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하남성 정주기행(2/3) 소림사

2013. 7. 2. 22:23해외여행

 

 

중국 하남성 정주기행(2/3) 소림사(少林寺)

@중국 남북조 시대에는 불교 전파를 위해 많은 스님들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 왔는데 그 중에서 발타선사라는 분이 있었다. 북위의 수도인 낙양에 머물면서 불교전파를 위해 역경사업에 많은 노력을 했다.

북위(北魏) 태화20년(서기496년)에 효문제(孝文帝)가 숭산의 한 자락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이 바로 소림사라고 한다.

1500년이나 되는 고찰이다. 서기 527년 선종의 태조라 불리는 달마대사가 이 절에서 9년간 면벽 수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소림사의 창건에 관한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청일통지(淸一統志)에

「천축의 가불타(迦佛陀)선사가 수(隋) 나라 때에 중국에 오니

수문제(隋文帝)가 숭산에 소림사를 세웠다(혹은 소림사는 북위태화(北魏太和 227~232) 年間에 세웠다.

수문제가 개명하여 척호(陟岵)라고 하고 당나라 때 少林이라 복명(復名)하였다.)

그 뒤 당태종 이세민이 왕세충을 멸할 때 소림의 담종(曇宗)선사를 비롯하여 13인의 스님들이 합세했는데

왕세충을 멸한 다음 관직을 내렸지만 모두들 사양하고 받지 않음에 자라가사(紫羅:검붉은 가사) 한 벌씩을 내리고

담종선사에게는 대장군의 작위만 부여했다. 이것은 당서(唐書)에는 빠진 것을 보충했다」고 했다.

 

 

   

@위에서 말한 발타선사와 가불타는 인도승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Gunabhaddra 393~468)를 의미한다.

중인도 사람으로 바라문 출신이며 천문, 수학, 의술, 주술, 오명학 등을 통달했다고 한다.

구나발타라란 말은 공덕현(功德賢)을 의미한다. 바라문이였던 구나발타라는 아비담잡심론(阿毘曇雜心論)을 읽고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송(宋) 원가(元嘉)12년(서기435)에 해로(海路)로 중국 광주(廣州)에 들어오니

문제(文帝)가 사신을 보내어 건강(建康)으로 맞아들여 기원사(祇洹寺)에 머물게 하여 역경사업을 하게 했다.

잡아함경, 대법고경, 승만경, 무왕경, 능가아발타라졍 등 52부 134경을 번역하고 세수 75세로 입적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마하연(摩訶衍) 이라 불렀다. <출처: 양승전 >

북위 태화 20년(496)에 창건되었다는 소림사 연대를 추산하면 송나라(420~479) 멸망한 후

 북위(386~534)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림사를 방문하기전 점심공양으로 들린 영태사, 소림사를 방문코스에 감초역을 맡은 절집이다. 

             절집이니 당연히 채식위주다. 절음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을 불러 일어키는 곳이기도 하다.

 

 

 

 

 

@소림사는 당태종 이세민 재위 이전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절이다.

창건 당시부터 사세는 그리 크지 못하다가 당나라 초기 수나라의 세력가인 왕세충이

낙양을 기반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 이세민의 천하통일을 위해 낙양에서 멀지 않은

정주 소림사 승려들이 힘을 실어주었다고 한다. 그후 당태종 이세민이 재위에 있으면서

소림사를 후원함에 사세가 확장되었으며 달마권법 및 무술의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다

 

 

 

@소림사는 1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명사찰로 부지가 3만 평방미터에 달한다.

기원전 527년 블교 선종의 시조인 달마대사가 여기에서 9년간 면벽좌선으로 유명한 사찰로 알려진 사찰이다.

그러나 일반에게 알려진 것은 불법(佛法)의 내용 보다는

달마가 선승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가르친 무술로 더 유명해졌으며

현재 소림사에는 외국유학생까지 포함해 15000여명에 이르며,

인근 동봉시에는 100여개 무술학원에는 3만명이 수련한다고 한다.  


            소림사 경내에서 설치된 소림무술관으로 관광객을 상대로 소림무술을 보여주는 곳이다.  

 

                                                 

 

소림무예

백취소(白醉璅) 에 이르길 황건(黃巾) 족의 난이 창궐하여 소림사를 처들어 왔을 때

모든 스님들이 겁을 집어 먹고 도망을 가려하자 붉은 머리를 한 노승(火頭老僧)이 나타나 내가 물리치겠다고 했다.

