 

 

중국 하남성 낙양기행(2/2) 향산사(香山寺)

용문석굴 앞 이하강의 용문현의 다리를 건너면 항산 기슭에 있는 북위 희평 원년에 창건된 절이 하나 있다.

향갈나무가 많고 산 이름이 향산이라서 향산사라고 했다고 한다. 

북위 때 516에 창건되었다는 이 절은 우리에게 그렇게 알려진 사찰은 아니다.

달마대사의 법을 이은 혜가(慧可)스님이 여기서 출가했다고 하는데 그 자취를 찾아 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향산사의 주불은 아미타불로서 미타보전에 모셔져 있는데

향산사를 오르는 도로변에 고승(高僧)의 입상이 몇 분 세워져있다.

 

무측천이 황제에 오른 후 시인묵객을 불러 시화대회도 여기서 가끔 열었다고 한다.

향산사 앞 강 건너에 봉선사의 노사불상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그러나 향산사가 사람들 입에 회자하는 것은  용문석굴 보다도 두보, 이백과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백거이, 향상거사로 불리는 백거이가 이 향산사에 머물었기 때문이었으며

58세로부터 18년간을 친구 8명과 함께 노년을 보냈다가 열반한 그의 묘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앞에는 이하(伊河)강이 흐르고 강 건너 동쪽에는 동산과 용문석굴을 바라고 보고 있는 향산사는

낙양의 10대 사찰 중 가장 풍광이 으뜸이라고 한다.

장개석 또한 2층 누각에서 자신의 50대 생일잔치를 여기서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유품전시관까지 마련되어 있다.

 

경전을 진 현장법사를 상징한 것인지 입상에 설명이 없어 알 수 없다.

 

선무외입상. 선무외는 개원716년 당으로 건너와 밀교경전인 <대일경>을 당나라에 전파한 동인도 오림사 출신의 인도승이다.  

 

 

하택신회(荷澤神會668~760)상. 육조혜능의 유명한 5대 제자

남악회양, 청원행사, 연가형각, 남양혜충,과 더불어 한 분이다.

6조 혜능의 법맥을 정통으로 이은 분으로 여기고 있다. 

 

금강지(671~741)의 입상, 중국에 최초로 밀교를 전파한 인도승이다. 

향산사 입구, 일주문이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

 

장개석을 기념하기 위한 그의 유품과 머물었던 유품을 전시한 곳이다.

 

 

 

 

 

 

 

종루가 이색적이다. 맞은 편은 이하강이며 강건너 봉선사가 있다. 

 

 

 

 

 

 

 

 

 

백거이 묘로 가는 길, 향산사입구보다 거창하게 단장되어 있다.

향선사가 유명해진 것은 바로 백거이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와 연관지어보면 도림선사(道林禪師)와 일화가 유명하다. 

 

두보, 이백과 더불어 백거이(白居易:766~826) 당(唐) 나라의 3대 시인으로 알려진 백거이의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시호는 문(文). 허난 성[河南省] 신정 현[新鄭縣] 사람이다.

 

원화(元和)때에 항주 자사(刺使: 검찰관)로 부임한 백거이(白居易)가 도림선사를 찾아왔다.

백낙천(樂天)으로 알려진 백거이는 당시 당나라 제일의 문장가(文章家)요

불경(佛經)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지녔다고 자부심이 대다했던지 명망이 있고

지혜가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담론(談論)하기를 좋아하였다.

낙천(樂天)은 백거이의 자(字)가 된다. (字란 실명을 꺼려서 대신 부르는 일종의 별명이다.)

그러던 차에 그가 부임한 항주에는 조과(鳥窠) 도림선사라는 고승(高僧)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부임(赴任)인사도 할 겸 내친 김에 명성(名聲)이 자자한 고승을 시험(試驗)하고 싶어졌다.