모두들 냉소하며 믿지 않자 그 스님은 봉(棒) 한 자루만 들고 침입한 황건족 무리를 격퇴시켰다.

노승은 돌아 와 그 황건족을 물리친 그 법으로 스님들에게 가르치고 숨어 버렸다.

그 스님이 긴나라불(緊那羅佛)의 현화(顯化)라 한다.

이로부터 소림사는 무용(武勇)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당(唐)나라 초기 왕세충(王世忠)를 멸할 때 스님들이 일조를 하였는데 당태종이 관직을 내렸으나 받지 않음에

장군의 작위만 주었다고 한다. 초서구(樵書九) 이르기를

「지금의 무예는 천하에 소림이 으뜸이고 그 다음이 복우(伏牛)이나 복우는 소림에서 배웠다.

그 다음이 오대(五臺)가 된다. 오대의 전통은 양씨(楊氏)의 딸에서 나온 것이며 양가창(楊家槍)이 이것이다.」라고 했다.

무협지에서 나오는 5대문파가 바로 여기서 말하는 오대다. 

 

 

 

 

 

 

 

 

 

 

 

 

 

 

 

 

 

 

 

 

 

 

 

 

 

참묘하게 생긴 나무다. 천년고찰을 지키큰 수호신처럼.

 

 

 

 

 

 

 

 

 수나라의 기운을 꺽기 위해 이치가 세웠다는 탑비인데 사자발에, 거북등에, 용머리를 했다.

 

 

  별 의미가 없었는지, 완성되지 않아서 그런지 한쪽 구석에 세워진 포대화상, 

 

먼  이국땅을 찾아와 시장통같은 사람들 때문에

법당 밖을 맴돌아야 하는 내 꼴처럼 법당에 들어가지 못한 부처.

중국은 정치는 사회주의를 경제는 자본주의 노선을 택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돈벌기에 안달한 나라처럼 보인다.

중국의 불교사찰이란 대부분 부처만 모시는 것이 아니라 도교,

유교 , 기타 잡다한 민앙신앙의 신까지 마치 신들의 백화점같은 기분을 들게한다,

소원을 성취하려면 많은 신들이 여기 있으니 마음에 드는 신을 골라 보라는 식이다.

소림사 또한 불교의 성지라는 의미보다 백화점 같은 기분이 든다. 신들의. 

북적거리는 인파, 껍데기만 요란한 전각들, 불타의 적정처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곳은 없었다.

소림사에 대한 기대를 너무크게 품었던 탓일까..

 

 

 

 

 

탑림(塔林)

@역대 고승들의 무덤으로 덕망이 높은 분들을 매장한 곳이다.

지위가 높을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그분들의 골회를 지관에 넣어 그 위에 탑을 지음으로서 공덕을 표시한 것이다.

탑의 높이와 크기 및 층수의 많고 적음은 주로 스님의 생전에 불교에 대한 조예가 얼마나 깊은 가를 표시하고

위망이 높고 낮음에 의해 결정되었다. 탑림은 당나라 때부터 지은 탑이 무려 240여개가 되며,

이는 중국에서 현존하는 면적이 가장 크고 수량이 가장 많은 옛탑 건축군에 속한다.

 

@우리가 탑이라고 부르는 말은 범어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카이트야( caitya) 로 한역으로는 지제(支提)이고

둘은 수튜파(stupa)로 한역으로 탑파(塔婆)라 한다.

 

 

불교사전에 의하면 지제(支提)는 범어 caitya 의 음사(소리글)로  지제(支帝), 지제(脂帝), 지징(支徵)이 된다.

신역에는 제다제저(制多制底), 제저야(制底耶)라고 했다. 적취(積聚)의 뜻으로 토석(土石)을 적취(積聚)하여 만든 것,

또는 세존(世尊)의 무량한 복덕(福德)이 이곳에 적집(積集)함을 말한다.

뜻으로 번역하면 영묘(靈廟)가 되고 혹은 사리(舍利)가 있는 것을 탑파(塔婆stupa)라 하고

사리(舍利)가 없는 것을 제저(制底, caitya)라 분별하기도 한다.

혹은 모두를 탑(塔stupa)이라 하고 구별해서는 제저(制底)라 함은

제저와 탑파는 그 뜻이 같아서 총(總)과 별(別)의 차이가 없다라고 설해지고 있다.