도림선사(道林禪師)(741-824)는 항상 큰 고목나무에 올라가 가부좌를 하고

하루 종일 참선(參禪)을 하기 때문에 새가 동아리를 틀고 앉자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조과선사(鳥窠禪師)>라는 별명을 얻은 스님이다.

 

백락천이 선사를 찾아 온 날도 선사(禪師)는 예외 없이 나무위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백락천은 지신도 모르게

「아, 위험하다.」고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선사는 나무 밑을 내려다보면서

「아, 위험하다!」라고 앵무새처럼 따라했다.

백락천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는 머리를 하늘에 두고 발은 이렇게 땅을 밟고 있는데 무엇이 위험하단 말이오?」

「그대의 마음에 욕망(慾望)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식(識)이

파도(波濤)처럼 출렁거려 안정(安定)할 줄 모르니 어찌 위험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백락천은 그제야 「아차! 내가 실수를 했구나.」하고는

 자신의 아만(我慢)심을 느끼고서 스스로 머리를 숙여 선사(禪師)에게 여쭈었다.

그리고 나서 정중히 묻는다.

 

「불법(佛法)의 대의(大意)는 무엇입니까?」

선사는 짤막하게 대답한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번역하자면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많은 선행을 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맑게 하면 이것이 불교다.」라는 의미다.

 

악(惡)한 일 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행(善行)을 하라는 말은

마치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을 진다는 말처럼 평이한 말이 아닌가.

불교의 철학적 심오한 뜻을 물었건만 너무나 평범한 이런 대답을 들은 백락천은 웃음 지으며,

「아니 스님, 그건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아는 일이 아닌가요?」라고 반문한다.

「그렇소. 그러나 팔십(八十) 노인도 실천(實踐)하기가 어려운 일이라오.」

 

백락천은 그 순간 가슴이 꽉 막혀버리는 것 같았다.

한 동안 망연히 서 있던 그는 도림선사에게 다시 큰 절을 올렸다.

 

도림선사가 말씀하신 이 게송(偈頌)이 바로 교학에서 회자하는 칠불통게(七佛通偈)다.

 

백거이 묘소에는 우리나라 백씨 종진회가 세운 비문과 더불어 

그를 기리는 많은 시인 묵객들이 남긴 시문들이 새겨져있는 비석들이 많다.

 

 

 

 

 

 

  이 비문을 보니 일본에서도 백거이를 기리는 묘비를 남기고 간 모양이다.

 

 

백거이 묘비의 글씨는 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친필이라고 한다.

 백거이 묘는 1961년 용문석굴과 함께 중국국가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백거이는 가까운 사람 148여명과 더불어 <上生會>를 만들어 불도에 매진하였으며

말년에는 벼슬을 내려놓고 자신의 사비로 향산사을 중수하여 18년간을 머물렀다.

후에 주지 불광 여만선사佛光 如滿禪師)가 열반하자 백거이의 생전에 유언을 남겼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여만선사의 묘 옆에 안치하고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선사의 묘는 사라지고 지금은 백거이 묘만 남아 있다.

백거이의 묘를 백원(白園)이라고 부른다.

 

 

 

날은 흐렸지만 찌는 더위에 소갈된 육신은 파곤죽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팩케지 여행의 제한된 시간

   향산사는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돌아보았다.

봄날 잠시 피었다 지는 꽃처럼 우리네 인생도, 여행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던가.

백거이 시한수로 오늘을 마감하고 다음 예정지로 발길을 돌린다.

 

花非花(화비화)

~백거이~

 

花非花(화비화)

霧非霧(무비무)

夜半來(야반래)

天明去(천명거)

來如春夢幾多時(래여춘몽기다시)

去似朝雲無覓處(거사조운무멱처)

 

꽃이면서 꽃이 아니고

 안개이며서 안개가 아니네

한 밤중에 왔다가

 날새면 떠나가니

올 때는 봄꿈처럼 잠깐 왔다가

 갈 때는 아침구름처럼 흔적없이 사라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